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티아를 사랑하라고, 하!”
유진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고, 샤를로즈는 얌전히 그의 반응을 관찰했다.
“네. 그러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거예요.”
“대체 뭐가 완벽해지는데,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악역인 제가 사라지면서 저를 제외한 나머지 제레미 오라버니 그리고 티아와 행복하게 사는 완벽한 삶이요. 그런 결말을 제가 원하거든요.”
“왜 네가 사라진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유진 오라버니는 늘 그러셨잖아요. 레베크 공작 가문에 명예를 실추시키는 골칫덩어리 샤를로즈라고.”
“그건 네가 악행을 저질러 왔으니 당연한 별명이 아닌가 싶은데.”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아니 샤를로즈를 가족으로 본 적 있으세요?”
“없어.”
“그러니깐 제가 사라져 드린다고요. 이 촌극이 끝나면.”
“네가 사라진다고 모든 것이 완벽해지지 않아. 오히려 네가 있어 줘야 해. 죽은 어머니를 위한다면 말이지.”
“저는 자유를 원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제가 사라지기를 바라셨잖아요.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유진 오라버니가 제게 처음으로 한 말을 기억하세요?”
“미안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군.”
“너 같은 게 집안에 굴러와서 가문이 멸한다고. 저는 기억하는데.”
그렇다.
샤를로즈는 죽은 선대 공작 부인에게 말고는 레베크 공작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은 티아나 제레미에게 일원으로 거의 인정 받았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죽은 선대 공작 부인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유진은 샤를로즈를 보자마자 막말을 퍼부었고, 그녀는 그 막말에 엄청난 상처를 받아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
샤를로즈의 몸에서 몇 달 넘도록 살다 보니 옛날 과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었다.
어두운 과거 뿐만 아니라 즐거운 과거까지 모두.
샤를로즈는 제 죽은 양어머니를 그리움을 곱씹다가 자살 시도를 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샤를로즈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샤를로즈는 더욱 미쳤고, 결국 악행을 서슴없이 하는 악역이 되어 있었다.
샤를로즈의 마음을, 과거를 몇 번이고 꿈꿨다.
그럴 때마다 고통스러운 건 백 번째 샤를로즈, 김단이었다.
김단은 울고 싶을 정도로 우울할 때도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어떻게든 모든 일에 무심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자살까지 해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도 했다. 비록 금방 게임 속으로 돌아와 버렸지만.
이 악역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아득바득 죽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자신은 샤를로즈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샤를로즈는 옛 기억과 자신의 갖은 노력을 선선히 떠올리며 유진을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옛날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바뀌니 이제야 관심이 생기는가 보죠?”
유진은 샤를로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옛날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레베크 공작 가문의 수치 정도.
그런데 지금은 이 망할 것이 가족들을 망가트리려고 하지 않는가.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아니, 이제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티아가 입양아라는 건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그건 유진의 알 바가 아니었다.
티아가 입양아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마 샤를로즈와 제레미뿐이었으니.
입막음 하면 됐다.
유진은 그냥 지금 이 사태에도 굳건히 나오는 샤를로즈가 역겨울 뿐이다.
“그래서 내가 무릎을 꿇기라고 바라나?”
“아뇨. 그냥 지금을 즐기세요. 저도 여유롭게 즐기고 있으니까.”
“네가 뭐가 됐든 간 파양은 시켜주지 않을 거다. 그것만 알고 있어.”
“파양해 달라고 폐하께 부탁할 건데요? 제가 폐하를 도와줬거든요. 가출한 티아를 찾아주는 것 말고도 다른 한 가지도.”
“아, 폐하가 네게 약혼장을 보냈더군. 그건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어요. 어차피 저는 티아 대신으로 약혼을 하려고 했으니 이제 파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샤를로즈. 그 약혼장은 네가 티아를 데리러 갔을 때 이미 성사되어 너와 폐하는 약혼한 사이라는 걸 몰랐던 건가?”
“…파혼하면 돼요. 어차피 폐하도 저 같은 약혼녀 원하지도 않아요.”
“무슨 소리를 자꾸 하는 거야. 폐하가 너와 약혼을 계속 진행하겠더군.”
“폐하께서도 좀 미치셨대요?”
“나야 좋지. 골칫덩어리가 황족에 들어가면.”
“설마, 오라버니 파혼 신청을 하지 않을 계획이신가요?”
“폐하가 원한다는데 뭐 어째. 그렇게 해드려야지.”
“폐하는 티아를 원해요. 제가 아니라.”
“나도 몰라. 폐하가 무슨 마음으로 너와 약혼을 유지하겠다고 한 것인지.”
“당장 파혼장을 황궁에 보내세요. 유진 오라버니.”
유진은 가세가 자신에게 기울어진 걸 깨닫자마자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샤를로즈를 내려보았다.
“내가 어떻게 폐하의 황명을 무시할 수가 있을까.”
“유진 오라버니. 이건 아니잖아요. 제가 황후가 된다면 이 나라는 망할 거예요. 게다가 다른 고위 귀족들도 반발할 거예요. 저와 약혼하고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음. 아니던데.”
“혼자만 알지 말고 저도 같이 알아요, 오라버니.”
샤를로즈는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 자신이 깊게 분노했다는 걸 표현했다.
“너에 대한 다른 고위 귀족들의 평판이 갑자기 좋아졌어. 사라진 성녀를 데려온 용감한 영애라면서 말이지.”
“……왜 여론이 갑자기 그렇게 바뀐 건가요?”
분명히 처음에만 해도 세상 모든 사람이 샤를로즈에게 손가락질했다.
너는 참 못됐다고.
악역이라고.
미쳤다며.
그래 놓고서는 이제 와서 용감한 영애?
“그러게 말이야. 네가 티아를 데려온 후부터 주변 상황이 꽤 달라졌어. 그래서 그런지 폐하께서 파혼 이야기를 선뜻하지 못하더군.”
“티아가 있잖아요! 저는 그저 티아의 대타였을 뿐이었어요.”
“아, 그거 몰랐나. 샤를로즈?”
“또 뭐가요.”
“성녀는 결혼을 하지 못해. 신전에서 성녀의 혼인을 막아 버렸거든.”
“설마 어머니 때문에?”
“아무래도 그러겠지. 그리고 신전 쪽에서 얼른 티아를 내놓으라고 성원이야.”
아, 신전에 관련되어 생각해 놓은 대책이 없네.
이걸 어쩌지.
하던 찰나였다.
“제가 티아 아가씨의 숨겨 둔 쌍둥이 여동생 역할을 하는 건 어떤가요?”
레나가 샤를로즈의 뒤에서 튀어나와 유진을 향해 물었다.
고작 하녀 따위가 나서서는 안 될 대화였지만, 유진은 가만히 있었다.
레나의 외형이 티아와도 같아 완벽하게 적응이 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네가 낄 자리는 아닌데?”
“샤를로즈의 전속 하녀로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실 공작님은 티아 아가씨를 신전에 보내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그렇죠?”
“네가 낄 자리는 아니라고 말했다.”
유진은 레나를 무시하려고 해도 의식적으로 그녀를 응시하게 되었다.
“티아 아가씨가 가 버리면 아마 티아 아가씨 죽을지도 몰라요. 제가 티아 아가씨 곁을 섬에서 지켰었는데…… 신전은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며 펑펑 우셨어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공작님은 티아 아가씨가 슬픈 인생을 살기를 바라세요?”
“하아. 정말 샤를로즈랑 너랑 쌍으로 뭐 하자는 거지?”
레나는 슬픈 눈을 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티아와 같은 얼굴로 슬프게 저를 보는 레나가 시야에 보이자 뒷걸음질 쳤다.
“티아 아가씨를 더 이상 슬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병자들의 섬에서 티아 아가씨가 우는 모습만 떠오르면 가슴이 미어져서, 흑!”
레나는 기어코 눈물을 보였다.
샤를로즈는 레나의 신들린 연기에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연기는 참 잘해요.
현실 세계에 있었다면 배우상은 다 휩쓸고 다녔을 것이었다.
세상을 잘못 만나 이런 개고생을 하는 레나가 조금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다가 레나가 몰래 오른손으로 샤를로즈를 툭 건드렸다.
자신을 도우라는 의미 같았다.
샤를로즈는 눈치껏 자신도 연기에 들어갔다.
“맞아요. 유진 오라버니. 레나는 티아의 곁을 지킨 아주 큰 일은 한 애예요. 이 애의 말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신전 쪽에서 난리야. 나 혼자 막지 못해.”
생각해 보니 신전이 큰 골칫덩어리였다.
만약에 신전에서 티아를 쏙 빼 가면 누가 그레이스 시나리오를, 이 촌극의 끝을 보겠냐는 말이다.
‘신전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었어. 바보 같긴.’
그래도 유진 오라버니 덕분에 신전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좋네요.
샤를로즈는 화가 난 기분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 눈치가 아주 빠른 자신의 자칭 보좌관 레나를 속으로 칭찬했다.
“그럼 샤를로즈 아가씨께서 폐하와 약혼을 유지하는 게 어떠하신가요? 폐하의 권력이라면 신전은 찍소리도 못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잠깐만, 레나!
샤를로즈는 속으로 레나를 칭찬하던 것을 멈추고 바로 쌍욕을 날렸다.
“하긴 폐하의 권력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너, 아는 것이 왜 이렇게 많지? 수상하게.”
레나는 우는 행위를 멈추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책을 좋아해서요.”
참, 황당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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