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게임의 관리자.
게임을 만든 시초인 그레이스.
‘나는 그레이스의 환생.’
게임을 만든 이유는 샤를로즈의 대역을 찾기 위해서.
그 대역에 가장 적합한 건 바로.
‘나라는 소리지.’
샤를로즈는 레나와 길게 대화했던 내용들을 정리했다.
‘그럼 내가 흑막이 되는 건가?’
세상을 만든 신의 후계자가 그레이스고. 그레이스의 환생이 샤를로즈이니까.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소리잖아.
샤를로즈의 금안이 슬쩍 레나를 비추었다.
‘그런데 진짜 저 말을 믿어야 하나?’
악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흑주술사인데다 자신을 어떻게든 꼬셔 보려고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었으니까.
거짓말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디테일이 있어.
“네가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겠지?”
“물론이죠. 저는 이런 거에 거짓말할 정도로 약은 인간이 아니에요. 샤를로즈. 그렇죠, 아힌?”
“뭐, 레나가 나쁜 애는 아니지.”
아힌은 레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말이 진짜라면, 나는 지옥으로 가서 죽은 흑주술사들을 살려야 하는 거야?”
“네. 살려 주시면 감사하죠.”
“살려 주지 않는다면.”
“세상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엘이 말한 건 다 거짓말이야?”
“네. 거짓말이에요. 사실 저희 자매는 한 명이 죽으면 다른 한 명이 되살아나는 구조거든요. 음, 말하자면 한 몸이에요.”
“한 몸? 그럼 네가 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건 아니지만, 엘 언니와 저는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내 정보를 잘 알았구나.”
“뭐, 그런 셈이죠. 이제 궁금증은 다 풀리셨나요?”
“대충은.”
“지옥에 가려면 당신의 피가 조금 필요해요.”
“…잠깐만.”
“네. 마음의 준비를 하시려면 하세요. 기다릴게요.”
“지옥에 가면 바로 돌아올 수 있는 거야?”
“아뇨. 한 달간의 시간이 소요돼요.”
“그럼 루아에게 뭐라 말하면 좋을까. 지옥에 간다면 나를 붙잡을 것이 뻔해.”
“그냥 말 안 하고 가는 건 어떠세요?”
“날 찾다가 미쳐 버리면 어떡해.”
“당신이 죽지 않는 한 계약은 깨지지 않아요. 그러니깐 당신이 살아 있는 걸 계약 상태로 알 수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티아한테는 또 뭐라 말해.”
“그냥 여동생분이 한 것처럼 쪽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도망갔다가 한 달 뒤에 나타나는 이벤트는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레나는 흥미진진한 태도를 보이며 호들갑 떨었다.
“……티아가 쪽지만 남기고 간 것도 알고 있어?”
“당연하죠. 제가 말했잖아요. 제가 게임의 관리자라고. 게임 속 이야기 전개를 내다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있다면?”
“그레이스가 만든 이 게임 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해요.”
“그런 말은 없었잖아.”
샤를로즈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이죠. 제가 게임의 관리자이기는 한데. 게임을 진행해야지 세상이 돌아가요. 즉, 샤를로즈는 신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이 게임의 여자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들을 이어 주는 오작교 역할을 해야 해요.”
“관리자는 너니깐 네가 하면 되잖아.”
“그레이스는 공주님과 왕자님들의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이 게임을 만든 이유도 있거든요. 성스러운 여자 주인공과 그녀를 집착하는 남자들.”
“고약한 취미가 있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은 신이 되어도 그레이스의 룰을 따라야 해요.”
“그 중요한 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까먹고 있었거든요.”
“그럼 나, 지옥에 안 갈래.”
“당신의 의견을 존중해 줄게요. 지옥은 가지 않는 걸로.”
레나는 샤를로즈의 모든 의견을 다 수용하고 있었다.
그런 레나가 답답한 아힌이 한마디 거들었다.
“레나. 너 바보야? 네 종족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그게 네 야망이었잖아.”
“하지만 샤를로즈가 싫다는데 어떡해. 나는 신의 후계자를 보좌하는 종족이야. 신의 후계자의 명령이 우선이지.”
샤를로즈는 생각보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레나의 태도가 의외였다.
아까는 제게 반항했으면서.
“그럼, 내 지금 역할은 그레이스가 만든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거야?”
“그래도 되고, 지옥에 가셔서 죽은 흑주술사들을 살려도 되고. 알아서 하세요.”
“어느 편이 더 내게 편할 것 같아?”
“음. 흑주술사들을 살리면 당신의 일거리가 아예 없어지니 지옥에 가는 걸 추천하지만요. 그래도 그레이스가 만든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끝내고 지옥으로 가는 편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에요.”
“만약 그레이스가 만든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주인공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걸로 알고 있어요.”
흐음.
나름 괜찮은 이득 같기도 한데.
‘나를 귀찮게 구는 주인공들을 마음대로 내 눈앞에서 치울 수 있으니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나.’
샤를로즈는 이제 다 귀찮았기에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끝내는 일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끌렸다.
“차라리 시나리오대로 움직일래.”
“당신이 원하는 선택에 저도 따라갈게요.”
“그나저나 왜 넌 티아와 외형이 똑같은 거야?”
“아, 그레이스가 살아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취향이 제 얼굴이라서 그런가 봐요.”
“그럼 티아가 너를 본떠 만든 캐릭터야?”
“따지고 보면 그렇죠.”
“일단 내 궁금증은 거의 다 풀린 것 같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티아나 루아에게 변명할 거리 좀 생각해 봐. 뭐라고 해야지 널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글쎄요.”
샤를로즈는 레나와 그리고 레나의 사역마 아힌과 변명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샤를로즈가 레나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루아네 쪽은 난리도 아니었다.
***
루아는 이안과 숙소에서 나와 이안에게 샤를로즈 좀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샤를로즈가 눈에 안 보이는데요. 아버지.”
“악마의 눈을 사용했는데도?”
“악마의 힘이 점점 떨어지니 악마의 눈의 범위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한 100m 정도 거리만 보이네요.”
“차라리 내게 악마의 눈을 다시 주는 게 어때.”
“인간이 되면 그때, 드리죠. 지금은 별로 아버지에게 드리고 싶지 않아요.”
“하아. 그래, 네가 내게서 뺏은 물건이니. 됐다.”
“일단 샤를로즈의 여동생을 찾아볼까요?”
“티아의 신성력이 여기까지 느껴지네. 저 신전에서.”
“그러게요. 저 많은 신성력을 저희가 감히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저 정도의 신성력도 버티지 못할 리가.”
“하지만 아버지, 저렇게 어마어마한 신성력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요. 역대 성녀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안이 맞는 말만 하니, 루아가 할 말이 없어졌다.
티아의 신성력은 역대 최강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했다.
악마와 신성력은 상성 관계였다.
신성력이 강할수록 악마들은 신성력이 많은 쪽은 되도록 피했다.
왜냐,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신성력을 잘못 받아들이면 제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악마들은 신성력 있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티아가 성녀로서 각성하기 전에는 같이 있을 만했지만, 그녀가 성녀로서 완벽하게 각성한 후에는 주변에 있기가 좀 힘들었다.
루아도, 이안도.
아무래도 서로의 힘이 맞물려서 그런지 루아와 이안은 티아의 주변에 있기 힘들어했다.
샤를로즈를 지켜야 하는 루아는 그럼에도 얌전히 그녀의 주변을 지켰다.
꽤 힘이 들었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신전 쪽에서 강렬히 느껴지는 티아의 신성력은 버틸 만할 정도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대악마인 루아는 처음 느껴 보는 강력한 신성력에 공포감이 생겼지만, 샤를로즈를 위해서라면 가야 했다.
“가자, 이안.”
“정말 신전으로 가시게요?”
“샤를로즈를 위해서라면 가야지. 너도 샤를로즈가 필요하잖아. 인간이 되려면.”
“저기로 가면 인간이 되기도 전에 죽게 생겼는데요.”
이안은 피곤한 얼굴로 신전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루아는 억지로 이안을 끌고 갈 생각은 없었기에 혼자 가려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루아가 보고 싶어.’
순간, 샤를로즈의 음성이 루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덕분에 샤를로즈의 위치를 얼추 추릴 수 있었다.
샤를로즈가 흘린 음성을 따라가면 그녀가 있는 위치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샤를로즈의 위치를 대강 찾은 것 같아.”
“계약자의 목소리가 들리셨나 보군요.”
“응. 샤를로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그럼 얼른 가요.”
루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샤를로즈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루아는 오늘따라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을 보였다.
샤를로즈에게 혹여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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