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샤를로즈는 티아가 일어날 때까지 얌전히 누워 티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원작 여주를 이용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분명 저번처럼 엄청난 신성력으로 자신을 살릴 것이 뻔했다.
어떻게 이용해야지 원작 여자 주인공을 잘 이용했다고 소문이 날까.
원작 남자 주인공들은 샤를로즈의 퇴장에 도움을 줄 리 없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말이다.
‘내게 집착하는 원작 여주가 히든카드여야 할 텐데.’
샤를로즈는 현실 세계에 돌아가는 걸 반쯤 포기했지만, 이곳에서 자유를 얻고 사는 건 아예 포기 하지 않았다.
그야 악역으로서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원작 주인공들끼리 지지고 볶는 일에 자신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악역의 모든 루트는 배드 엔딩일뿐더러 꽃길 따위 걸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으음.”
아침 새가 얄밉게 울자, 티아가 드디어 눈을 떴다.
샤를로즈는 티아가 일어나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티아는 샤를로즈의 금색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언니? 언제 일어났어?”
“조금 전에.”
샤를로즈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티아의 반응을 봤다.
붉게 오르는 두 뺨과 흔들리는 푸른색 눈동자.
티아는 마치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들었을 때처럼 행동했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행동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나저나 드디어 우리 둘이 있을 수 있게 됐네. 기분 좋다.”
“넌 내가 왜 좋아?”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좋은데.”
“내가 널 괴롭혔을 때도 좋았어?”
“응. 좋았어. 언니의 모든 순간이 좋아서 언니가 날 괴롭혀도 괜찮았어.”
“도망간 이유는 정말 나야? 나 때문에 도망간 거야?”
“언니를 살리고 싶었어. 내 얼굴만 보면 죽겠다는 언니를 말리고 싶었거든.”
“지금도 죽고 싶은데…….”
샤를로즈는 끝말을 흐리며 티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러자 티아가 화들짝 놀라며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 해, 티아?”
“내 얼굴만 보면 언니는 늘 우울해지고 화냈잖아. 내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너, 바보야?”
“……언니를 지키기 위한 내 노력이라고 생각해 줘.”
“이제 네 얼굴 보면 죽고 싶어지는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야. 그러니깐 내게서 숨지마.”
“정말로?”
“응.”
“나 없는 동안 언니가 많이 바뀐 것 같아. 꼭 다른 사람 같기도 하고.”
티아는 제 얼굴을 가린 두 손을 떼어 내며 샤를로즈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샤를로즈의 홀릴 듯한 금색 눈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지 몰랐으므로.
“그래? 내가 많이 바뀌었어?”
“응. 화도 안 내고, 내 주변 사람들도 챙겨 주고. 꼭 다른 사람이 언니 몸에 들어간 것 같아.”
티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샤를로즈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만 할 뿐, 하지만 티아는 알 턱이 없었다.
진짜는 죽고 가짜가 눈앞에 있는 걸.있다는 걸.
“티아. 내 퇴장에 도움을 줘.”
샤를로즈는 티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날렸다.
어젯밤에도 한 이야기지만, 혹여 티아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다시금 말을 했다.
“언니는 어디로 떠나고 싶은 건데?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티아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샤를로즈에게 물었다.
‘언니가 지옥을 가고 싶다고 하면 나도 언니를 따라 지옥에 갈게.’
티아는 샤를로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닐 예정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마음은 물론, 샤를로즈가 없으면 자신은 제대로 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 곁에는 너와 루아만 있으면 돼.”
“…루아라면 그 대악마? 어째서? 나만 있으면 되잖아.”
“루아는 내 어두운 시야를 밝혀 주는 좋은 악마야. 사랑하지는 않지만 매우 아끼고 있거든.”
“사랑하지는 않아?”
티아는 샤를로즈의 말에 자신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느껴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 버렸다.
‘언니의 옆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구나. 내게도 기회가 있어.’
티아는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샤를로즈의 옆에 있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고자 결심했다.
샤를로즈가 기라면 기고, 손을 달라면 손까지 줄 수 있었다.
자신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루아랑 나는 그렇게 심오한 관계가 아니야. 비즈니스 파트너. 딱 그 정도지.”
“마음 하나 없는 파트너라고?”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럼 나도.”
“응?”
“나도 언니의 파트너가 될래.”
샤를로즈는 티아의 적극적인 태도에 오히려 좋았다.
알아서 이용해 달라고 애원하는데 들어줘야지.
샤를로즈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너도 내 파트너가 되어서 나 좀 도와줘. 이 망할 세상에서 퇴장할 수 있게.”
“그, 퇴장이라는 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티아는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다.
샤를로즈가 말하는 ‘퇴장’이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가 그 안에 들어 있는지에 대해.
“나는 자유를 원해.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를. 그런 자유를 나는 퇴장이라고 불러.”
“그러니깐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싶다는 의미야?”
“따지고 본다면 그렇지.”
“유진 오라버니랑 제레미 오라버니가 과연 언니를 가문에서 내보내는 데 동의를 할까.”
“하지 않겠지.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티아. 나를 완전히 미쳤다고 오라버니들에게 말해 줘.”
“오라버니들에게 연기를 하라고?”
“응. 나도 미친 척 너를 괴롭힐 테니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뭐, 언니가 나랑 자매 관계가 아니게 된다면 나야 좋지만.’
티아는 샤를로즈의 퇴장에 옹호하고 싶었다.
가문에서의 파문이라니.
샤를로즈의 말대로 퇴장을 하게 된다면 가족이 아닌 남이 된다.
즉, 샤를로즈의 옆에 가족이 아닌 관계로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야 가문의 방해꾼들, 그러니깐 오라버니들이 샤를로즈 언니의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 생각에 미치자 티아는 샤를로즈의 두 손을 꼭 잡고선 당당하게 외쳤다.
“언니, 나만 믿어! 언니가 꼭 퇴장하게 만들어 줄게.”
“정말로? 널 믿어도 될까?”
“응. 나만 믿어. 연기라면, 나 자신 있거든.”
언니에 대한 감정을 숨기는 연기를 많이 해 와서 말이야.
“그럼 너만 믿을게. 티아. 내 퇴장을 꼭 도와줘.”
“응, 응. 언니를 도와줄게. 나만 믿고 따라와.”
샤를로즈는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티아를 봤다. 그렇지만 샤를로즈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할 정도로 차가웠다.
티아는 샤를로즈의 웃는 모습만 슬쩍 봤기에 샤를로즈의 싸늘한 눈빛은 보지 못했다.
차라리 못 본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샤를로즈는 비틀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습성이 있었다.
티아가 만약 지금 샤를로즈의 눈을 본다면 큰 상처를 받을 것이 뻔했다.
‘티아가 상처 받으면 안 돼. 제발, 내 눈아, 정상적으로 웃어 줘.’
샤를로즈는 열띤 노력 끝에 제 눈빛을 다정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
‘나도 연기를 해야겠네. 착한 언니 연기를.’
귀찮지만, 퇴장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지.
샤를로즈도 티아와 다른 마음으로 속으로 자신을 응원했다.
***
샤를로즈는 티아가 건네준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티아와 함께 거실로 내려갔다.
그러자 거실에는 루아와 이안 그리고 해리슨이 있었다.
티아는 요한이 보이지 않자 해리슨을 향해 물었다.
“폐하, 요한은 어떻게 됐어요?”
“잘 자고 있더군. 깨워도 안 일어나.”
“저주는 밤 동안 다시 올라오지 않았어요?”
“응. 멀쩡해.”
해리슨의 대답에 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샤를로즈의 죽음을 방관했더라도 정이라는 게 있었다.
소꿉친구의 정.
그 정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해리슨의 외침과 샤를로즈 때문에 그 생각도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다행인 건가.
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악독할 줄 몰랐다.
샤를로즈가 악역이 아니라 자신이 악역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니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도 살렸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구나.
샤를로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요한의 정보다 더 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고 요한이 잘한 건 아니었다.
언니에게 못되게 군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지만, 샤를로즈를 못되게 군 이유 중 하나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티아는 샤를로즈를 보면 미안하다고, 자기 때문에 고생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전부 보여 주는 기분이 들어서.
진정한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티아는 이기적이게도 자신만을 생각하고 잘못 하나 없는 샤를로즈를 나쁜 악역으로 만든 죄가 있었다.
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일단은 샤를로즈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 다음에 진심 어린 사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언니의 퇴장을 도와준 후에 사과하자.
티아는 샤를로즈를 힐끗 보며 다짐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