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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87/120)

87화

이런 또라이는 두 번째로 본다.

샤를로즈 그리고 저 레나라는 하녀.

유진은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저 레나라는 녀석에게 끌려다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대화는 여기까지. 신전에 관련된 것과 샤를로즈, 네 약혼에 대해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던 티아와 상의를 하지. 티아도 결혼을 원할 수 있으니까.”

“네, 물론이죠. 유진 오라버니. 잘 쉬세요.”

샤를로즈는 드디어 이 개자식이 방에서 떠나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뻥 뚫리는 듯했다.

역시 이 집안 사람들이랑 안 맞아.

샤를로즈는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하아, 신전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네 덕에 얼추 넘어갔다. 레나.”

“샤를로즈 님의 유일한 보좌관인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여긴 신분 제도야. 한낱 사용인이 주인의 대화에 끼는 건 예의에 아주 어긋나. 레나.”

“저도 그런 건 다 알아요. 하지만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기 위해서는 티아가 필요해요. 티아는 이 게임 속 여자 주인공이며, 결말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에요. 허무하게 신전에서 빼앗기면 안 되죠.”

“네 말이 맞아. 신전에게 허무하게 빼앗길 바에는 폐하를 이용하는 쪽이 낫지.”

“그래서 약혼은 계속 이어 갈 생각이신가요? 저는 그편이 나을 것 같아요. 규모가 아주 큰 제국의 황제의 반려자가 되면 티아도 그 황제를 더 공략하기 쉽지 않겠어요?”

“그거 불륜이야. 레나.”

“뭐가 어때서요. 어차피 샤를로즈 님은 그 황제가 뭘 하고 돌아다니든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

“이참에 남자 주인공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어때요?”

“그 새끼들이랑 어떻게 친해져? 나는 못 해.”

“계속 보다 보면 친해지지 않겠어요? 정말 싫은 사람도 계속 보면 미운 정 드는 것처럼.”

“……레나, 나 일부로 엿 먹이려고 그런 말 하는 거야?”

“아뇨. 전 언제나 진심이에요.”

“하아, 다른 대책은 없어? 꼭 그거여야만 해?”

“다른 거라면, 티아에게 대놓고 남자 주인공들을 꼬시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 어떠하신지? 이 방법이 가장 쉬울 것 같은데요.”

“그런데 티아가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지 의문인데.”

“분명히 들어줄걸요. 티아는 샤를로즈 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니까요.”

“남자 주인공들이랑은 절대로 못 친해져. 아니 친해지고 싶지도 않아. 안 맞아.”

“그럼 두 번째 플랜밖에 없네요.”

샤를로즈는 한숨을 깊고 길게 내쉬었다.

왜 언제나 자신의 인생에 큰 난관이 있냐는 듯이.

***

티아는 아침부터 샤를로즈 생각에 푹 빠졌다.

언니가 보고 싶어.

왜 자꾸 밀어내는 거야.

‘난 언니랑 잘 지내고 싶은데.’

우울해하고 있는 티아 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샤를로즈와 담판을 짓고 오겠다던 유진이었다.

“티아. 샤를로즈와 담판은 못 지었다.”

“언니의 고집을 누가 꺾어, 유진 오라버니 포기해.”

“너, 신전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없어.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럼 폐하와의 결혼은?”

“없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샤를로즈의 약혼을 유지할 수밖에 없겠군.”

“잠깐만, 언니가 약혼을 했어? 누구랑? 왜 말 안 했어.”

“폐하와 약혼했어. 네가 사라졌던 어느 날에.”

“언니가 원한 약혼이야?”

“나야 모르지.”

“당장 파혼시켜. 오라버니.”

“왜?”

“그야 언니는.”

“언니는? 뭐 왜 말하다가 말아.”

“언니는 내 거니까.”

“……너도 제레미 닮아 가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 언니를 원해. 너무 원해서 미칠 지경이야. 유진 오라버니, 제발 샤를로즈 언니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티아. 샤를로즈는 널 괴롭힌-.”

“내가 용서하겠다잖아. 내가 괜찮다잖아. 왜 그러는 건데.”

“내가 용서를 못 하겠으니까 그러지.”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오라버니가 왜 난리야?”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진정해, 티아.”

“나 원래 이런 애야.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나도! 모든 걸 끌어안을 수 있는 성녀가 아니란 말이야. 나도 사람이야. 감정이 있어. 인형이 아니라고.”

“티아. 진정해.”

“유진 오라버니, 그럼 여기서 정해. 나와 척을 질지, 아니면 샤를로즈 언니를 내버려 둘지.”

“티아.”

“정해. 얼른.”

“하아, 알겠어. 샤를로즈를 내버려 둘게. 됐어?”

유진이 진정한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건 티아밖에 없었다.

지금 제레미도 상태가 안 좋은데 티아까지 미쳐 버리면.

자신이 감당하기가 벅찰 것이 분명했다.

그냥 티아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는 편이 낫다는 편이 들었다.

그래, 티아가 더 중요하지.

유진은 티아를 조심스럽게 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너밖에 없어. 티아. 그러니깐 네 말을 들을게.”

티아는 금방 꼬리를 내리는 유진의 행동에 이제 화내는 연기는 그만두었다.

‘언니,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봐 줄 거지?’

티아의 청명한 푸른색 눈동자에 자욱한 어둠이 깔렸다.

***

앞으로 티아의 생일 축하 파티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였다.

샤를로즈는 유진에게서 파혼장을 받았고, 결국 해리슨과 파혼을 하게 됐다.

그리고 해리슨이 신전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어 성녀인 티아는 신전에 가지 않아도 됐다.

엉킨 것들이 어려움 없이 풀리자 샤를로즈는 레나와 함께 여유를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똑똑똑-.

누군가가 샤를로즈의 방문을 두드렸다.

샤를로즈는 개의치 않고 방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거지 같은 남자 주인공들이 들이닥쳐도 샤를로즈의 기분은 괜찮았다.

“언니.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이번에는 방으로 들여보내 줄 거지?”

“그래. 내게 큰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네. 들어와.”

오십 번은 이 방문을 두드렸던 것 같은데.

티아는 샤를로즈의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방문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방문을 조용히 닫고 샤를로즈의 앞에 당당히 서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언니, 나랑 쇼핑하러 가자.”

“음, 싫은데. 집 밖은 위험해. 나가기가 싫어.”

“언제까지 방구석에만 갇혀 있을 건데. 나랑 좀 데이트도 하고 그러자.”

티아는 거의 매달린다 싶을 정도로 샤를로즈의 한쪽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하지만 샤를로즈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싫어.”

“가자.”

“싫다니까.”

“언니, 가자. 나 언니를 위해서 언니랑 폐하의 약혼도 막았고, 신전에도 안 갔어.”

“그건 네가 원해서 한 행동 아니야?”

“언니를 위해서 한 행동이야. 언니가 내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했잖아. 나, 언니가 한 말 다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깐 한 번만 나가자.”

“기억하는 거랑 밖에 나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언니 자꾸 그러면 나 이제 언니 말대로 안 한다?”

“협박하는 거야?”

“응. 협박.”

“그럼 나가는 대신에 조건이 있어.”

샤를로즈의 말에 티아는 두 눈을 반짝였다.

샤를로즈의 말이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다.

“뭔데, 다 들어줄게.”

“정말 다 들어줄 거야?”

“응.”

“그러면 네 주변에 있는 남자 아무나 하고 결혼해.”

클리셰적으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결혼이 있어야 결말이 나겠지?

티아가 여러 남자 주인공들 중 한 명만 물고 결혼하면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는 끝.

게임의 스토리도 끝날 것이다.

왜냐, 여자 주인공이 진짜 남자 주인공을 선택했으니까.

이렇게 간단한 일이.

물론 결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 역시 뭐, 이혼도 가능하고 재혼도 가능한 세계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샤를로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티아를 쳐다보았다.

티아는 샤를로즈를 살짝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잠시 잃었다.

결혼?

‘내가 결혼?’

그것도 주변에 있는 남자 아무나 골라서?

언니, 그건 말이 심하잖아.

“싫어. 나는 결혼 안 해.”

“그러면 약혼까지만 하는 건 어때? 파혼도 가능하잖아.”

백번 양보해서 약혼까지만 해도 그레이스의 시나리오가 깨지겠지?

샤를로즈는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보통 역하렘 게임 속, 역하렘 소설 속의 엔딩은 결혼이잖아.

애도 가지는 엔딩도 있고.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정확하게 알면 그대로 하겠는데, 모르니까 긴가민가했다.

“레나, 그레이스가 쓴 시나리오의 엔딩을 알고 있어? 여주와 남주만 이어지면 되는 거 아니야?”

옆에 쥐 죽은 듯 있던 레나가 샤를로즈의 부름에 얼른 말문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저도 몰라요. 그레이스가 무슨 결말을 원하는지는.”

“정말……? 그럼 지금까지 해 온 건 다 개고생이라는 거야?”

“그건 아닐 거예요. 분명히 티아를 중심으로 이룬 이야기라고는 우연히 들었는데. 결말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결말은 무조건 해피 엔딩 아니겠어요?”

생각해 보니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는데 결말을 모르고 있었네.

‘미쳤나 봐. 티아랑 남주들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앞서 이런 자잘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다니.’

돌아 버리겠네.

이걸 어쩌지 싶었지만.

레나가 머리를 최대한 굴려 그레이스의 시나리오의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떠오르게 된 기억이 레나의 머릿속에 영화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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