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분위기가 살벌하다 못해 살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샤를로즈는 이 상황을 즐겼다.
원작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원래 이런 분위기였지.
“이미 많이 죽어 봐서요. 왜요, 제가 티아의 머리채를 잡으니 화가 나세요?”
유진은 샤를로즈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티아를 지켜 주기 위해 티아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샤를로즈의 손목을 거칠게 뗐다.
“망할 것.”
“티아가 먼저 잘못한 거잖아요. 그러니깐 왜 가출 같은 걸 해 가지고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건지.”
“티아는 잘못 따위 한 적 없어. 티아의 가출 사건은 무조건 네 잘못이다.”
그래, 계속 티아를 지켜.
남자 주인공1아.
샤를로즈는 팔짱을 낀 채 유진의 성질을 긁었다.
“유진 오라버니, 티아가 저 때문에 도망가도 이제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뭐?”
“티아를 좋아하는 오라버니들이 티아를 잘 아끼라는 소리예요. 괜히 또 도망가서 귀찮은 일 만들지 말라고 미리 충고해 주는 거예요.”
“이게 진짜.”
유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티아 앞이라 그런지 크게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씩씩대며 화를 혼자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일단 티아, 방에서 쉬고 있어. 샤를로즈와 단판을 볼 테니까.”
유진은 티아의 둥근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 샤를로즈를 무서워할 티아를 다독였다.
하지만 유진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다르게 티아는 샤를로즈에게 겁 하나 먹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걸 모르는 유진은 티아를 계속해서 달래 주었다.
티아는 괜찮은데 말이다.
“유진 오라버니, 그럴 필요 없어요.”
티아는 유진이 진짜로 샤를로즈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꾹 닫았던 두 입술을 떼었다.
샤를로즈는 티아를 믿었다.
이상한 발언은 하지 않겠지, 라고.
하지만 샤를로즈의 판단과는 다르게 티아의 입에서는 나오지 말아야 할 단어들이 나왔다.
“언니는 나를 괴롭혔지만 내가 괜찮아. 그러니깐 언니한테 뭐라 하지 말아 줘.”
“티아, 너까지 왜 그래.”
유진은 제레미와 티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당황했다.
제레미는 샤를로즈가 대악마와 계약을 맺은 후부터 정신을 놔 버렸고, 티아는 샤를로즈 때문에 도망가 놓고 다시 돌아와서는 샤를로즈의 편을 들고 있었다.
설마 샤를로즈가 대악마의 힘을 이용해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가?
유진의 머릿속은 샤를로즈라는 망할 여동생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어떻게든 잘 유지하고 유진의 인내심이 결국 툭 하고 끊어졌다.
“샤를로즈, 너 때문에 집안이 망해가잖아. 알아?”
샤를로즈는 유진이 제게 시비를 걸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런가요. 그렇게 따지려면 어머니를 탓해야죠. 이런 골칫덩어리를 입양한 어머니를 말이죠.”
샤를로즈는 입가를 비틀었다.
악역을 연기하려면, 아니 샤를로즈의 본 자체를 연기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너무 이 상황을 질질 끌어서도 좋지 않아 보이네.
제레미랑 티아의 상태가 영.
샤를로즈는 유진과의 다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려고 했다.
“하아, 샤를로즈. 꺼져.”
샤를로즈는 유진이 먼저 꺼지라고 말해 줘서 좋았다.
차라리 욕 한 번 먹고 이렇게 퇴장하는 게 낫지.
샤를로즈는 레나를 데리고 제 방으로 가려는데, 제레미가 샤를로즈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 악마 새끼는 어딨어? 그나저나 네 옆에 있는 저 애는 누구야. 설마 네 애야?”
제레미, 남자 주인공2가 완전히 돌아 버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샤를로즈는 인상을 쓰며 제레미가 붙잡은 손을 싸늘하게 내리쳤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네 옆에 있는 그 애. 티아랑 너무 닮았는데.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레나의 존재를 알리는 건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눈썰미 좋은 제레미가 그걸 또 파악해 버렸다.
“레나는 내가 주운 하녀예요. 신경 끄세요. 제레미 오라버니.”
샤를로즈가 레나를 데리고 방으로 가려는데 자꾸 제레미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짜증이 솟구치려는 순간이었다.
“제레미 오라버니. 샤를로즈 언니를 놔 줘.”
보다 못한 티아가 샤를로즈의 앞을 막아섰다.
유진은 또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지금 다들 뭐 하는 짓이지?
샤를로즈 망할 것 하나 가지고 싸움이라도 벌일 셈인가?
유진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샤를로즈, 넌 그만 물의를 일으키고 네 방으로 꺼져.”
“그러고 싶은데 제레미 오라버니가 자꾸 붙잡잖아요.”
“제레미, 너도 이제 정신 좀 차려. 샤를로즈를 그렇게 싫어했던 놈이 왜 그래?”
“유진 형은 아무것도 몰라. 샤를로즈의 아픔을 말이야.”
“하아, 돌겠군. 샤를로즈의 아픔을 왜 내가 알아야 하는 거지?”
“샤를로즈는 혼자였어. 늘.”
제레미는 샤를로즈의 편을 대놓고 들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샤를로즈는 다 됐고, 방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다.
그런데 제레미가 자꾸 놔주지 않는다.
샤를로즈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레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그래야지만 이 상황이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제레미의 입술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나도 처음에는 샤를로즈가 좋지는 않았어. 우리가 받아야 할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샤를로즈의 행동이 이상했어. 죽으려고 했어.”
유진은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제레미의 이야기에 반박했다.
“샤를로즈는 죽길 원했고, 죽으면 우리가 계속 살려 줬잖아. 또 뭐가 문제야.”
“그 전부터 샤를로즈는 자살 시도를 계속했어. 유진 형은 몰랐겠지만.”
티아는 제레미의 발언에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제레미는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샤를로즈의 아픔을 모른 척했어. 샤를로즈의 죽음을 말리면 되게 싫어했거든.”
“그래서 제레미, 네가 그렇게 샤를로즈를 감싸는 게 된 거야?”
유진의 물음에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는 감춰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샤를로즈를 지키고 싶어. 그 악마 새끼보다 더 소중히.”
샤를로즈는 이제 자신의 대사를 칠 때가 왔구나 싶었다.
“미안하지만, 제레미 오라버니. 저는 한 번도 오라버니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이 없어서요. 언제부터 저와 친했다고 저에 대한 이야기를 막 하시는 걸까요? 기분이 굉장히 나빠요. 역겨울 만큼.”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남자 주인공2도 나가떨어지겠지.
나 원 참.
분명히 샤를로즈는 유일한 악역으로서 남자 주인공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역할이었는데 왜 한 명씩 감기는데.
그러면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깰 수 없지.
신이 될 수 없다고.
샤를로즈는 제 욕망에 사로잡혔다.
자유와 힘을 원하는 신이 되는 욕망을.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 주인공 티아와 남자 주인공들의 환상의 콜라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환상의 콜라보는 개뿔.
지금 유진을 제외한 다른 주인공들이 유일한 악역 샤를로즈에 감겨 버렸다.
이걸 원했던 게 아닌데.
샤를로즈는 미간을 좁혔다.
“그냥 예전처럼 지내요. 저는 티아를 괴롭히면서 잘 지낼 테니까요. 오라버니들도 저를 모질게 굴면서 지내세요. 제레미 오라버니도.”
샤를로즈는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정말로 위험할 것 같아 레나를 데리고 제 방으로 올라왔다.
다행히도 샤를로즈가 방으로 향할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샤를로즈는 감지덕지했다.
더 이상 서사를 쌓아서는 안 돼.
티아는 어떻게든 할 수 있겠는데, 제레미 오라버니는 무리야.
사실 제레미는 원작 게임 속 가장 제멋대로인 남자 주인공이었다.
제 감정에 아주 충실한 캐릭터였다.
그렇기에 샤를로즈는 제레미와 엮이고 싶은 마음이 절대로 없었다.
귀찮으니 차라리 눈앞에 사라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샤를로즈 님, 진정하세요.”
샤를로즈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아 레나가 샤를로즈의 두 손을 붙잡고 다독였다.
그러자 샤를로즈는 크게 숨을 내뱉고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레이스의 시나리오가 완전히 비틀어졌어요. 비상이에요.”
“나도 알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왜 샤를로즈라는 악역이 주연급으로 빛나는 건데.”
“아마도 그레이스가 변수를 둔 것 같아요.”
“변수?”
샤를로즈는 ‘변수’에 대해 꽤 흥미를 가졌다.
레나는 ‘그레이스의 변수’에 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레이스의 변수는 예전에 우연히 게임 관리자로서 발견했는데요. 그 변수가 바로.”
“바로?”
“샤를로즈 레베크예요.”
“…뭐? 어째서?”
“그레이스가 이 시나리오의 악역에게 변수를 줘 버렸어요. 앞을 알 수 없는 큰 변수를요. 저는 그 당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요.”
“그럼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서 이 변수를 없애면 되잖아.”
“그게 이제 저는 게임 시스템 창이 보이지 않아요. 새로운 주인을 섬기기 때문이에요.”
“주인이라면 나?”
“네.”
“머리 아프네.”
“아마도 제가 관리자가 된 이유도 주인이 없었기에 이 세계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선택된 것 같아요. 그레이스가 저를 꽤 아꼈거든요.”
“그래서 이 변수를 없앨 가능성이 있을까?”
“아, 그레이스는 평범한 이야기를 싫어했어요. 그 점을 돌파해요.”
“평범한 이야기?”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그런 흔한 이야기요.”
“아.”
샤를로즈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가늠했다.
그레이스의 시나리오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고 악이 우세가 되는 쪽의 이야기를 펼치려고 했다.
그편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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