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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69/120)

69화

흑주술사의 영혼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샤를로즈는 지루한 표정으로 신전에서 무수한 병자들을 금방 치료하는 티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벌써 반나절째다.

티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병자들을 받고 있었다.

대단한 인내심이다.

‘나라면 1시간도 못 하고 금방 던져 버릴 것 같은데.’

샤를로즈는 티아가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성녀란, 정말 인내심이 초월한 인물이구나.

샤를로즈는 자신이 성녀에 빙의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자, 다음 분.”

티아는 쉬는 시간 없이 계속 병자들을 빠르게 치료했다.

그야 곧 자신은 이 섬에서 떠나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떠나기 전에 더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고 싶었다.

동정이라고 치부해도 좋았다.

자신의 치료 덕분에 행복해하는 환자들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걸 어쩌나.

이 뿌듯함은 은근히 중독이 있었다.

한 번 맛본다면 끊지 못할 중독이었다.

사람 미치게 하는 어느 약보다도 더.

그래도 티아는 샤를로즈에 대한 연민이 더 컸기에 병자들의 섬에서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티아는 환자 치료를 끝내고 슬쩍 제 옆에서 저를 보고 있는 샤를로즈를 힐끗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였다.

이런 예쁜 언니를 자신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금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지. 언니는 자유를 원하니까.’

티아는 처음으로 나쁜 생각을 했다.

감금이라니.

자신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다.

‘그만큼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욕망이 나를 지배하나 봐.’

혹시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조금 걱정이 됐지만, 괜찮았다.

샤를로즈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자유를 얻은 샤를로즈와 누군가의 간섭 없이 사는 상상을 하며.

티아는 입가가 살짝 떨렸다.

아주 잠깐의 행복한 망상으로.

만약에 제 망상을 샤를로즈가 알게 된다면 저를 배척할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이런 나쁜 마음은 숨기자.’

티아는 나쁜 마음은 고이 담아 제 마음의 구석에 꼭꼭 숨겨 놓았다.

샤를로즈가 전혀 알 수 없도록.

티아는 샤를로즈에게 잠시 빠졌다가 얼른 현실로 돌아왔다.

“다음 분.”

티아는 두 눈이 샤를로즈에서 환자로 빠르게 움직였다.

“어디가 아프세요?”

다음 환자는 여자였다.

그것도 온몸을 로브로 가린 한 여자.

“환자분?”

“…….”

티아는 이 환자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착각이겠지.

얼굴을 로브 후드로 반쯤 가려 놓아서 제대로 된 신원 파악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티아는 그냥 병든 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환자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빠르게 성력으로 치료하려고 그 여자 환자의 손을 맞잡았다.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손을 잡는 순간, 티아는 잠시 넋을 놓았다.

몸 전체가 약해져 있어서 근육, 지방 등 죄다 최대치로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태로 움직인 게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번 환자에게는 성력이 꽤 많이 들 것 같았다.

보통 이 섬의 대부분은 역병에 든 자들이었다.

일반 환자들은 티아의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일반적인 환자는 섬의 1% 정도나 될 정도로 많았다.

다들 역병이 무섭지는 않은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온 것인지.

환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티아는 일단 이 섬에 온 일반 환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 일반 환자는 성력으로 다 고쳐질 수 있으려나.

아주 가끔 제 성력이 통하지 않는 환자가 있었다.

물론, 성녀로 각성하기 전의 이야기였지만.

성녀로서 각성하기 전에는 성력이 제한되어 있어 많은 환자를 돌봐 주지 못했다.

겨우 다섯 명 정도 봤었나.

아무튼, 어쩌다 한 명꼴로 티아의 성력을 받지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악마의 힘이 몸속에 있던 역병 환자였다.

그 경우는 악마에게 미운털을 박혀서 악마의 힘, 그러니깐 악마의 저주를 받게 되어 역병까지 받게 된 케이스였다.

아주 희귀한 케이스지만, 이런 경우의 환자들도 아주 가끔은 저를 찾아와 제발 치료해 달라고 매달리는 경우가 있었다.

힘들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해 봐도 죽어도 상관없으니 봐 달라는 사람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인생 도박에 목숨을 건 것이었다.

고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티아는 환자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결국 악마의 저주를 가지고 있던 자들은 제 성력과 맞닿는 순간, 입으로 피를 뿜어 대며 죽었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지금 티아가 이런 환자를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이 여자 환자도 같은 케이스였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힘이 생생히 느껴졌다.

티아는 여자와 맞잡은 손을 잠시 놓았다.

“죄송하지만, 치료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살려 주세요.”

여자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악마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제 성력에 닿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해요. 그냥 살 마음을 접으세요.”

티아는 이번만큼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직접적으로 거절을 했다.

제 성력 때문에 죽는 사태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자신도 사람인지라 사람이 저 때문에 죽는 꼴을 죽어도 보기 싫었다.

조금 겪었으면 됐다.

이제는 싫었다.

“죽어도 좋아요. 저 좀 살려 주세요. 부탁드려요.”

여자는 애걸복걸하며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티아는 다시금 마음을 다 잡고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 꼭 살아야 해요. 꼭.”

“제가 치료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어요.”

“죽어도 괜찮으니까 제발….”

“죄송합니다.”

“제발, 고쳐 주세요.”

여자의 고집은 황소고집이었다.

티아의 거절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난감해하는 티아를 향해 밀어붙이며 제 의사를 강하게 표현했다.

티아의 푸른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점점 마음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던 샤를로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티아를 도와주기로 했다.

이러다가 뒤에 있는 환자들이 먼저 죽게 생겼으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뒷사람 생각 좀 하시죠.”

샤를로즈는 티아의 앞을 막아서며 여자를 향해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여자는 샤를로즈가 나타나자 몸을 살짝 떨었다.

무슨 괴물을 본 것처럼.

“저는 꼭 살아야 해요.”

“저 뒤에 있는 환자들도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못 고친다는데 어떡해요. 그냥 돌아가야지.”

샤를로즈의 묵직한 팩트 폭행에 여자는 울먹였다.

“언니를 위해서 살아야 해요, 꼭.”

여자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술렁임에도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샤를로즈는 가차 없다는 듯 여자를 내쫓기 위해 그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잡았다.”

“뭐?”

여자는 샤를로즈가 제 손목을 붙잡은 걸 보더니 푸하하, 기분 나쁜 웃음을 터트렸다.

샤를로즈는 미간을 확 좁히며 여자를 신전에서 내쫓으려고 하는데.

“너만 사라지면 내 계획은 이제 완벽해.”

휘이잉.

갑자기 크게 부는 바람에 여자의 후드가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샤를로즈는 여자의 외형에 크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티아와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티아가 성녀로서 각성하기 전 모습과.

백금발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파도를 치듯 허공에 물결쳤고, 샤를로즈를 보는 맑고 부드러운 푸른색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피부는 얼마나 희고 고운지 투명하기까지 했다.

마치 티아를 보는 것 같았다.

샤를로즈는 여자의 외형을 보고 잠시 멍 때렸다.

‘원작 여자 주인공인 티아와 같은 외형인 엑스트라가 있었던가. 아닌데, 없었는데.’

샤를로즈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게임 속 공식 카페의 정보 팁들을 떠올렸다.

‘티아와 같은 외형을 지닌 엑스트라나 조연은 나타나지 않았어. 그럼 얘는 누구야.’

샤를로즈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누구길래 원작 여자 주인공과 같은 외모를 가진 것인지.

샤를로즈가 여자를 향해 경계심을 풀지 않고 말을 건넸다.

“너, 누군데 내 여동생이랑 외형이 똑같아?”

여자는 샤를로즈의 물음에 픽 하고 웃었다.

매끄럽게 올라가는 두 입가는 기쁨에 차 있었다.

“제 이름은 레나예요.”

“레, 나?”

샤를로즈의 뒤에 있던 티아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티아의 표정은 말도 아니게 굳어 있었다.

보면 안 될 사람을 본 것처럼.

“샤를로즈 언니, 레나라는 사람. 엘의 여동생 아니야…?”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어머, 제 언니를 아세요?”

레나는 티아를 향해 매혹적으로 웃어 보였다.

샤를로즈는 여전히 아무것도 관심 없는 얼굴로 레나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레나를 신전 바깥으로 내던졌다.

있는 힘껏 던졌기에 샤를로즈는 금방 기운이 빠졌다.

신전 바닥에 쓰러진 레나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샤를로즈를 올려다보았다.

“엘 언니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당신이 언니를 죽인 살인자군요.”

레나의 도발에도 샤를로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지껄여 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더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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