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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120)

78화

레베크 공작저는 샤를로즈가 없으니 한산했다.

사용인들도 제 일만 열심히 할 뿐, 잡담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로즈가 티아를 데리고 온다고 하고 오지 않기를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편지 한 통도 보내지 않아 레베크 공작인 유진이 화가 잔뜩 났기 때문이었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유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화를 삭혔다.

“유진 형, 샤를로즈 어디로 튄 거 아니지?”

“그럴 리가. 내가 보관하고 있는 어머니의 다른 유언장이 불타지 않는 걸 보아 괜찮은 것 같은데.”

사실 유진은 샤를로즈에게 숨기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어머니의 또 다른 유언장.

이건 전 선대 공작 부인이 죽기 전, 유진에게 준 또 다른 유언장이었다.

샤를로즈가 가지고 있던 유언장은 샤를로즈를 위한 유언장이었고, 유진이 가지고 있는 유언장은 유진, 제레미, 티아를 위한 유언장이었다.

완전히 다른 유언장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둘로 나눈 유언장은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된 구조였다.

한쪽의 유언장이 사라진다면 다른 유언장도 불타 없어진다.

이게 바로 레베크 공작저의 유언장의 비밀이었다.

레베크 공작 가문은 초대 가문의 유언장을 내리받아 이어진 힘으로 가문이 부흥한 케이스라서 유언장은 가문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 유언장이 대상이 공작이든 공작 부인이든 그건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레베크 공작저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 힘이 유언장을 통해 전해 내려지니까.

유진은 어머니의 또 다른 유언장을 품에서 꺼내 팔랑였다.

샤를로즈가 가지고 있는 유언장과 다르게 그 유언장은 심심한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와 미래의 이야기.

자신이 없어도 잘 있으라는 대책 없는 말까지.

유진은 소파에 반쯤 누워 악마에 관한 책을 보고 있는 제레미에게 말을 건넸다.

“제레미, 넌 샤를로즈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제레미는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더니 어설프게 웃었다.

“샤를로즈를 가둬 둘까 생각 중이야.”

“어째서?”

유진은 샤를로즈가 미친 후, 제레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 곧바로 제레미에게 황실 기사단에는 휴가를 쓰라 하고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 명령을 내린 지도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제레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샤를로즈가 사람 여럿 망쳐 놓는군.

유진은 제레미의 정신 나간 행동과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자 제레미가 키득거리며 말이 이었다.

“어째서라니, 샤를로즈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제레미. 넌 샤를로즈를 무척이나 혐오했잖아.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그냥 어머니의 것을 지키고 싶어졌어.”

“샤를로즈가 네게 저주라도 걸었나?”

“샤를로즈가 그럴 힘이 어딨어. 난 그저 샤를로즈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깐 왜?

유진은 제 남동생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제 정신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음에 제레미와의 대화를 억지로 끝맺었다.

‘샤를로즈가 얼른 티아를 데리고 돌아와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군.’

유진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

이런 레베크 공작저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샤를로즈는 지금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샤를로즈 언니는 원래 내 것이었어! 내가 먼저 언니를 좋아했다고!”

바로 티아의 난데없는 고백 때문이었는데.

레나는 티아의 고백에 난감함을 표했다.

“어머, 그런 발언은 샤를로즈 님에게 통하지 않을 텐데요…….”

“티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샤를로즈를 진짜로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티아.”

물론 해리슨과 요한 역시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티아의 감정이 격하게 오른 덕분에 발생한 일이었다.

모든 게 다 귀찮은 샤를로즈는 자신 때문에 어수선한 자리를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이안. 저 따라와요, 그레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게요.”

그리곤 조금 전 이안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그를 불렀다.

루아 역시 이안이 그레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된다고 해서 샤를로즈를 따라가려는데, 티아가 갑자기 루아의 손목을 확 잡았다.

“언니랑 어디 가요, 루아.”

한참 레나와 말다툼을 하던 티아가 샤를로즈와 이안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조용히 그 둘을 뒤따라가던 루아의 앞을 막아 버렸다.

“그레이스 관련해서 이야기를 들으러 가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언니가 말한 거 다 외워야 해요.”

“그러죠.”

티아는 루아의 대답에 그의 두꺼운 팔목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루아는 티아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티아는 이제야 제 언니, 샤를로즈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우울감이 몰려왔다.

샤를로즈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면 티아는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티아~? 왜 그러세요?”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레나가 싱글벙글하게 웃으며 갑자기 조용해진 티아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레나는 티아의 반응이 재밌어서 비아냥거리며 놀리는 짓을 멈출 수 없었다.

만약 샤를로즈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면 냉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샤를로즈는 무심하고 매사 귀찮아하는 성격이라는 걸 이미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레이스의 환생이니 함부로 놓쳐서는 안 돼.’

샤를로즈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레나는 샤를로즈의 그 ‘죽음’을 막아 놓고 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죽음의 시스템을 풀다가 진짜 또 죽기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 죽지 않으려나.

레나는 샤를로즈가 신이 된다고 제게 말했으니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게임 관리자인 레나는 샤를로즈에 대한 정보가 담긴 게임 시스템 창을 허공에 열었다.

물론, 이 시스템 창은 레나 외에는 볼 수 없었다.

게임 관리자의 특권이었다.

레나는 샤를로즈에게 묶여 있는 죽음을 풀어 주었다.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어차피 이제 이 관리자의 일도 샤를로즈가 신이 된다면 사라질 것이다.

게임의 관리자는 사라진 신의 보좌관에 불과했으니까.

신이 다시 등장하면 게임의 시스템도 다 사라지고 세상은 신에 맡겨지게 된다.

레나는 그레이스가 죽고 천 년 동안 게임 시스템을 혼자 관리했었다.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허전하면서도 통쾌했다.

외로운 생활은 끝이었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정보 시스템을 빤히 보다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시스템 창을 껐다.

일을 다 끝낸 레나는 티아에게 혀를 날름 내밀고선 샤를로즈의 뒤를 따라 층계를 밟고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레이스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샤를로즈와 자신은 이미 모든 비밀을 공유한 사이였다.

옆에 있다고 샤를로즈가 쫓아내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향기가 배어 있는 방으로 노크도 없이 들어갔다.

쾅!

방문이 열리자 샤를로즈가 말을 하다가 멈추는 것이 보였다.

“저 왔어요, 샤를로즈 님.”

“노크는 하고 들어와.”

“서프라이즈. 재밌잖아요.”

“전혀 재미 없어. 레나.”

“정말요? 전 재밌는데.”

레나는 방문을 조용히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 악마들은 그레이스에 관해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었으려나.”

레나는 방문을 잠근 후, 두 팔을 뒤로 맞잡으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안은 흑주술사 레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문을 열었다.

“그레이스가 괴물이 아니라 신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그 정도면 다 들었네요.”

“당신은 제가 그레이스를 만나기 전에 그녀의 옆에 있었죠?”

“네. 저는 신을 보좌하는 종족으로서 당연히 곁에 있었죠.”

레나의 말에 루아는 흑주술사가 언제부터 신의 보좌관이 되었는지 이질감을 느꼈다.

흑주술사는 악마를 따라 하는 미련한 종족이었다.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신의 보좌관이라니.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

루아는 팔짱을 낀 채 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레이스는 행복했어요?”

“아뇨. 늘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을 주시했어요. 그레이스는 죽고 싶어 했거든요. 샤를로즈 님처럼.”

“……그레이스의 과거를 잘 알고 있나요?”

“아뇨. 몰라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아는 그레이스는 그저 세상의 선과 악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 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그레이스의 과거를 캘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꼭 당신도 그레이스의 과거를 캐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그레이스가 죽고 난 후, 한 번 그녀의 과거를 캐 본 적이 있었는데.”

레나는 마지막 말을 다 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안은 레나의 마지막 말이 궁금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가 살아생전에 했던 모든 일이 사라졌어요. 마치 그녀의 존재가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레나의 마지막 말에 이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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