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티아는 숙소에서 나와 신전으로 향했다.
그 신전은, 티아가 이 섬에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공간이었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 사람이 북적거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말이다.
샤를로즈는 줄을 맞춰 서 있는 병자들이 신기했다.
보통 자신의 치료가 더 급해 새치기하는 병자들이 있을 만도 한데.
없었다.
다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아, 병자들에게 규칙이라도 정해 놓은 거야? 왜 이렇게 말을 잘 들어?”
티아는 샤를로즈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난잡했었는데, 내가 그러면 치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니 어느 순간부터 다들 질서를 잘 지키기 시작했어.”
“그렇구나.”
“나, 오늘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쉬지 않고 병자들을 돌볼 건데 언니도 내 옆에 계속 있을 거야?”
“응. 엘과 비슷한 사건이 생기면 안 되니까. 게다가 넌 너무 사람을 잘 믿어서 안 돼. 내가 옆에서 끊어 줘야지.”
티아는 샤를로즈의 말에 ‘엘’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잠깐 옛 회상에 빠져 버렸다.
티아에게 있어 엘은 구원자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엘은 샤를로즈를 죽였다.
그 순간부터 엘과 티아는 적이었다.
그래도 옛정은 잊지 못하나.
[티아 아가씨! 불꽃놀이가 참 예뻐요!]
[티아 아가씨, 또 깨셨어요? 제가 자장가라도 불러 드릴게요.]
[아가씨! 괜찮으세요?]
[저는 언제나 아가씨 옆에 있을 거예요.]
엘과의 추억들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 지나갔다.
티아는 이제 다 부질없는 일이라며 속으로 한탄했다.
‘이제 내 옆에는 샤를로즈 언니만 있으면 돼.’
그러면 돼.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일이었잖아. 이제 엘에 대한 기억은 모조리 지워 버리자.’
티아는 엘에 대한 기억을 떨쳐 내려고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샤를로즈는 갑작스러운 티아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지, 쟤는.
“언니, 얼른 가자. 얼른 병자들을 치료하고 싶어!”
티아는 샤를로즈의 손목을 붙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손길을 예전처럼 내치지 않았다.
그저 티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줄 뿐이었다.
그 애를 이용하려면 먼저 신뢰를 듬뿍 쌓아야 했으니까.
샤를로즈와 티아의 뒤를 졸졸 쫓았던 해리슨과 요한 역시 티아가 뛰자 하는 수 없이 발 보폭을 늘렸다.
그렇게 신전에서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
한편, 숙소에서 기다리라는 샤를로즈의 명령으로 숙소를 지키던 루아는 숙소를 둘러보고 있었다.
흑주술사의 여동생을 찾는 중이었다.
흑주술사는 죽였지만, 흑주술사가 살리고 싶어 했던 여동생은 죽지 않았다.
‘흑주술사를 죽이고 바로 그 여동생의 시신도 불태워야 했는데. 샤를로즈 때문에 평정심을 잃어서 다 잊고 있었어.’
흑주술사를 죽인다고 끝이 아니었다.
흑주술사가 집착하던 그 시체를 찾아 악마의 불꽃으로 없애야지, 흑주술사의 술법이 완전히 끝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루아는 샤를로즈 때문에 경황이 없어 마무리를 말끔히 처리하지 못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완벽주의자였던 루아에게 있어 치명적인 오점이 되는 날이었다.
게다가 이안 역시 샤를로즈의 피를 먹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루아에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서로 같은 이유로 흑주술사, 엘의 술법을 완전히 처리하지 않았으므로 샤를로즈가 오기 전까지는 일을 무사히 마쳐야 했다.
“이안, 우리가 실수한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루아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안을 향해 물었다.
이안은 루아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엘이라는 여자의 여동생 시체를 찾아야 해.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텐데. 너도 찾아봐. 이안.”
“이미 창고까지 뒤져 봤어요.”
“언제 창고까지 뒤졌대?”
“아버지가 샤를로즈의 주변을 맴돌 때, 저는 창고에 가 있었거든요.”
“몰랐어.”
“아버지는 샤를로즈에게만 신경 쓰고 있었으니 당연히 몰랐을 거라 생각이 돼요.”
“계약자를 해칠 수 있는 녀석들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저도 그 마음 잘 알아요. 예전에 그레이스가 있었을 적, 제가 아버지처럼 행동했거든요.”
“……어째서?”
“그레이스는 마을에서 이미 괴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이었어요. 심지어 그 애를 죽이면 마을에 평화가 온다는 소문까지 퍼진 상태였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레이스를 해치러 동굴까지 간 적이 있었나 보네.”
“네, 많았어요.”
“그럼 계약을 하면 되잖아, 왜 계약을 하지 않은 거지?”
“무서웠거든요.”
“뭐가?”
“그레이스와 계약으로 얽힌 관계가 제 사랑까지 영향을 끼칠까 봐요.”
“계약자와 사랑하지 말라는 조항은 없어. 알잖아, 이안.”
“알면서도 두려웠어요. 그 사랑도 계약으로 묶여 감정이 사라질까 봐.”
“이안은 겁이 없는 악마였는데.”
“그러게요. 예전에는 그랬지만, 그레이스를 만난 후부터 많이 달라졌어요. 겁쟁이에다가 인간을 사랑하는 악마로 말이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루아는 이안의 말대답에 어설프게 웃어넘겼다.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 이안이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하고 엘이라는 여자의 여동생 시체나 찾자.”
“창고에 시체가 없으면 지하겠죠?”
“아, 지하를 생각지 못했네. 지하실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대.”
“악마의 눈을 사용했어요. 아버지에게 빼앗은 그 눈이요.”
“괜히 빼앗겼군.”
악마의 눈은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신비한 눈이었다.
본래는 루아의 두 눈에 있어야 할 악마의 눈을 이안이 사춘기가 왔을 때, 빼앗아 자신의 두 눈에 삽입했다.
아주 예전의 일이라서 루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나 보다.
하기야 천 년도 더 된 이야기였으니까.
루아는 이안에게 악마의 눈을 빼앗겨도 다시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그 눈이 없더라도 악마로서 잘살 수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레베크 선대 공작에게 패배라는 수치를 거머쥔 것에 악마의 눈은 크게 한몫을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안에게 빼앗긴 악마의 눈을 다시 빼앗을 걸이라는 후회도 했었다.
악마의 눈이 있다면, 레베크 선대 공작의 기습을 알았을 텐데.
루아는 예전 기억을 상기시키며 혀를 끌끌 찼다.
어차피 다 지나간 과거.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현재가 중요했다.
샤를로즈가 저를 풀어 준 지금이.
“그럼 악마의 눈으로 지하실 안쪽까지 봤어?”
“아쉽게도 이제는 악마의 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샤를로즈의 피 때문에. 악마의 힘이 줄어들어서요.”
“아.”
악마의 눈은 악마의 힘이 강할수록 더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안이 가진 악마의 힘은 샤를로즈 피 때문에 점점 줄어드는 상태였다.
악마의 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이 집에 지하실이 있구나,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일단 지하실로 가 봐요. 가장 수상한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 움직이자. 지하실로 안내해. 나는 어딨는지 몰라.”
루아는 이안의 뒤를 졸졸 쫓았다.
몇 걸음 갔을까.
이안이 걸음을 멈추고 거실 중앙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톡, 힘을 살짝 주어 거실 중앙을 뚫었다.
콰앙!
먼지와 함께 거실 바닥 파편이 날아갔다.
그리고 새까만 검은색 계단이 보였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이런 곳에 지하실이 있었던 거야? 음침하네.”
“흑주술사나 우리나 습성은 매우 비슷하니까요.”
“하긴.”
루아는 이안이 먼저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보자 자신도 따라 내려갔다.
퀴퀴한 냄새가 루아의 코를 자극했다.
뭐지, 이 불쾌한 냄새는.
라고 생각할 때, 이안의 두 다리가 우뚝 섰다.
“이안, 뭐 해? 더 안 들어가고.”
“큰일 났어요. 아버지.”
“왜. 뭔데.”
루아는 멈춰 있는 이안을 살짝 밀어 앞으로 다가갔다.
“흑주술사의 여동생이 살아난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관이 보이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허탕 친 거 아니야?”
“그러기에는 주변의 발자국이 너무 선명해요. 그리고 이 기운. 분명 흑주술사예요.”
“그럼 그, 엘이라는 흑주술사가 살아났다는 말이야? 그게 말이 돼? 흑주술사의 몸은 죽었어.”
“저희가 착각한 게 있었어요. 멍청하네요.”
“무슨 말이야, 요약해 봐.”
“흑주술사의 술법을 없애려면 흑주술사의 영혼부터 없애야 했어요. 흑주술사가 원하는 시체가 아니라.”
“그러니깐, 엘이라는 흑주술사가 제 여동생의 죽은 몸에 들어가 부활했다는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 처음 겪는 일이에요.”
“악마의 힘으로 죽은 본체는 절대 다시 살아나지 않아. 그래서 흑주술사가 멸종된 거잖아.”
“그런데 이번 흑주술사는 악마의 힘으로는 죽지 않는가 봐요. 영혼의 흔적이 보여요.”
이안은 악마의 눈을 활용해 관 주변을 살폈다.
영혼이 움직였던 흔적들이 포착되었다.
“그러면 지금 흑주술사는 바깥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네.”
루아는 한숨을 내쉬며 일이 굉장히 틀어짐에 보기 드문 짜증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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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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