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20)

85화

유진을 방 안을 들일 수 밖에 없게 된 이 상황에 샤를로즈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 오라버니, 그래서 저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대화 거리가 뭔가요?”

“드디어 네 진실을 네 입으로 말할 때가 온 것 같군.”

“유진 오라버니, 저는 지금까지 진실을 말하고 있어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제레미 오라버니가 미쳐서 헛소리를 지어낸 거라니까요.”

샤를로즈는 기가 빠진다는 듯 어깨를 축 내렸다.

유진은 그런 연기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샤를로즈에게 성큼 다가가자 레나가 그 앞을 막았다.

유진은 레나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 티아 판박이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본능적으로 그 애를 ‘티아’라고 부를 뻔했다.

분명 샤를로즈의 전속 하녀라고 샤를로즈가 끼고 도는 애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티아와 비슷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비슷한 걸 넘어서 똑 닮았는데.

티아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샤를로즈는 이마에 손을 짚고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레나.

넌 가만히 있지.

샤를로즈는 레나를 절대로 남자 주인공들 앞에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야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레나는 유능한 자신의 보좌관이었다.

이런 유능한 보좌관을 빌어먹을 남자 주인공들에게 빼앗기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특히 티아와 너무 닮은 외형 때문에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에 샤를로즈는 레나를 숨기고 또 숨겼다.

그런데 왜 레나가 갑자기 튀어나와 내 앞을 두 팔을 벌려 막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티아와 똑같이 생겨 불쾌하군.”

“죄송해요. 저는 샤를로즈 님이 걱정되어서…….”

“걱정돼? 저 극악무도한 것이?”

“샤를로즈 님이 있어야지 세상이 돌아가요. 그걸 아셔야 해요.”

레나는 유진 앞에서 긴장이 전혀 되지 않은 듯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저는 일개 하녀지만, 제가 섬긴 주인을 지킬 의무는 있어요.”

“하! 샤를로즈, 전속 하녀는 잘 데려왔네. 널 대변해 주는 하녀를.”

“레나, 이제 그만해.”

“안 돼요. 샤를로즈 님.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요.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최선의 방법으로 움직여야 해요.”

샤를로즈는 레나의 마지막 말에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유진이 오기 한참 전, 레나와 머리를 맞대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

[제레미 오라버니를 조종하는 건 어떻게든 되겠는데, 유진 오라버니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직진 돌파예요. 어쩔 수 없어요. 제 예상으로는 제레미라는 그분 왠지 모르게 유진이라는 분에게 모든 것을 실토할 것 같아요.]

[그런가.]

[그냥 제레미 분에게 저희의 이야기를 살짝만 맛봐 주세요.]

[그리고?]

[유진이라는 시한폭탄이 샤를로즈 님에게 찾아오겠죠. 이상한 말을 들었다고.]

[어쩜 그리 확신하는 건데?]

[그냥 천 년 이상 살다 보면 각이라는 게 나오더라고요.]

[그럼 유진 오라버니가 찾아오면 어떻게 대처하지? 아, 머리가 안 돌아가.]

[말이 정말 통하지 않으면 제가 나설게요. 샤를로즈 님은 제 말에 맞춰 주세요. 대충.]

[대충? 아아, 귀찮네.]

[어쩔 수 없어요.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려면 이런 난관도 한 번쯤은 부딪혀야죠.]

[아. 그래.]

라고 레나와 수다를 떨었던 게 최근 일 같은데 정말 그 애가 말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그 애가 이 게임 속의 진행자를 맡은 것처럼.

“하, 그냥 본론만 말해. 샤를로즈, 너 숨기는 게 뭐야.”

레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티아를 사랑해야 네 악질이 끝나는 거야?”

레나는 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샤를로즈는 레나의 움직임 없는 행동의 의미를 알아챘다.

[샤를로즈 님. 만약에 제가 대답하기 어려우면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그 의미는 긍정이라는 뜻이에요.]

[레나는 참 철저하네.]

[이렇게 미리 계획을 세워 두지 않으면 골치 아프거든요.]

정말 어느 면에서는 레나가 대단하게 느껴지네.

얼마나 미래를 앞서 본 거야.

“유진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티아를 원하고 있는 다른 분들도 함께 그 애에게 집착하고 사랑했으면 해요.”

샤를로즈의 정신 나간 발언에 유진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렇게 묻는다면야.

“이렇게 끈질기게 물어 올 줄은 몰랐어요. 그래요, 제가 비밀을 알려 드릴게요. 충격 받지 마세요.”

“여기서 더 충격을 받아.”

“이 세상은 티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어느 한 연극과도 같은 곳이에요. 유진 오라버니, 제레미 오라버니, 그리고 다른 주변의 남자들은 남자 주인공이에요. 즉, 티아를 공략해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거지요.”

“무슨 소설을 쓰는구나.”

“소설이 아니라 진짜예요. 저는 이 연극을 끝내러 온 사자랍니다.”

“정말 어이가 없군. 내가 이런 거지 같은 말을 듣기 위해 시간을 뺀 건 아닌데.”

“어이가 없어도 제 말을 이해하셔야 해요. 저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이 연극은 누가 만들었지?”

“죽은 신이요.”

“신?”

“네. 그레이스라는 신이 이 거지 같은 연극을 만들고 죽어 버렸어요. 저는 그레이스의 뒤를 잇는 신의 후계자예요.”

“그러니깐, 아. 빌어먹을, 이해가 안 되네. 네가 신의 후계자?”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공략을 실패했으니 이제는 유진을 공략하려고 했다.

유진은 혼란스러운 듯 눈꺼풀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모든 건 순리대로 움직일 테니까요. 아마도요.”

“대체 너, 누구야. 넌 진짜가 아니야. 누구냐고.”

샤를로즈는 끈질기게도 붙잡는 유진을 향해 냉정하게 대답했다.

“어느 세계에서 영혼이 넘어온 백 번째 샤를로즈. 그게 바로 저예요.”

“미치겠네.”

“여태까지 진짜를 연기하느라 꽤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진짜는 유진 오라버니 말대로 죽었어요. 자살로요. 그런 빈 껍데기에 제 영혼이 들어간 셈이죠.”

샤를로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유진은 더욱더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네가 그럼 제레미가 말한 가짜 샤를로즈란 거냐.”

“네. 그런 셈이죠.”

“진짜는 정말로 죽었어?”

“죽었어요. 진짜 샤를로즈의 어두운 과거를 보니 어느 날 수면제를 진탕 먹고 죽었더군요. 참, 안타깝지 않아요? 죽은 선대 공작 부인을 따라 죽는 아주 착한 애가 유일한 악역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어요.”

“진짜가 죽었다고, 죽었다고.”

유진은 옛날 샤를로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유진 오라버니. 티아 말고 제게도 관심을 주면 안 돼요?]

[유진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다시는 티아의 물건에 손대지 않을게요.]

[유진 오라버니, 어머니가 죽었어요.]

[유진 오라버니, 제 삶이 사라졌으니 죽는 게 맞겠죠?]

[유진 오라버니. 잘 있어요.]

샤를로즈는 그래도 제 가족인 자신을 붙잡았다.

붙잡고 또 붙잡았지만, 유진은 샤를로즈라는 입양아를 제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미를 죽인 그 애.

유진에게 있어 샤를로즈는 딱 그 정도 악역이었다.

샤를로즈는 제 어머니를 참 잘 따랐다.

친모처럼.

하지만 어머니는 샤를로즈와 있고 나서부터 몸이 갑자기 나빠지더니 그대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유진은 티아도 괴롭히고 제 어머니도 죽게 한 샤를로즈가 죽도록 미웠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유언대로 샤를로즈를 레베크 공작저에 남게 했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샤를로즈의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진짜 샤를로즈는 죽고, 가짜 샤를로즈가 제 눈앞에 있다고 하니 조금 열이 받았다.

가짜가 아닌 진짜에게.

그렇게 가문을 망쳐 놓고 간 그 진짜 샤를로즈에게.

“앞으로 넌 어쩔 셈이지?”

“이 연극을 끝내러 왔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유진 오라버니가 필요해요.”

“그렇게 제레미에게도 반협박을 한 건가?”

“그럴 리가요. 제레미 오라버니에게 큰 강요는 하지 않았어요. 그냥 티아를 사랑해 달라는 부탁밖에는.”

“나보고도 티아를 사랑하라는 말을 할 셈인가?”

“네. 어차피 유진 오라버니는 티아가 첫사랑이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

“첫사랑과 이뤄질 수 없는 근친의 관계이지만, 그거 아세요?”

“뭐지.”

“티아도 저와 같은 입양아라는 사실을.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니까 파양시키고 유진 오라버니가 티아를 가지면 이 연극은 끝이 날 수도 있겠네요.”

사실 이 게임의 진 남주는 없었다.

여러 명의 남자 주인공들을 공략해 내가 스스로 진남주를 선택하는 게임이었으니까.

분명히 지금도 그 규율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분명히.

샤를로즈는 곱상하게 웃으며 유진에게 다시금 똑같은 말을 강조했다.

“티아를 사랑하세요. 유진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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