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레나는 샤를로즈의 오만함에도 기죽지 않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요.”
“다 죽으면 부질없는 것. 노력해서 뭐를 얻는다고. 내게 복수하고 싶다면 따로 찾아와.”
“왜,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안 되나요? 아. 피해 없는 사람들이 휘말릴까 봐 겁이라도 나시나요?”
“티아가 원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너, 오래 살았으면 이제 그만 살 때도 됐잖아. 왜 자꾸 살려고 해? 이해가 안 돼.”
“엘 언니한테 들었어요. 당신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죽든 살든 너희 자매가 무슨 상관인데.”
“상관은 없지만, 엘 언니를 죽인 당신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요.”
“용서 안 할 거면, 너도 네 언니처럼 날 죽이게?”
“아뇨.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럼. 고문이라도 하게?”
샤를로즈의 금안은 싸늘했다.
레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 성녀를 죽이고 언니를 살릴 거예요.”
“대체 티아가 너희에게 무슨 원수를 졌다고 자꾸 죽이려고 해. 죽일 거면 날 죽여.”
“당신은 죽여도 살아난다고 엘 언니가 그랬어요. 그래서 당신은 죽이지 않을 거예요.”
“이봐, 엘의 여동생. 너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가 본데.”
샤를로즈는 레나를 비웃으며 레나의 뺨을 내쳤다.
짜악!
레나의 고개가 빠르게 왼쪽으로 돌아갔다.
“난 너희 자매가 만나 왔던 인간 중 가장 미쳤거든. 날 죽이든 고문하든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러니깐 신성한 신전에서 꼴값 그만 떨고 사라져.”
아니면 밤에 날 죽이러 오든가.
샤를로즈는 뒷말을 레나에게만 들리게 작게 이야기했다.
레나는 부어오른 제 뺨을 부여잡고 헛웃음 쳤다.
‘엘 언니, 언니 말대로 샤를로즈라는 인간.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게다가 악의 기운도 엄청나게 느껴져.
이런 기운이 인간 몸에 있다니.
아니, 애초에 버틸 수나 있을까.
저런 악의 기운이면 몸에 부작용으로 죽겠는데.
하긴 대악마와 계약했는데.
대악마가 샤를로즈의 악의 기운을 다 빼앗아 먹겠구나.
레나는 샤를로즈의 신상과 지금 처한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죽은 엘이 건네준 정보 덕분이었다.
‘언니, 이번에는 내가 살려 줄게.’
레나의 청명한 푸른 빛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레나는 제게서 떠나가는 샤를로즈의 발목을 빠르게 손으로 붙잡았다.
레나에게 발목이 잡힌 샤를로즈가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왜.”
“나랑 같이 지옥이나 가요. 지옥에 가서 개같이 굴려져요. 우리.”
레나의 발언에 샤를로즈는 인상을 험하게 구겼다.
무슨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냐는 듯이.
“나는 죽지 않는다고. 머리에 든 건 뇌가 아니고 돌이야?”
“네. 제가 든 게 없어서요. 그리고 언니에 대한 복수도 하고 싶고. 오랜만에 지옥 구경도 하고 싶어졌거든요.”
“하아.”
샤를로즈는 돌린 고개로 정면을 보았다.
제 시야에 잡힌 건 다름 아닌 걱정이 가득한 티아였다.
지금 레나 때문에 환자들이 술렁이며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티아의 빠른 대처에 다시 차분한 분위기를 찾을 수 있었다.
티아는 계속해서 환자들을 받아 치료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 샤를로즈에게 향하고 있었다.
불안해 미치겠다는 티아의 푸른색 눈동자를 본 샤를로즈는 잠깐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해리슨과 요한은 신전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아까 아침에 잠깐 샤를로즈와 해리슨 그리고 요한의 싸움이 있었는데.
[티아는 내가 돌볼 테니 넌 비켜. 샤를로즈.]
[폐하는 환자인 요한이랑 같이 집에서 쉬시지 왜 오셨어요?]
[너 같은 거 하나 있는 것보다는 우리 둘이 티아에게 더 도움이 되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그럼 한번 티아에게 선택지를 고르라고 해 보세요. 과연 누구를 고를지.]
[당연히 샤를로즈, 네가 아닌 소꿉친구인 우리를 고르겠지.]
[그렇게 자신만만하시면 한번 티아의 의견도 물어보세요. 누가 곁에 있으면 더 좋을지. 뭐, 다들 예상하시고 있잖아요. 티아가 원하는 건 나라는 걸.]
해리슨은 샤를로즈의 도발에 결국 티아에게 선택지를 고르게 했다.
[티아! 두 개의 선택지 중에 골라.]
[…네?]
[1번 나와 요한이 네 곁에 있는다. 2번 샤를로즈가 네 곁에 있는다. 선택받지 못한 자는 신전 순찰을 도는 걸로 하지.]
[좋아요, 폐하.]
[어서 골라, 티아.]
[티아! 폐하와 나를 고를 거지?]
[저, 저기…….]
티아는 되게 당황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긴 침묵이 오가는 와중에도 해리슨과 요한은 계속해서 티아를 들들 볶았다.
결국의 승자는.
[샤, 샤를로즈 언니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모두의 예상대로 샤를로즈였다.
해리슨과 요한은 샤를로즈에게 또 패한 탓에 지금까지도 신전의 순찰을 돌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레나가 신경에 거슬려 둘만 있는 장소로 옮기고 싶었지만, 혼자 남아 있는 티아가 걱정되었다.
혼자 남은 티아를 탐하는 자가 있으면 꽤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에.
애초에 병자들의 섬은 티아같이 성력이 높은 자들을 원하고 또 원했다.
다들 무심한 눈동자로 티아를 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아니었다.
티아만 있다면 자신의 아픔을 다 고칠 수 있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샤를로즈는 환자들이 선 줄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병자들의 섬에 오고 나서부터 악의 기운이 눈에 보였다.
처음에는 희미했다가 지금은 되게 선명했다.
다들 새까만 악의 기운을 일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의 기운은 죄다 티아로 향해 움직였다.
물론, 이 악의 기운의 움직임은 샤를로즈만이 볼 수 있었다.
샤를로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폐하, 요한! 티아를 부탁해요!”
이 정도 목청이면 신전을 순찰하던 두 사람이 들었겠지.
샤를로즈는 저 멀리서 황급히 뛰어오는 해리슨과 요한의 모습을 보고 레나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일단 나와 이야기 좀 해. 레나.”
레나는 갑자기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는 샤를로즈의 행동이 기뻐 배시시 아이처럼 웃었다.
“어디로 가서 단둘이 오붓하게 이야기할까요?”
“신전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레나는 샤를로즈의 발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샤를로즈는 일단 레나를 티아에게서 멀리 떨어트리자는 목표를 가지고 레나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레나는 순순히 샤를로즈에게 붙잡혔다.
샤를로즈는 레나가 혹시 모를 돌발 행동을 한다면 골치 아플지도 모르니 이렇게 강압적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아니면, 미쳐 날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샤를로즈는 레나를 끌고 사라졌다.
“…언니.”
티아는 샤를로즈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보다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환자들의 치료를 다 때려치우고 벗어날 수 없었다.
티아는 성녀였고, 환자들을 모조리 치료해 주겠다고 섬에 온 첫날에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티아는 한 번 한 약속은 무조건 지키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샤를로즈에 대한 연민이 더 크지만, 수많은 환자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지.
티아는 하는 수 없이 환자들의 치료를 더 빠르게 보며 치료를 마치고 샤를로즈와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샤를로즈가 곁에 있으라고 했으니까.
환자들의 약속과 샤를로즈와의 약속.
이 두 가지 약속을 지키려면 자신의 성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며 치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티아!”
“티아.”
샤를로즈의 외침에 금방 티아에게로 달려온 해리슨과 요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티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살폈다.
“폐하, 요한. 제 서포트 좀 해 주세요.”
“응?”
“뭐?”
해리슨과 요한은 어리둥절하며 티아를 내려다보았다.
서포트 해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티아를 당황스럽게 보던 그 둘은 그녀의 다음 말에 대충 상황 파악을 했다.
“샤를로즈 언니가 지금 위험해요. 근데 제가 가질 못해요. 지금 줄 서 있는 환자들 반 이상만이라도 치료하고 가려고요. 그러니 제 치료에 도움 좀 주세요.”
“우리가 무슨 도움을 주면 되지?”
해리슨은 티아의 명령을 기다렸다.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제 성력을 나눠 줄 테니 환자분들 좀 치료해 주세요.”
해리슨과 요한은 엉겁결에 티아가 건네준 성력을 얻어 환자들을 치료해 주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이야.
참, 어이 없었지만 그래도 티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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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를 어느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간 샤를로즈가 레나에게 용건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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