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는 언니랑 평생 같이 있을 거라고.”
“망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세요. 티아.”
“난 망상에 빠지지 않았어!”
티아의 황소 같은 고집에 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샤를로즈 님이 과연 당신을 원하고 있을까요? 한 번 물어보세요. 샤를로즈 님에게 직접.”
레나는 티아의 등을 떠밀었다.
“언니랑 약속까지 했어. 언니 곁에 있어도 된다고 했다고.”
“그러니깐 한 번 샤를로즈 님에게 물어보세요.”
“대신, 내 말이 맞다면 샤를로즈 언니 주변에서 사라져.”
“그건 안 돼요. 샤를로즈 님과 저도 약속한 게 있어서요.”
“……무슨 약속인데?”
“샤를로즈 님의 충신이 되는 약속이요.”
“언니가 너랑 그딴 약속을 할 이유가 없잖아. 설마, 언니의 약점을 잡고 있는 거야?”
“약점이라니, 저는 샤를로즈 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보고 있답니다. 티아.”
“언니가 너 같은 걸 부하로 둘 리 없어. 나랑 얼굴이 같아서 홀린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저와 샤를로즈 님은 충분한 상의 끝에 주종 관계가 되었어요. 저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 주세요. 마음이 아프네요.”
레나는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억지로 짜내며 소매로 찍어 냈다.
“흑주술사들은 간사한 종족이잖아.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언니한테 당장-.”
“티아. 너도 이제 그만 해.”
그 순간, 샤를로즈가 루아의 손을 잡고 티아 앞을 막아섰다.
“언니 정말로 저 흑주술사를 부하로 둔 거야? 아까 신전에서 그렇게 살벌했잖아. 언니를 죽이려고 했잖아.”
“오해였어. 그리고 레나는 엘과 다르더라고.”
“뭐가 달라? 똑같은 비열한 흑주술사인데?”
티아는 샤를로즈의 말에 계속 반박했다.
그만큼 레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레나는 달라. 티아,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그건 아닌데. 수상하잖아. 갑자기 언니한테 호의적으로 대하니까.”
“합의를 봤거든.”
“합의? 무슨 합의?”
티아는 샤를로즈와 레나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모양이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샤를로즈의 대답을 원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게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당연히 궁금하지! 내 언니니까.”
“누가 들으면 꼭 내가 네 것인 줄 알겠다. 티아.”
샤를로즈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고, 티아는 샤를로즈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난 언니의 것이니까.”
“넌 내 거인 적이 없는데, 티아?”
“어떻게 티아, 샤를로즈 님에게 차였네요. 슬퍼라.”
레나는 울상을 지으며 티아를 놀려 댔고, 티아는 애써 샤를로즈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언니의 옆에 있는 거면 난 언니 거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결론이 나는 거야.”
“몰라.”
티아는 험악한 분위기에 고개를 홱 돌렸다.
샤를로즈는 삐진 티아를 아기처럼 우쭈쭈 달래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줬으면 했다.
‘내가 신이 되어서 세상을 관리하며 자유를 찾는 게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네.’
샤를로즈의 금안이 또렷하게 빛나며 제 암울했던 미래에 먹구름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퇴장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
‘그레이스가 만든 시나리오를 깨서 주인공들을 마음대로 움직여 나를 못 찾게 하는 것도 꽤 괜찮은 퇴장일지도 몰라.’
샤를로즈는 슬쩍 레나를 보더니 눈짓했다.
이 정도 했으니 티아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레나는 샤를로즈의 눈짓의 의미를 대충 알아먹고선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깐 티아, 저는 샤를로즈 님의 부하가 되었어요. 제발 저를 인정해 주세요.”
레나는 티아에게 애원하듯 말했지만, 티아는 어림도 없다며 무시했다.
“싫어. 언니가 널 인정했다 하더라도 난 널 인정할 생각이 없어. 엘이랑 같은 동족이니까.”
“엘 언니와는 전혀 다른 착하디 착한 흑주술사예요. 저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루아, 당신도 말 좀 해 봐요. 흑주술사는 나쁜 거라고. 얼른 샤를로즈 언니를 설득해 주세요. 네?”
“그냥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티아.”
“…어째서요?”
“샤를로즈가 원하니까요. 저 흑주술사를. 당신은 샤를로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셈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인정하세요. 저도 저 흑주술사가 짜증 나긴 하지만 샤를로즈가 이렇게 부탁하니 들어주려고요.”
“그래도-.”
티아는 샤를로즈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이가 한 명 더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울적했다.
힐끗 샤를로즈를 본 티아는 제 언니의 무덤덤한 얼굴에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언니의 고집을 꺾은 적이 없었지.’
티아는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샤를로즈를 위해 레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레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지만, 샤를로즈 언니가 원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요. 샤를로즈 언니의 말대로 저 흑주술사를 인정할게요. 언니의 부하로.”
“마음을 비우면 조금 나아질 거예요.”
루아는 이미 모든 것을 해탈했다는 듯 티아에게 충고했다.
티아는 루아의 충고를 알아서 잘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낀 레나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그럼 저를 샤를로즈 님의 부하로 인정하신 거예요? 와, 기뻐요.”
레나는 해맑게 웃으며 박수갈채를 했다.
샤를로즈는 레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턱 끝을 살짝 움직였다.
이제 이 상황을 마무리하라는 의미였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명령에 지금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했다.
“다시금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레나라고 해요. 저번에 언니가 샤를로즈 님에게 실례해서 죄송했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레나의 마무리에 분위기는 이렇게 그녀를 데리고 가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간과하지 못한 인물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레나와 샤를로즈의 후반 대화를 엿들은, 커다란 나무 뒤에 숨은 이안이었다.
터벅, 터벅.
커다란 나무 뒤에서 이안이 천천히 걸어와 샤를로즈에게 서슬 퍼런 눈빛을 던졌다.
“샤를로즈, 당신이 정말 그레이스의 환생인가요?”
이안의 깜짝 등장에 샤를로즈의 금안이 크게 떠졌다.
쟤는 언제 저기에 숨어 있었대.
샤를로즈는 몸을 돌려 이안을 쳐다보았다.
루아와 닮은 연한 회색빛 눈동자가 자신을 담아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샤를로즈는 그레이스가 이안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 의문감을 표현했다.
“이안이 그레이스를 어떻게 알아요?”
“그냥 제 말에 대답만 해 주세요, 샤를로즈. 정말 당신이 그레이스의 환생인가요?”
“…뭐, 어차피 다 밝혀질 이야기일 테니 대답해 드릴게요. 맞아요, 제가 그레이스 환생이에요. 레나와 저와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군요.”
“우연히 들었어요.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레이스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정신을 놓아 버려서요.”
“이안, 우리 그 이야기는 숙소에 가서 따로 하면 안 될까요?”
이안은 샤를로즈의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좋아요. 숙소 가서 그 이야기는 따로 하죠.”
샤를로즈와 이안의 대화는 물론, 샤를로즈와 레나가 나눈 대화까지 문득 궁금해진 티아가 푸른색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어떻게 하면 자신도 그 대화에 낄 수 있는지에 대한 꼼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티아는 샤를로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기에 레나와 했던 이야기와 이안이 꺼낸 ‘그레이스’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언니가 내게 그레이스에 관한 이야기와 레나와 나눈 대화를 내게 풀어낼까.’
티아는 샤를로즈에게 잔꾀를 부려 제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들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샤를로즈가 이안에게 시선을 두고 있을 때, 티아가 자신의 협력자인 루아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루아.”
티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루아의 등을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루아는 티아의 부름에 고개를 슬쩍 돌려 내렸다.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티아는 루아를 향해 입 모양으로 그리 말했고, 티아의 입 모양을 완벽하게 알아들은 루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루아는 샤를로즈와 이안에 사이에 끼었다.
“그레이스라면, 네 첫사랑인 인간 아니야?”
루아가 능청스럽게 이안에게 묻자, 이안은 그 인간이 맞다고 답했다.
“그레이스의 환생이 샤를로즈라. 흥미로운 이야기네. 나도 같이 들으면 안 되나?”
“아버지는 제 상황을 아시니 들으셔도 상관없으세요.”
티아는 괜스레 루아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만약에 티아가 샤를로즈에게 알려 달라고 징징댔다면 더욱 미움받을 것이 분명했기에 협력자 루아가 오늘따라 근사하게 보였다.
‘든든한 내 협력자.’
그런데 막상 루아와 자신의 조합이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지키며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성녀와 사람들의 악의 기운을 빼앗아 먹어 죽이는 대악마의 조합이라.
완벽하게 섞이지 않는 조합이지만, 지금 완벽하게 섞이는 것에 신기함이 들 뿐이었다.
얼굴을 굳혔던 티아는 루아의 활약에 얼굴을 핀 다음 배시시 웃었다.
티아는 어렸을 적부터 제 감정을 제대로 숨긴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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