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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65/120)

65화

루아는 어쩌다 보니 샤를로즈에게 내쫓기게 되었다.

티아와 단둘이 꼭 자야 한다며 말이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말이면 끔뻑 죽는 대악마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무리한 요구를 부탁해도 다 들어주는, 샤를로즈 한정으로 착한 악마였다.

아마 다른 인간이 루아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그 인간은 그에게 개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 정도로 막강한 힘과 악마로서의 권력이 있었다.

그런 힘과 권력이 있으면 뭐 하나.

샤를로즈라는 여자 인간에게 쪽도 쓰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는데.

루아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놓고 ‘나 불안해’라는 모습을 내보였다.

옆에서 루아를 관찰하고 있던 이안은 제 아버지인 루아가 인간 한 명 때문에 초조해하는 모습을 처음 봐 신기할 따름이었다.

샤를로즈에 의해 쫓겨난 루아와 이안은 자연스럽게 층계를 내려와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하아. 샤를로즈의 여동생에게 지다니. 내 체면도 말이 아니네.”

“아버지는 샤를로즈에게 완전히 빠진 겁니까?”

“…몰라.”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악마에게도 본능이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샤를로즈에 대한 감정이 참 오묘해. 좋은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막상 샤를로즈가 없으면 불안해 미쳐 버릴 것 같아. 이거 사랑이야?”

이안은 루아의 연애 상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아마 사랑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

“사랑이라. 악마가 인간을 사랑하는 이례가 없어. 사랑일 리 없어.”

“하지만, 아버지는 샤를로즈만 떠오르면 어쩔 줄 몰라 하고 그 애가 해 달라는 걸 다 해 주지 않습니까.”

“그건, 계약자로서의 존중이야.”

“언제부터 아버지가 인간 계약자를 존중했다고 그러십니까.”

“이제부터 하게 되었어. 이제부터.”

“만약에 샤를로즈를 손에 얻지 못한다면 무슨 기분일 것 같습니까.”

“미쳐 날뛸 것 같아.”

“그게 비틀린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안, 너는 인간을 사랑한 적이 있어? 이런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보이네.”

“네, 사랑한 적 있습니다. 아버지가 봉인되고 나서 백 년이 지난 후 어떤 인간 여자를 만났었죠.”

루아는 이안이 인간과 연애를 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기 때문에 괜스레 이안의 연애사가 궁금해졌다.

“너 역시 인간을 안 좋게 본 악마 중 한 명이었는데. 어쩌다가 여자 인간과 사랑을 하게 된 거지? 참 궁금하네.”

루아의 능글스러움에 이안은 피식하고 웃었다.

“아버지가 봉인된 후, 저는 갈 곳을 잃어 헤매고 또 헤맸어요. 그러다가 백 년이 훌쩍 흘러 버렸고…. 햇볕이 따사로웠던 그 봄 어느 날. 어떤 여자 인간을 만나게 됐죠.”

“어디서 만났는데?”

“인적 드문 동굴에서요.”

“동굴?”

“그 여자 인간은 다른 인간들에게 괴물이라며 손가락질 받고 있었어요. 저는 처음으로 인간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고, 그 애에게 다가갔죠.”

“그래서 그 여자 인간을 어떻게 했지?”

“처음에는 계속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어요. 무엇을 하나 궁금해서.”

“그리고?”

“처음부터 그 애는 저를 경계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맑게 웃으며 저를 반겼지, 참 신기한 인간도 있구나, 생각했었죠.”

“…….”

“그러다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그 애의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없다는 답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직접 지어 줬어요.”

“네가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 줘?”

“저도 인간에게 이 정도까지의 호기심이 있을 줄은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이름을 뭐라고 지어줬는데?”

“그레이스. 축복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지어 줬습니다.”

“축복? 악마가 축복을 운운하니 이상하군.”

“그 애는 제게 있어서 축복이었으니까요.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그 애로 인해 바뀌었거든요.”

“그래서 그 인간과 얼마나 살았지? 오래 살았나?”

루아는 끊임없이 이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야 자신도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결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보통 악마들은 인간과 사랑을 하지 않는다.

악의 기운을 먹기 위해 계약만을 하지. 마음까지 내어 주지 않는다.

인간이 악마에게 사랑을 운운할지 몰라도 그 반대로 악마가 인간에게 사랑을 운운하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이안의 이야기가.

이안은 루아의 질문에 잘 대답하다가 마지막 질문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본능적으로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굳힌 두 입술을 열었다.

“그 애는 저를 만나고 10년 뒤에 죽었습니다. 스스로 목을 매고….”

루아는 이안의 대답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자살?

샤를로즈가 꾸준히 하는 짓 아닌가.

루아는 순간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의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레이스는 글을 쓸 줄도 모르는 자이기에 유서도 남기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럼 그 애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았나?”

“고마웠다고 했습니다. 다음 생에 보자고. 이번 생은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고요.”

“그 애의 시신은?”

“동굴 근처에 묻어 뒀습니다.”

“그 애를 떠나보내는 네 심정은 어땠지?”

혹여 자신이 이런 일이 벌어질까 겁이 나 묻는 것이었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정말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물씬 들었다.

샤를로즈는 죽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애는 제게 축복이었으니까요. 아버지가 봉인당하고 인간계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보석이었습니다. 그 애는, 그레이스는.”

“그렇군. 너도 의외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우스운 일이 벌어졌죠.”

“이야기가 끝이 아닌가?”

“이건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뭐지?”

“그레이스와 샤를로즈의 외형이 똑같아요. 처음에 샤를로즈를 보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레이스가 다시 태어난 줄 알고 말이에요.”

“종종 인간들은 환생이라는 걸 한다고 들었다. 샤를로즈도 그럼 그 부류인가? 그래서 자살을 하려는 건가.”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샤를로즈의 피를 먹다 보면 그레이스와의 옛 기억에 사로잡히곤 하더라고요.”

“그레이스, 샤를로즈. 둘의 관계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나?”

“네, 무엇이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샤를로즈의 피를 먹었다고 제 악마의 힘이 줄어들진 않겠죠. 게다가 그레이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무슨 말이지?”

“내가 인간이 돼서 너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이런 말이요.”

“그래서 그레이스의 반응은?”

“어떻게든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아등바등 애썼지만, 저를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었죠.”

“그럼 혹시 그레이스가 샤를로즈의 환생으로, 악마를 인간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가설은 일리가 있다는 소리인가?”

“글쎄요. 인간의 환생 세계에는 저희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외형만 똑 닮은 거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흐음.

루아는 턱에 오른손을 얹은 다음 잠시 생각을 했다.

만약 이안의 마지막 말이 맞다면?

샤를로즈가 그레이스의 환생이라면?

아주 만약에 그렇다면.

일이 굉장히 꼬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이안이 문제였다.

그레이스의 환생이 진짜라면.

이안은 눈이 돌아가 샤를로즈에게 집착할 것이다.

루아는 그 꼴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샤를로즈의 여동생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하물며 아들인 이안에게까지 샤를로즈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독점.

그 애를, 샤를로즈를 혼자 독점하고 싶었다.

루아의 소유욕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

그렇게 어두웠던 하늘이 점점 새하얀 빛으로 섬의 사람들을 깨웠다.

샤를로즈 역시 이른 아침부터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곤히 자는 티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이제 은백색이 되어 버렸고, 숱 많은 새하얀 속눈썹 아래 자기주장이 강한 코와 앙증맞은 입술이 보였다.

피부도 얼마나 고운지 투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성녀로 각성하면 다들 이렇게 되는 건가.

샤를로즈는 티아에게 신비로움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티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천을 만지듯 천천히 쓰다듬었다.

“으응.”

티아는 잠꼬대를 하는 건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배시시 웃었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의 촉감이 좋은지 계속해서 그 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티아. 너를 이용해서 난 사라질 거야. 제발 나 좀 도와줘.”

이미 심신이 지친 샤를로즈는 혼자 중얼거리며 티아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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