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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120)

72화

백 번째라고.

샤를로즈는 허망한 눈을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게임 관리자에 의한 것이라니.

왜?

‘왜 하필 나고, 게임의 관리자는 무슨 생각인 거지?’

샤를로즈는 레나에게 불평하듯 물었다.

“왜 하필 나야.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

“샤를로즈의 과거 기억을 보신 적이 있죠?”

“있는데.”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샤를로즈가 필요해요. 하지만 진짜 샤를로즈는 죽었어요. 그래서 진짜를 대신할 가짜가 필요했거든요.”

“그게 네가 게임 관리자인 거랑 네가 흑주술사인 거랑 무슨 관련성이 있는 건데.”

샤를로즈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흑주술사가 이 게임을 만들었거든요. 아, 게임이라는 단어는 조금 그런가.”

“그게 무슨.”

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샤를로즈를 위해 하나씩 설명했다.

“이 게임, 아니 이 세상은 선과 악이 무조건 필요하거든요. 선은 성녀, 악은 악마. 이렇게 말이죠.”

“그거랑 지금 내 빙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데.”

“샤를로즈라는 인간은 이 게임을, 아니 이 세상을 창시한 그레이스의 환생물이에요. 아주 중요한 인물이죠. 그런데 천 년이 넘도록 그레이스의 환생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천년이 지난 지금. 드디어 그레이스의 환생물이 탄생했어요. 그런데 기쁨도 잠시.”

레나는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내렸다.

“샤를로즈라는 인간이 자살했어요. 결국, 본체는 남아 있지만 영혼은 사라져 버렸어요. 그레이스의 환생물을 기다린 저희에게는 끔찍한 결말이었거든요.”

“……그래서, 너희는 샤를로즈의 빈껍데기 몸에 다른 세상 사람들을 빙의시킨 거야?”

“네. 그런 셈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은 선과 악이 존재해야 멸망하지 않거든요. 선만이 존재하면 세상은 멸망해요. 그 반대로 악만이 존재해도 마찬가지고요. 그 선과 악을 조율하는 일이 저와 같은 흑주술사들의 일이에요.”

“…악마를 흉내 내는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야?”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에요. 흑주술사는 선과 악을 조율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예요. 악마의 힘이 있는 건 선과 악이 반반으로 태어난 종족이라 그래요. 악마들은 악으로부터 태어나 우리를 반쪽짜리라며 손가락질했죠. 덕분에 저희 흑주술사들은 살 곳마저 사라져 버렸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레나는 예전 일을 되새기며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이 세상을 창조한 사람이 그레이스고, 이 세상의 선과 악을 조율하는 종족이 흑주술사들이다. 이 말이야?”

샤를로즈는 자신이 잘 이해했는지 레나에게 물어 확인하려 했다.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잘 이해하신 것 같아요. 그레이스는 세상을 만드신 분의 후계자예요. 그러니깐 신의 후계자라고 말하면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겠네요.”

“신의 후계자? 그럼 샤를로즈가 신의 후계자라는 맥락이 되는 건가?”

“따지고 보면 그렇죠. 당신은 신의 후계자이고 세상을 지키실 위대한 분이에요. 샤를로즈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뭐든 말만 하세요.”

레나는 이미 샤를로즈의 질문을 받을 기세가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게 뭐든 말해 보라며 샤를로즈의 금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떻게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시킬 생각을 한 거지?”

“아, 우리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건 그레이스가 알려 주셨어요. 새빨간 달과 푸른 달이 희귀한 확률로 겹치는 날이 있어요. 그 날이면 세상의 차원의 문이 열리며 영혼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했어요. 그날, 샤를로즈의 몸에 다른 영혼을 넣는 실험을 했어요. 운이 좋게도 다 성공했는데. 쓸모가 없더라고요.”

“그럼 나 말고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되긴요, 죽었어요.”

“……뭐?”

“애초에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로만 물색했거든요. 시한부라든지, 몸이 병약하다든지. 아니면 다른 세상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요. 그러면 오히려 샤를로즈가 되어도 불만이 없을 것 같아서요.”

“나는 시한부도 아니고 세상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굳이 왜 나를 고른 거야?”

“샤를로즈와 영혼이 적합하다는 확률이 100퍼센트로 나왔거든요. 심지어 저희가 당신의 세상에 만든 게임을 하고 있더군요. 빙의시키기에 최적화된 조건이었어요. 그래서 냉큼 당신의 영혼을 빼 왔어요.”

“내가 샤를로즈의 영혼과 100퍼센트 적합하다고? 그 말은 꼭 샤를로즈의 영혼이 나라는 것처럼 들리네.”

“와, 이해가 참 빠르시네요. 맞아요. 당신은 죽은 샤를로즈의 영혼이에요. 간단히 말하자면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다른 세상으로 도망간 샤를로즈의 영혼이라고 말하면 알기 쉬우려나.”

“그럼 나는… 아니, 내가 진짜 샤를로즈였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샤를로즈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미동도 없는 금안을 크게 떨었다.

레나는 박수를 짝짝, 치며 참 잘했다는 듯 어린이집 선생님처럼 행동했다.

“맞아요, 잘 이해하고 계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가 진짜 샤를로즈라고…? 그렇다면 내 진짜 몸은?”

“다른 사람의 몸이에요. 당신이 있을 곳은 그 몸이 아닌 샤를로즈의 몸이에요. 차원의 문의 부작용 때문에 영혼이 잘못 들어간 거죠.”

“하!”

샤를로즈, 아니 김단은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행복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 관계부터 가족까지.

김단은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몇 탕 뛰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샤를로즈에 빙의한 후부터 일이 단단히 꼬였다.

인생에도 없던 자살 시도부터 악역이라며 손가락질받는 것까지.

그러나 샤를로즈의 연기를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빨랐다.

덕분에 샤를로즈의 주변인들은 자신을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연기가 연기가 아니었다니.

‘샤를로즈가 나 자신이었다니.’

머리가 복잡했지만, 레나의 말을 퍼즐대로 맞춰 보면 대충 이야기는 맞았다.

“그러면 대악마 루아와 나와 계약하는 것도 봤겠네?”

“그 부분에 있어서 조금 당황했어요. 이 세상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샤를로즈는 저희 편에 서야 하는데 완전히 악의 편으로 돌아서 버렸으니까요.”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지옥으로 가서 흑주술사들을 풀어 주고 이 세상에서 퇴장하세요. 그걸 원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퇴장해 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샤를로즈는, 아니 김단은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

레나의 충격적인 진실에 이제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유를 원하잖아요. 샤를로즈.”

“진짜 집을 잃은 기분이라서 자유도 퇴장도 이제 원하지 않아.”

“음, 그럼 이건 어때요?”

“뭔데.”

“샤를로즈가 이 세상의 신이 되는 거예요. 어차피 신의 후계자라서 그 조건도 맞고요.”

“내가 신이 되어서 뭐 하게. 세상이나 관리하라고? 귀찮은 짓은 이제 하기도 싫어.”

“신이 되면 모든 것을 눈앞에 꿇릴 수 있는 권한과 자유가 생기거든요. 게다가 지금 신의 자리는 공백이에요.”

“…왜?”

“그레이스가 죽은 후, 신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깐 저희 흑주술사들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나선 거고요.”

“그럼 신이 되면 실컷 놀아도 돼?”

“그럼요. 일은 저희가 할 테니 열심히 노세요. 샤를로즈.”

샤를로즈는 이제 만사가 다 귀찮았다.

샤를로즈의 역할도, 김단의 역할도.

모두다.

남자 주인공들에게도 질린 상태였다.

게다가 레나의 신이 되라는 조건은 꽤 괜찮았다.

그러면 루아랑 이별을 해야 하나.

신은 세상을 위해 공평해져야 하니까.

“루아랑 헤어지기는 싫은데…….”

“음, 그 대악마와 헤어지기 싫다면 성녀와 대악마를 모두 곁에 두세요. 그럼 선과 악이 조율될 테니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보고 티아까지 책임지라는 소리야?”

“네. 뭐 어쩔 수 없잖아요. 혼자는 외롭고 대악마를 놓치기 싫다면 성녀와 계약을 하세요. 신성한 계약을.”

“성녀와 계약하면 나와 티아의 관계는 루아와 같게 되나?”

“비슷하죠. 원할 때 소환도 가능하고요. 제 사역마처럼요.”

레나는 오른팔을 쭉 뻗은 다음에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검은색 마법진 위에 검은 여우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면서 소환되었다.

“이게 사역마?”

“네. 제가 아끼는 사역마들 중 하나에요. 이름은 아힌이라고 해요.”

“사람 이름 같네.”

“아, 이 모습도 보여 드려야 하나. 아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레나의 말에 검은색 여우, 아힌의 몸에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인간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인간화도 시킬 수 있어요. 신기하죠?”

“……쟤도 악마야?”

“따지고 보면 악마죠. 당신이 데리고 있는 루아의 라이벌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또 무슨 말이람.

“레나. 저 녀석이 설마 그레이스의 환생이야?”

“네, 맞아요. 잘도 알아차렸네요. 아힌.”

“쳇.”

아힌은 샤를로즈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반기지 않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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