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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120)

79화

레나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안은 얼굴을 굳히며 천 년 전, 저와 함께 동굴에 살았던 그레이스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 추억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기로 했다.

그편이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인간이 되는 일도 그만두려고 한다.

“샤를로즈, 이제 더는 당신의 피를 마시지 않을래요.”

“나와 레나의 말을 듣고 인간이 되는 길은 포기 한 거예요?”

샤를로즈가 시큰둥하게 묻자, 이안은 그녀를 빤히 보다가 늦게 대답했다.

“그냥, 그레이스가 만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려고요.”

이안은 샤를로즈가 그레이스의 환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샤를로즈에게 큰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그야 이안은 그레이스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가 아니라면 그녀의 환생이라고 해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 이안이 낸 결론이었다.

“그럼 악마 사냥꾼도 그만두려고요? 유진 오라버니가 아마 미쳐 날뛸걸요.”

“그 인간이 미치든 말든 제 알 바가 아니거든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제 더 이상 악마 사냥꾼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샤를로즈의 옆에 있기를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아버지도 봤고, 그레이스의 환생이라는 인간도 봤고.

볼 건 다 봤네.

이안은 루아의 어깨를 검지로 툭 건드렸다.

루아는 이안의 속내를 이미 꿰뚫고 있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돌려 이안을 응시했다.

“아버지. 이제 떠나려고요.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요.”

“인간이 되는 건 포기한 건가?”

“네, 포기하려고요. 그레이스가 남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갈 생각이에요.”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넌 내 말도 잘 듣지도 않으니.”

“아버지, 샤를로즈를 잘 지켜주세요.”

이안은 제 아비인 루아 말고 샤를로즈에 시선을 고정한 뒤, 루아에게 부탁했다.

“당연한 말을 하네.”

루아는 샤를로즈를 지키는 건 제 의무라는 듯 대답했다.

“그럼 전 여기서 당신들과 헤어질게요. 그레이스가 남긴 이 세상을 구경하려면 아직 먼 것 같으니까요.”

이안은 이 좁은 방에서 대충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했다.

샤를로즈의 부름이 아니었다면.

“이안, 정말로 인간이 되지 않아도 돼요? 그레이스와 약속했다면서요.”

“그레이스의 환생인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꽤 많이 마음이 흔들리네요. 됐어요, 샤를로즈. 저는 인간이 되지 않을래요.”

“그래요? 참 안타깝네요. 만약에 또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저를 찾아오세요. 악마에서 인간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요.”

“좋아요. 그럼 저는 떠날게요.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봐요. 다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 이상 남아 있는 악마의 힘으로 순간 이동을 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휘이이익!

엄청난 바람이 잠깐 방 안에서 불었다.

여기저기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샤를로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라진 이안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악마의 힘이라는 거 되게 편해 보이네.

레나에게 신의 힘이 따로 있냐고 물어봐야겠어.

“와, 악마의 힘은 되게 편리하네요.”

샤를로즈와 같은 생각을 한 레나가 이안이 사라지는 걸 보며 감탄했다.

“흑주술사도 저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불편해요. 순간 이동은커녕, 무조건 제 발로 움직여야 하니까요.”

“…레나, 뭐 신의 힘 같은 건 없는 거야?”

“있어요. 신이 되시면 하늘에서 신의 힘을 받을 수 있어요. 신의 힘은 악마의 힘보다 더 강력하고 편리하답니다.”

“편리해?”

“모든 생명체를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또 인생을 즐길 수도 있고. 그레이스의 옆에서 많은 걸 봤거든요.”

“그레이스는 어떤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어?”

“몰라요.”

“왜 몰라? 옆에서 계속 지켰다며.”

“저희를 따돌리고 도망갔거든요.”

레나는 그레이스와 천 년 전에 인연을 끊었다.

아니, 그레이스가 일방적으로 인연을 끊은 것이 문제였다.

레나를 비롯한 다른 흑주술사들은 신에게 버림받았다며 상실했고, 그레이스를 찾지 않았다.

흑주술사의 총관리자인 레나가 도망가 버린 그레이스를 찾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레이스는 인간 속에 섞여 살다가 죽었다.

레나는 그레이스가 도망간 후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레이스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바로 어느 한 여인의 손만 거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이건 신의 힘 중에 하나인 재물이었다.

신의 힘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생명, 재물, 권력, 욕망 등.

죽기 일보 직전인 자를 생명의 힘으로 살린다든지,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준다든지.

그런데 그 힘은 너무 과도해서 인간들에게 사용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다.

욕심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신의 힘을 써 버리면 인간들은 신의 힘을 원하고 또 갈증하게 된다.

이를 막으려고 신의 보좌관인 흑주술사들이 있는 것이었다.

이미 보좌관들을 버리고 인간들의 세상으로 떠나 신의 힘을 써 버린 그레이스를 레나는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데려와 봤자 또 도망갈 것이 뻔했다.

그레이스라는 신은 인간을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되고 싶은 신은 인간들 틈에 섞여 잘 살다가 괴물 취급을 받게 된다.

이것도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죽은 이유도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에 인간이 될 수 있는 성수에 손을 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어 죽었다는 걸 다른 흑주술사에게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레이스가 성수에 손을 댄 것을 알게 된 건 그 흑주술사가 성수를 관리하고 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망간 그레이스의 행적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흑주술사는 신의 보좌관일 뿐, 신이 아니기에 성수를 가지고 도망간 그레이스를 쫓아가지는 못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레나는 그 일에 참 아쉬움이 많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 신의 후계자는 조금 많이 달라 보였다.

아무것도 관심 없는 듯한 금색 눈동자와 모든 게 귀찮은 듯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보통 신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저렇게 나오기 쉽지 않았다.

레나는 지금까지 99명의 다른 영혼을 샤를로즈 몸에 넣어 두고 관찰했다.

그들에게 당신은 이 세상의 신의 후계자입니다.

라는 말을 할 때마다 대부분 반응이 컸다.

정말이에요?

제가…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된다면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요.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 100번째 샤를로즈는 자유를 원했다.

그냥 그레이스가 만든 인물들에 대한 자유를.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100번째 샤를로즈는.

레나는 지금의 샤를로즈가 신기하고 그녀의 옆에서 평생 보좌할 생각에 신이 났다.

이런 정신 나간 신도 나쁘지 않을지도.

레나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샤를로즈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찰랑이는 백금발 머리카락이 레나의 뺨에 붙었다.

샤를로즈는 레나의 뺨에 붙은, 빛에 반사되어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말문을 텄다.

“레나, 나는 네게서 도망같은 거 안 가. 그러니깐 걱정하지 마.”

샤를로즈는 희미하게 웃었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말에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뭔가 예쁨 받고 있는 기분이 드네.

처음이야.

이렇게 말랑한 기분은.

레나는 차가운 그레이스에게 애정을 갈구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정이라는 것을 몰랐다.

제 언니가 제게 주는 애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레나는 처음으로 샤를로즈의 애정을 알게 되었다.

지금.

레나가 평소와 같은 바보 같은 웃음으로 샤를로즈를 안으려고 할 때, 루아가 샤를로즈의 뒤에서 껴안았다.

“레나. 당신은 너무 위험해요.”

“저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에요. 샤를로즈 님의 하나밖에 없는 보좌관인걸요? 루아.”

“제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입을 찢어 버리고 싶으니까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악마 씨?”

“그냥 평생 저를 부를 생각 하지 마세요.”

“왜요? 샤를로즈 님은 루아를 평생 곁에 두고 싶어 하세요. 그럼 저와도 많이 마주칠 텐데 서로 친하지는 않아도 이름 정도는 부를 사이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레나의 당돌한 발언에 루아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레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샤를로즈는 둘이 또 왜 싸우냐며 중재에 나섰다.

“루아. 그냥 레나에게 한 번 져 줘요. 쟤, 고집이 황소고집이거든요.”

“샤를로즈…….”

“저는 루아를 평생 데리고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대악마가 왜 이렇게 질투가 많아요?”

“…그야 불안하니까요. 제게만 기댔던 샤를로즈가 다른 이들을 만나고 성장하는 일이.”

루아는 그동안에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샤를로즈에게 하나씩 터트리기 시작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샤를로즈.”

루아의 담백하지만 집착이 서려 있는 고백에 샤를로즈는 눈꺼풀을 팔랑이며 내렸다.

“더 집착해 주세요, 루아.”

샤를로즈는 이미 루아를 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더 집착해 줬으면 했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것이었으니까.

샤를로즈는 루아에게 티 내지는 않지만 엄청난 관심과 집착을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만 모르는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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