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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120)

83화

샤를로즈와 티아 그리고 레나를 이동 마법으로 보낸 요한이 조금 힘든 기색을 했다.

“벌써 피곤하네. 폐하는 나중에 보내 줘도 돼?”

“티아가 원래대로 돌아갔으니 나도 돌아가야지. 요한.”

“악마, 너는 알아서 돌아와.”

“뭐, 상관없어요. 당신의 지루한 마법 따위 없어도 금방 갈 테지만요.”

루아는 지금 샤를로즈가 눈앞에 없음에 짜증이 났다.

루아는 그렇게까지 좋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샤를로즈 앞에서 얌전한 척 굴었던 것이지 평소에는 냉담하며 잔인했다.

심성이 곱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정도로 루아는 악동 같은 존재였다.

악마들은 루아를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동족끼리 싸움을 시키는 걸 좋아했고 즐겼으니까.

그런데 이리 얌전한 모습을 본다면 다른 악마들은 기겁할 것이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없자 굉장히 싸늘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저 두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샤를로즈를 싫어하면서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죠?”

“그거야 샤를로즈는 나쁘니까.”

“폐하 말대로 샤를로즈는 심성이 곱지 못해서-.”

“그러니깐 왜 그런 나쁜 샤를로즈에게 관심을 보이냐, 이 말이에요.”

루아는 해리슨과 요한이 샤를로즈에게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해리슨은 뻔뻔한 낯짝으로 잘도 샤를로즈를 입에 담았다.

“일단은 샤를로즈는 티아의 언니니까. 관심이 있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루아는 고작 그런 관심뿐이냐며 되물었다.

해리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요한 역시 샤를로즈가 도망간 티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대답했다.

루아가 왜 저들에게 샤를로즈에게 관심이 있냐 물은 거냐면.

샤를로즈가 자신에게 부탁한 게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레베크 공작저로 가기 전에 샤를로즈는 루아에게 정말 중요한 임무를 줬다.

[루아. 폐하와 요한이 제게 관심이나 호기심이 있나 떠봐 주세요.]

[어째서요?]

[앞서 말했듯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기 위해서는 그녀가 지정한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인 티아에게 집착하며 사랑을 느껴야 해요. 만약에 제가 그 시나리오에 껴서 시나리오 결말이 잘못된다면 저는 신이 되지 못해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루아는 어쩔 수 없었다. 평소 연기가 아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샤를로즈의 부탁이었으니까.

그리고 샤를로즈가 신이 되기를 바랐으니, 자신도 그녀가 신이 되기를 바랐다.

이렇게 순한 양인 척하면서 사는 건 샤를로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루아는 샤를로즈와 그나마 티아를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예전의 모습으로 대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이런 상냥한 연기는 집어치워야지.

루아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

유진은 샤를로즈와 어떤 하녀를 보내고 집무실에 티아와 제레미를 불러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체 너희 왜 그래? 티아, 넌 샤를로즈에게 그렇게 당해 놓고 샤를로즈를 감싸고 싶어? 제레미, 너도.”

티아는 유진의 잔소리에 얼굴을 조금 굳혔지만, 그에 대해 불평은 하지 않았다.

티아는 제 오라버니들에게 샤를로즈에 대한 사랑을 아직은 비밀로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얌전히 있는 건데.

“샤를로즈를 파양시키는 건 어때, 유진 형?”

“파양? 지금 와서 어머니가 아끼는 저 입양아를 파양하자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제레미?”

“샤를로즈도 원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

“난, 싫어. 언니가 있는 게 더 나아.”

티아는 샤를로즈를 곁에서 더 자주 보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신분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감정이 가족이라는 관계상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는 만큼은 계속 샤를로즈를 보고 싶었다.

이런 티아의 마음을 모르는 유진은 그저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도 티아와 같은 의견이야. 파양은 너무 멀리 갔어. 차라리 어디로 요양이라도 보낼까 생각 중이야.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티아와 제레미는 그건 절대 싫다고 대답했다.

유진은 돌아온 티아의 문제가 아니라 티아와 함께 돌아온 샤를로즈의 문제에 두통이 크게 아려 왔다.

‘티아가 걱정일 줄 알았는데 샤를로즈가 더 큰 걱정거리가 되다니. 젠장.’

레베크 공작인 유진은 레베크 공작가의 일원인 샤를로즈 레베크를 내쫓고 싶었지만, 또 다른 일원들이 거부하니 멋대로 샤를로즈를 어디로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저 녀석들이 자신에게 반기라도 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 받는 스트레스는 샤를로즈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진은 일단 알겠다며 티아와 제레미를 집무실에서 내쫓았다.

혼자 남겨진 유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망할 샤를로즈. 아주 우리 가문을 망가트릴 기세구나.”

유진의 눈매가 세로로 퍼졌다.

독기를 품은 눈빛이었다.

***

샤를로즈는 레나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똑똑똑-.

누군가 샤를로즈의 방에 노크했다.

샤를로즈는 당연히 그 주인공이 티아라고 생각하며 문을 벌컥 열어 줬다.

그런데 방을 노크한 주인공은 티아가 아닌 제레미였다.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인상을 팍 썼다.

“오라버니, 무슨 일로 제 방에 찾아오셨어요?”

“말할 게 있어서.”

“저는 할 말이 없어서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나 우연히 들었어. 네가 샤를로즈가 아니라는 거.”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뜬금없는 발언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분명히 이 방에서 루아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한데.

언제?

어떻게 들었대?

샤를로즈는 당황스러움을 숨기고 악역처럼 대꾸했다.

“제레미 오라버니가 미쳤다는 말을 우연히 들었는데, 정말 미치셨나 봐요?”

“네가 샤를로즈가 아니라 빙의라는 걸 했다는 거 다 알아. 아니, 너와 악마 새끼의 대화로 우연히 듣게 됐어.”

“이상한 소리는 이제 그만하시고 돌아가세요. 불쾌해요.”

“진짜 샤를로즈는 죽었잖아. 너는 가짜잖아.”

샤를로즈는 ‘가짜’라는 말에 눈이 홱 돌았다.

제레미 앞에 당당히 서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진짜건 가짜건 제레미 오라버니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샤를로즈의 금색 눈동자에 살기가 역력했다.

제레미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후회하고 있으니까.”

“제게 했던 말과 행동을 후회하고 있으면 그냥 입 닥치고 얌전히 구세요. 그게 저를 위한 일이니까요.”

샤를로즈는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이런 변수 따위는 필요 없었다.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네게 잘못한 내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거든.”

“제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 제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면 저도 제레미 오라버니의 만행을 용서할게요.”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려면 제레미 레베크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무려 남자 주인공인데.

안 중요할 리가.

“좋아. 앞으로의 인생을 네게 맡길게. 그게 내 선택이야.”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제게 관심은 갖지 마시고 티아에게 관심을 가져 주세요. 티아를 사랑해야 해요. 알겠죠?”

샤를로즈는 대충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인 설명이 낫다는 판단하에 제레미에게 대놓고 명령을 내렸다.

티아, 이 게임 속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라고.

어차피 제레미와 유진은 짭근친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티아와 피가 섞이지 않았다.

티아는 전 선대 공작 부인이 입양한 아이였다.

그러나 레베크 공작저에는 그 사실을 숨겼다.

두 번의 입양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게다가 티아는 여자 주인공답게 남자 주인공들이 있는 이 레베크 공작저에서 친남매처럼 잘 지냈다.

그러나 티아가 아주 어렸을 때 선대 공작 부인에게 입양된 거라 그녀는 기억이 없었다.

아마 자신이 레베크 공작저의 진짜 일원인 줄 알고 있겠지.

“제레미 오라버니. 티아도 저와 같은 입양아예요.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니 사랑할 수 있어요. 제발 티아를 사랑해 주세요, 네?”

“……샤를로즈, 그거 진심이야?”

“저는 늘 진심이었어요. 모든 일에. 봐봐요, 도망간 티아도 잡아 왔는데요?”

“하긴, 넌 늘 진심이었지. 우리가 그 진심을 내친 거고.”

“잘 아셨으니 됐어요. 이제 제 말대로 티아를 사랑하고 아끼세요. 제가 무슨 짓을 당해도 무시하세요. 그게 제레미 오라버니가 해야 할 일이에요. 제게 용서를 바란다면요.”

“…알았어. 티아를 사랑할게. 어떻게든.”

“좋아요. 저는 그 사랑을 구경할 테니 재밌는 사랑 보여 줘야 해요?”

샤를로즈는 활짝 웃으며 방문을 닫아 버렸다.

제레미가 시야에 보이지 않자 샤를로즈는 위로 올린 입가를 쓱 내렸다.

자신이 언제 웃었냐는 듯.

뒤를 돌아 구석에 숨어 있는 레나를 향해 다가갔다.

“레나, 이렇게 하면 되겠지?”

“네. 이렇게 한 명씩 약점을 잡아 임무를 내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제레미와 있었던 상황은 이미 레나와 예상했었다.

유진이 올지, 티아가 올지, 제레미가 올지.

모든 상황에 맞춘 대사를 짜 놓았다.

샤를로즈는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한 번 보고 들으면 다 외우는 영재였다.

그렇기에 레나가 한 말을 다 주워 먹고 이렇게 사용한 것이다.

자신이 여전히 유일한 악역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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