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일단 다들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동안 레나는 쉴 틈 없이 잡담을 늘어트렸다.
티아는 레나가 시끄러운지 조용히 좀 하라고 했지만, 레나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주군은 오로지 샤를로즈이기 때문이었다.
‘얼른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야 할 텐데요.’
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도하게 걸어가는 샤를로즈를 힐끗 훔쳐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생각보다 그레이스가 만든 여자 주인공이 너무 언니 바보였다.
이렇게 심한 시스콤은 본 적이 없었다.
‘엘 언니도 장난 아니었지만, 티아 만큼은 아니었는데. 강적이야.’
과연 티아가 남자 주인공들과 엮이게 되면서 샤를로즈를 놔줄 수 있을지 참 의문이 갔다.
지금 봐서는 샤를로즈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레나는 이걸 어쩌지 하는 마음에 샤를로즈를 툭 건드렸다.
“샤를로즈 님은 퇴장이 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퇴장을 도와주려고요. 샤를로즈 님의 충실한 부하로서.”
샤를로즈는 레나가 또 헛소리를 하는 구나 싶어 레나의 말을 씹었다.
샤를로즈의 냉대에도 실망하지 않은 레나는 계속 조잘대었다.
“있잖아요, 다들 샤를로즈 님의 퇴장을 도와주지 않을래요?”
레나의 파격적인 제안에 샤를로즈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조용히 터트렸다.
“언니의 퇴장을 어떻게 해야 도와줄 수 있는데…?”
레나의 미끼에 문 건 다름 아닌 티아였다.
티아는 샤를로즈의 퇴장을 도와주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여자 주인공이었다.
사실, 어떻게 해야 샤를로즈 언니를 퇴장시킬 수 있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 티아는 은근슬쩍 레나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 했다.
레나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티아가 샤를로즈 님의 꼭두각시가 되는 거예요. 참 쉽죠?”
“언니의 꼭두각시가 되라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며 티아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샤를로즈 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샤를로즈 님은 퇴장할 수 있어요. 대박이죠?”
“…내가 꼭두각시가 되는 거랑 샤를로즈 언니가 퇴장하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상관이 있죠. 이 세상은 티아, 당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알아듣기 쉽게 말해 봐. 어려워.”
레나는 여기서 너무 힌트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대충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티아는 성녀잖아요. 성녀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권력과 명예가 생기니까요. 그러니깐 샤를로즈 님의 말대로 움직이면 이 세상은 샤를로즈 님이 퇴장하기 편하게 움직이겠지요.”
“즉, 내 권력으로 샤를로즈 언니에게 자유를 주자 이 말이야?”
“네. 맞아요. 얼마나 편하겠어요, 안 그래요, 샤를로즈 님?”
레나는 활짝 웃으며 샤를로즈를 응시했다.
샤를로즈는 레나가 최선을 다해 원작 게임 스토리대로, 아니 그레이스가 만든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려고 티아를 열심히 꼬드기는 모습과 자신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레나의 모습을 차갑게 무시했다.
반응해 주면 귀찮아져.
레나는 샤를로즈의 마음속을 읽은 모양인지 서운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름 노력하는데, 칭찬이라도 해 줘요!
레나가 속으로 외쳤지만, 샤를로즈에게 이 진심 어린 속마음이 전해 질 리 없었다.
샤를로즈는 무뚝뚝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없는 성격이었으니까.
레나는 샤를로즈가 조금 더 온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티아를 꼬드겼다.
“그러니깐, 티아. 샤를로즈 님의 자유를 위해 샤를로즈 님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 주세요. 그편이 샤를로즈 님에게 좋을 테니까요.”
“언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는 있어. 그런데 왜 그 말을 네 입에서 들어야 하는데?”
“저는 샤를로즈 님의 충실한 부하니까요. 샤를로즈 님이 원하는 걸 당연하게 알고 있으니까요. 저희는 나름대로 이어져 있거든요. 그렇죠, 샤를로즈 님?”
레나가 능글스럽게 묻자 샤를로즈는 무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티아는 레나와 샤를로즈의 다정한 분위기에 뭔가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왔다.
‘샤를로즈 언니를 알게 되고 같이 산 건 내가 더 오래됐는데 왜 레나와 사이가 이렇게 좋은 거야, 언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티아의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흔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남자 조연에게 질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퇴장밖에 관심이 없던 샤를로즈는 티아가 질투가 났는지도 모른 채 그냥 넘어갔다.
***
숙소로 도착한 샤를로즈와 다른 일행들은 숙소 안 거실에 커다란 마법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샤를로즈는 저 마법진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저번에 본 듯한 이 기분은 뭘까.
샤를로즈는 그 마법진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다가 요한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스치자 저 마법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동 마법진.”
“마법사도 아닌데 잘도 알고 있네. 샤를로즈.”
“저번에 봤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웬 이동 마법진을 거실에다가 그려놨어요?”
“이제 집에 가야지.”
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샤를로즈는 그의 대답에 침음을 흘렸다.
벌써 집에 돌아갈 때가 된 건가.
하긴 도망간 티아를 찾기도 했고, 오라버니들도 티아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네.
샤를로즈는 이 병자들의 섬에 있으면서 오라버니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정이 없다고 해야 하나,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이미 여자 주인공, 티아를 찾았으니 원작은 알아서 잘 흘러갈 테고 이제 퇴장만이 남았다는 설렘에 샤를로즈는 해리슨과 요한 이외의 남자 주인공들은 잊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잘 만나지도 않을 텐데. 상관없겠지.’
샤를로즈는 레베크 공작저로 돌아가면 이제 오라버니들이 자신이 아닌 티아를 찾으며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 모습을 떠올리니 입가에 미소가 잠시 지어졌다.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고. 돈도 막 써도 되고. 생각보다 샤를로즈의 인생도 괜찮네.’
빈둥빈둥 놀면서 원작 게임 스토리 구경이나 하다가 그레이스가 짜 놓은 이 시나리오가 끝나면 신이 되어 세상을 샤를로즈 마음대로 꾸밀 수 있었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지하실 감옥에도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남자 주인공들과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
그 생각만으로 샤를로즈의 머릿속은 꽃밭으로 변했다.
행복은 가까이 있었느니라.
“샤를로즈 님?”
레나는 샤를로즈의 미소가 옅게 진 얼굴을 신기하게 보더니 샤를로즈를 조용히 불렀다.
샤를로즈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왜 불러.”
“그냥 샤를로즈 님이 웃고 있는 게 신기해서요.”
“내가 웃고 있어?”
“네. 아주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데요.”
“그래?”
샤를로즈는 제 입가를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레나는 샤를로즈가 귀여운지 샤를로즈의 옆에 딱 달라붙어 조용히 속삭였다.
“샤를로즈 님, 귀여워요. 평소에도 잘 웃어 주세요. 힘 좀 내게.”
“싫은데.”
“아, 제발요.”
레나는 눈을 반짝이며 샤를로즈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애교는 샤를로즈에게 통하지 않았다.
통했으면 벌써 통했겠지.
레나는 빠르게 포기하며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남자 두 명이 자신을 보고 넋을 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설마 저 남자들이 그레이스의 시나리오에서의 남자 주인공들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얼굴을 보고 넋을 놓을 리 없었다.
여자 주인공인 티아와 얼굴이 똑같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레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해리슨과 요한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나라고 해요. 샤를로즈 님의 충실한 부하랍니다.”
“…샤를로즈의 부하?”
“부하?”
해리슨과 요한은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샤를로즈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설마 티아의 대용품을 만든 것이냐며.
불순한 눈빛으로.
샤를로즈는 해리슨과 요한의 시선을 받고선 잠시 웃고 있던 얼굴을 싸하게 굳혔다.
“티아의 대용품 같은 거 아니에요. 얘는 흑주술사 엘의 여동생이고, 어쩌다 보니 제 부하가 됐어요. 이 정도 설명이면 됐죠?”
샤를로즈는 해리슨과 요한이 정말이지 귀찮은지 대충 설명하고 이 상황을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해리슨과 요한은 티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금방 쉽게 넘어가는 자들이 아니었다.
괜히 집착 남자 주인공이라는 키워드가 붙었을까.
“티아와 똑같이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티아는 한 명이면 충분해. 가짜는 필요 없어.”
해리슨과 요한은 레나를 아니꼽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레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가짜라뇨, 너무 하시네요. 저는 그저 티아와 쌍둥이처럼 닮은 것뿐인데. 아, 도플갱어라고 아세요? 세상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해요.”
“알 필요 없다. 티아와 닮은 건 필요 없어. 오로지 진짜인 티아가 필요하지. 설마, 샤를로즈 이 계집도 데려갈 생각인가?”
해리슨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레나를 티아의 대용품, 그러니깐 가짜로 생각하며 손가락질하며 불쾌감을 조성했다.
샤를로즈는 해리슨에게 성큼 다가가더니 레나를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레나는 물건이 아니에요. 살아 있는 생명이에요. 물건 취급은 그만 하세요.”
사실 레나는 저들의 뾰족한 말에 상처 하나 받지는 않았지만, 샤를로즈가 저를 감싸니 감동을 받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샤를로즈 님…….”
감동을 받은 레나와 달리 남을 감싸고 도는 샤를로즈가 익숙하지 않은 티아는 꽤 충격을 받았다.
“언니…….”
티아는 샤를로즈를 부르려다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자신과 닮은, 정체 모를 여자애에게 졌다는 사실에 잠시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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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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