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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81/120)

81화

샤를로즈는 꽤 오랜만에 보는 레베크 공작 가문의 웅장한 저택을 응시했다.

“집이 낯설게 느껴져.”

티아가 저택을 보더니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저택에서 오래 살아왔는데도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웅장하고 컸었나.

티아는 자신의 집이 꽤 넓고 화려하다는 걸 이번에야 처음 깨달았다.

“오라버니들이 기다리겠어, 티아.”

“아, 응.”

샤를로즈는 티아에게 시간이 없다는 듯 급한 말투로 티아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레베크 공작저에 오자 갑자기 얌전해진 레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레나, 오라버니들이 널 이상하게 봐도 그러려니 해.”

“네. 샤를로즈 님.”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샤를로즈의 충고를 귀담아들었다.

이제부터 그레이스의 시나리오가 진정으로 시작되니 레나도 웃음기를 뺐다.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야지만, 샤를로즈가 신이 되어 이 세계의 선과 악을 지켜 줄 수 있었다.

드디어 레나가 천 년 동안 기다렸던 신이 탄생할 것이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레나는 샤를로즈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오라버니들에게 사과는 해야 해. 알겠지, 티아?”

“사과……. 뭐라고 하면 좋을까?”

티아는 막상 오랜만에 제 오라비들 앞에 모습을 비추려니 눈치가 보였다.

말도 없이 몇 달을 가출했다가 언니한테 끌려왔다.

오라버니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티아의 머릿속은 어느새 유진과 제레미에게 어떻게 사과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레베크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티아가 꽤 긴장한 것이 보여 샤를로즈가 한 마디 조언했다.

“티아, 그냥 보고 싶었다고 해. 아, 가출 이유는 나 때문이라고 하고. 내가 너무 괴롭혀서 너는 그 괴롭힘에 못 이겨 도망간 거라고 말해 줘.”

“내가 어떻게 언니를 나쁘게 말해.”

“그럼 어떻게 사과할 생각이었는데?”

샤를로즈가 뻔뻔하게 묻자 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걱정이 앞선 상태였지만.

그래도 샤를로즈, 제 언니를 나쁘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티아, 오라버니들은 이미 내가 널 괴롭혀서 네가 도망간 줄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그러니깐 내 생각해 주는 거면 상관하지 마. 난 괜찮아. 그런 걸로 큰 상처 안 받으니까.”

“언니…….”

‘다 나 때문이야.’

티아는 자신이 엘의 꾐에 넘어가 샤를로즈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에 우울감이 들었다.

갑자기 우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속이 답답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오라버니들에게 내가 말한 것처럼 말해 줘. 부탁이야.”

샤를로즈는 티아를 어떻게든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상냥한 어조로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이 망할 게임에서 퇴장하기 위해서는 티아가 게임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지만 그레이스가 만든 이 망할 게임에서 퇴장할 수 있었다.

샤를로즈는 이번에는 제대로 악역 역할을 하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남자 주인공들에게 샤를로즈는 유일한 악역 그 자체였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여자 주인공 티아였다.

샤를로즈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아마 이 게임 속의 변수가 있다면 그건 티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아만 내 말대로 잘 따른다면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깰 수 있어. 그리고 난 신이 되어서 자유를 만끽하는 거지.’

샤를로즈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개 같은 게임만 깬다면, 원작대로 이야기가 흘러만 간다면 진정한 퇴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로즈는 ‘퇴장’을 위해 티아를 회유했다.

“티아. 넌 내 괴롭힘 때문에 도망간 거야. 알겠지?”

샤를로즈는 다시 한번 티아에게 도망간 이유를 강조했다.

티아는 난감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마도 제가 사랑하는 언니를 욕보이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제가 사랑한 언니가 애써 부탁하지 거절하기도 뭐 했다.

“…언니 말대로 할게. 대신 소원 하나 들어줘.”

티아는 머리를 굴려 샤를로즈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소원권을 받기로 했다.

“소원이야 들어줄게. 뭔데?”

“아침마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티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샤를로즈는 얼굴을 굳혔다.

“그건 좀 그런데. 오라버니들이 오해하면 어떡해.”

그래, 남자 주인공들이 오해하면 큰일 나지.

원작이 시작되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샤를로즈는 이 소원은 들어주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러자 티아는 다른 소원을 입에 담았다.

“그럼 밤마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티아, 그건 좀-.”

“아니면 우리끼리 있을 때 조용히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해 줘. 이것도 안 돼?”

티아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며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것마저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샤를로즈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을 셈이었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영악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원작 여자 주인공이 이런 성격이었나.

그저 흔한 눈치 없는 여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네.’

이렇게 고집이 세고 머리를 잘 굴릴 줄이야.

샤를로즈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야.”

“응. 그것만이라도 좋아. 그러면 나도 언니의 부탁을 들어줄게.”

그렇게 샤를로즈는 티아와의 거래를 통해 티아를 원작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어느새 집무실이 시야에 보였다.

샤를로즈는 평소와 같은 얼굴에 독함을 더했다.

이래야지 남자 주인공들에게 악역처럼 보일 테니까.

똑똑똑.

“유진 오라버니, 나 티아야. 돌아왔어.”

티아는 샤를로즈의 부탁 없이 혼자 알아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쾅!

집무실 문이 황급하게 열렸다.

곧 유진과 제레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티아가 아닌 샤를로즈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짜로 티아를 찾아온 거냐며.

자신들도 못 찾은 티아를 어떻게 찾았냐고.

샤를로즈는 두 오라버니의 달갑지 않은 눈빛들에 본 샤를로즈는 속 안의 엉킨 감정을 지웠다.

‘난 이제부터 샤를로즈다. 게임에서 유일한 악역 샤를로즈.’

이제부터 시작이야.

샤를로즈는 티아의 등을 일부러 밀었다.

“봐봐요. 오라버니들. 제가 티아를 찾아온다고 했죠?”

샤를로즈는 특유의 건조한 음성으로 유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떻게 찾은 건지는 물어보지는 않지. 대신티아가 왜 도망갔는지에 대해서는 알아야겠어.”

역시 그걸 제일 먼저 물어볼 것 같았어.

샤를로즈는 잘 흘러가는 원작에 속으로 흐뭇해했다.

자, 티아.

이제는 네 차례란다.

샤를로즈는 연기에 돌입한 티아를 쳐다보았다.

티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처럼 지어졌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연기가 벌써부터 마음에 들었다.

자, 어서.

네 연기를 보여 주렴.

“샤를로즈 언니의 괴롭힘에 지쳐서 도망갔어.”

티아는 샤를로즈와의 약속대로 입을 맞춘 대사를 내뱉었다.

샤를로즈가 무섭다며 살짝 떨리는 톤으로 말하는 티아를 본 유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샤를로즈, 너는 정말-.”

유진이 티아의 답변에 샤를로즈를 혼내려고 말문을 트는 순간, 제레미가 집무실 안에서 튀어나와 샤를로즈의 양어깨를 붙잡고 유진의 말을 끊어 버렸다.

“샤를로즈! 보고 싶었어.”

…뭐?

샤를로즈는 이 망할 남자 주인공 한 명이 갑자기 왜 저런 쓸데없는 대사를 하나 싶어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레미는 활짝 웃으며 샤를로즈를 반겼다.

제 형과는 다르게 말이다.

“샤를로즈, 집에 어서 와.”

이런 전개를 원하지 않았는데.

샤를로즈는 크게 당황하지 않으며 제레미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제레미 오라버니! 드디어 미치셨어요? 저를 안 좋게 보시던 오라버니가 이렇게 저를 반겨 주니 역겨워요.”

“욕해도 돼. 날 용서하지 않아도 돼. 대신 버리지만 말아 줘. 응? 내가 그 악마 새끼보다 잘할게.”

아니, 왜 갑자기 갱생한 후회 남주 모드가 되었냐고.

샤를로즈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깨부수기 위해 티아를 건드렸다.

티아를 건드리는 것 자체에 예민한 유진과 제레미가 분명히 반응할 것이다.

아주 나쁜 쪽으로.

샤를로즈는 거만한 표정을 하며 티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악!”

티아는 진짜 아픈 듯 눈물을 머금었다.

“오라버니들, 티아를 앞으로 이렇게 대할 생각인데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제 뺨이라도 때릴 건가요?”

샤를로즈는 있는 힘껏 티아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당겼다.

그러자 티아의 몸이 저절로 뒤로 움직였다.

“으윽, 아파. 언니.”

티아는 연기가 아닌 듯 눈물을 찔끔 흘렸다.

유진은 샤를로즈의 만행에 이를 으득 갈며 티아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샤를로즈의 오른쪽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더 할 거면 네 팔을 자르겠어. 샤를로즈.”

그래, 분위기가 다시 살벌해졌어.

이래야지 원작과 같지.

악역에게 집착하는 주인공들은 없어야 해.

샤를로즈는 제 오른쪽 손목을 부러질 정도로 잡는 유진의 악력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악독해져야 했다.

여기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

더 독하게 나가야 해.

그래야 여자 주인공, 티아가 돋보이겠지.

“부러트리세요. 아니면 저번처럼 절 지하 감옥에 또 처넣을 건가요, 유진 오라버니?”

샤를로즈의 도발에 유진은 너무 쉽게 그 도발에 넘어갔다.

“죽고 싶은 건가, 샤를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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