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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20)

64화

샤를로즈는 티아의 손목을 잡으며 다시 한 말을 반복했다.

“나 좀 재워 줘, 티아.”

티아는 이 어두운 상황에서 설레면 안 되었지만, 설레는 걸 어떻게 하나.

‘내가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었나. 아닌데.’

티아는 감정 조절을 잘하는 애였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선뜻 마음을 내어 주는 감정 컨트롤이 완벽한 사람.

그게 바로 티아였다.

그런 완벽한 티아에게 약점이 있다면 저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샤를로즈였다.

샤를로즈의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마음에 박혀 왔고, 샤를로즈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밟혔다.

누가 본다면 제대로 된 사랑에 빠졌다며 부럽다고 할 테지만.

피는 섞이지 않아도 자매는 자매였다.

서류상으로는 자매이기 때문에 이런 금단의 사랑은 나쁜 일이었다.

그래서 티아는 그 금단의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언니가 자매로서, 가족으로서 좋은 거라고.

그리 생각하면 조금 나아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티아. 내 탁한 마음 좀 정화해 줘. 이 답답한 마음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 오늘은 편히 자고 싶어.”

“……그럼 조건이 있어.”

티아는 숨을 잠시 꾹 참으며 부들거렸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아 숨을 참으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

“뭔데?”

샤를로즈는 고개를 기울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티아는 숨을 고르게 내쉬며 대답했다.

“오로지 방 안에는 언니와 나 밖에 없어야 해.”

그러니깐, 방해꾼들은 사라져 달라는 말이었다.

“샤를로즈. 이번에 요한을 살려 주었으니 티아와 함께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지.”

해리슨은 정신이 돌아 버렸나, 샤를로즈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샤를로즈는 해리슨의 변화된 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야 관심이 없었으니까.

샤를로즈의 관심이라고는 티아와 루아 밖에 없었다.

원작 남자 주인공들은 샤를로즈에게 있어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사라졌으면 좋았을 존재.

그게 바로 빌어먹을 원작 남자 주인공들이었다.

샤를로즈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티아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랑 자기 싫어? 그러면 알아서 잘게. 귀찮게 해서 미안.”

샤를로즈는 포기가 빨랐다.

그야 그럴 것이 매달려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아의 손목을 놓으려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언니. 우리 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야.”

“그건 상관 없는데. 네 다른 추종자들이 난리칠까 봐 그렇지.”

엄청나게 귀찮게 굴거든.

샤를로즈의 금괴처럼 빛나는 금안이 티아를 담으며 귀찮음을 드러냈다.

“만약에 나와 단 둘이 잔다면 언니의 답답한 마음을 치료해 줄게. 어때? 거기에다가 나를 원하는 그 분들이 언니에게 다가가지 못하게끔 할게.”

오.

꽤 끌리는 조건인데?

샤를로즈는 입맛을 다시며 흠,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반면, 티아는 똥줄이 탈 것 같았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만약에 샤를로즈 언니가 저를 선택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래도 언니는 내 말에 손을 들어줄 거야.’

티아는 왠지 모르게 샤를로즈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성녀의 감이라고 하던가.

가끔 성녀들은 감이 굉장히 좋을 때가 있었다.

이럴 때에 세상의 평화를 지키거나,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그러나 티아는 선대 성녀들처럼 성녀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평화를 찾아 주는 그딴 일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티아는 이 성녀의 힘을 오로지 샤를로즈를 위해 쓰고 싶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위태로운 제 언니를 지켜 줄 사람이 루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위대한 성녀의 힘을 샤를로즈에게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아직은 샤를로즈에게 이런 대담한 발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어. 너와 단둘이 잘게.”

“또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또?

샤를로즈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욕심 많은 티아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샤를로즈는 뭐냐며 형식적으로 물어봤다.

“나와 언니의 방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해 줘. 언니의 계약자 루아라도.”

“티아. 그건 선을 넘는 짓이야. 루아는 내 파트너야.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파트너.”

“그럼 이 섬에 잠깐 있는 동안 루아를 우리 방 보초로 세우는 게 어때?”

“티아. 루아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너를 같이 찾아 주려고 온 거지.”

“그럼 밤에라도 단둘이 있어 줘. 낮에는 상관없으니까.”

티아는 어쩔 수 없이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샤를로즈에게 물러 터진 티아는 제게 유리한 조건을 밀어붙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언니에게 반감을 살까 봐.

언니에게 더 미움을 받을까 봐.

제 욕심에 앞서 버림 받을까 봐 무서워서.

티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샤를로즈를 응시했다.

“언니, 난 언니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뿐이야. 이런 내 마음을 받아 주면 안 될까?”

티아는 낯부끄러운 말을 하면서 눈꺼풀을 살포시 내렸다.

이 상황을 쭉 지켜보던 해리슨은 샤를로즈에 대한 엄청난 질투가 올라왔지만, 그녀는 요한을 구한 은인이었다.

참아야 했다.

이 다혈질의 성격을 죽여야 했다.

어떻게든.

해리슨은 이를 살짝 갈며 쭉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샤를로즈를 슬쩍 바라보았다.

티아가 어렵게 내뱉는 발언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것 같은 저 얼굴이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대체 샤를로즈는 무슨 생각인 건지.

해리슨은 샤를로즈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요한에게로 다가갔다.

해리슨이 조용히 요한에게로 가는 걸 본 샤를로즈의 금안이 해리슨의 움직임에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해리슨도, 요한도 티아에게는 나처럼 압박하지도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와 닿지 않습니다. 혹시 괴롭힌다는 의미일까요? 않았다. 만약 이 판도를 엎으려면.’

티아가 필요했다.

생각해 보니 퇴장은 여러 방면의 퇴장이 있었다.

진짜 연극에서 퇴장.

인간 관계에서의 퇴장.

가족들에게서의 퇴장.

기타 등등. 여러 가지 퇴장 중 샤를로즈에게 하나 번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원작 여자 주인공을 이용해 원작 게임에서의 퇴장.’

말 그대로 원작 여자 주인공, 티아를 이용해 게임 속에서 퇴장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 게임 속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길이 자신의 죽음 밖에 없을리 없었다.

이 게임 속과 현실 세계를 이어 주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런 피폐 역하렘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실세인 원작 여자 주인공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다.

원작 여자 주인공에게 붙는다면 퇴장이 굉장히 쉬워질 거라 지레짐작했다.

원작 여자 주인공, 티아가 만약에 원작 남자 주인공들에게 불만이나 화를 낸다면 그놈들은 샤를로즈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퇴장을 위한 계획을 마친 샤를로즈는 티아가 그토록 기다리던 대답을 내놓았다.

“좋아. 티아. 네 말대로 할게. 밤에는 단둘이 있을게.”

“정말? 언니, 나 밉지 않아? 내 말을 정말 따라도 괜찮겠어? 난 언니를 버렸던 사람인데…….”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 지금 현실이 중요하잖아. 넌 나를 원하고 있고. 나 역시 너를 원하고 있어.”

‘내 답답한 마음 좀 고쳐 줘.’

샤를로즈는 가슴이 꽉 막힌 것이 죽을 것 같았다.

이 섬에 온 순간부터 조금씩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지금은 무척이나 거슬릴 정도로 고통도 동반하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오랜만에 해맑게 웃으며 티아를 달래 주었다.

샤를로즈는 지금까지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허나,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제 눈앞에 이 게임 속 실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기야 3년 후에 샤를로즈는 티아에게 죽는다.

그렇기에 샤를로즈는 티아가 조금은 두려웠다.

샤를로즈는 직접 목숨을 끊는 거랑 상대방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 중 후자가 좀 더 기분이 불쾌하고 불안했다.

자신을 죽이는 상대방에 무력감을 느낄 것 같았기에.

차라리 자살 시도를 하고 말지.

누군가에게 죽기는 더더욱 싫었다.

아마 샤를로즈의 죽기 싫은 마음인 것 같았다.

샤를로즈에 빙의를 하게 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건 괜찮지만, 다른 주변인들이 저를 죽이는 일은 원하지 않고 있었다.

저를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샤를로즈는 더욱더 악독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되, 죽고 싶지 않았기에 발버둥을 친 것이었다.

이런 샤를로즈의 마음을 주인공들이 알 턱이 없었다.

불쌍한, 샤를로즈.

샤를로즈는 조금 지친 낯빛을 보이다가 티아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작게 읊조렸다.

“티아. 내게 이용당해 줘.”

“…응?”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 나를 위해 살아 줘. 서로 윈윈인 조건인데. 어때?”

“좋아. 그렇게 할게. 그럼 언니는 이제부터 나를 전적으로 믿는 거지?”

“물론이지.”

샤를로즈는 따뜻한 티아의 품에 안겨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 살랑거렸다.

티아의 두 팔이 샤를로즈의 허리를 감쌌다.

‘아, 이 느낌 꽤 좋네.’

티아는 샤를로즈에게서 풍기는 복숭아 향기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티아와 샤를로즈는 같은 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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