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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20)

62화

‘나 때문에 이안의 힘이 빠지고 있다고?’

샤를로즈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루아를 쳐다보았다.

루아 역시 이 상황이 이해하기 어려워 무어라 변명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당연했다.

루아는 이안의 몸에서 손을 뗐다.

“네 말대로 샤를로즈의 피를 마시면 악마의 힘이 사라지는구나.”

“저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아버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대답했다.

루아는 이 일이 만약에 다른 악마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꽤 일이 커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인간이 되고 싶은 악마들의 귀에 샤를로즈에 대한 이야기가 부풀어 퍼진다면 곤란했다.

샤를로즈를 어디론가 숨기지도 못하고, 애초에 그녀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으므로.

가두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아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샤를로즈, 꼭 자유를 원하나요?”

샤를로즈는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람인지라 숨통은 틔우면서 살고 싶거든요.”

“미안한 말이지만 샤를로즈, 레베크 공작저에 남아 있으면 안 될까요?”

“어째서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악마들이 이안 말고도 여럿 존재해요. 그 악마들이 샤를로즈의 피를 마시고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면 아주 큰일이 벌어질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저를 두고 쟁탈전이라도 하나요?”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죠. 아마 샤를로즈의 몸에 있는 피를 모조리 빼지 않을까 예상해요.”

“꽤 잔인한 방식이네요.”

“악마들은 샤를로즈의 몸이 아닌 샤를로즈의 피를 원하는 거니까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픽하고 웃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제 가족들 때문에 살아날걸요. 티아도 제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게 분명해요.”

“그리 가벼운 말이 아니에요. 위험해요. 샤를로즈. 저는 샤를로즈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네?”

샤를로즈는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루아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루아가 너무 걱정하니 루아 말대로 레베크 공작저에 박혀 있을게요. 대신 소문이 나지 않는다면 제 자유를 방해하지 말아요.”

“네, 꼭 그럴게요.”

“만약에 제 자유를 막는다면 제가 아끼는 루아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네, 네. 샤를로즈.”

루아는 솔직하게 말해 샤를로즈가 제 말을 들어줄지 몰랐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제 계약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심했고, 언제 죽을지 몰랐으니까.

게다가 고집도 세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제 말은 들어줘서 참으로 안심이 되었다.

“샤를로즈, 제 말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루아. 그러다가 울겠어요. 그렇게 감사할 일은 아니에요. 저도 계약자의 말을 한 번쯤은 들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매번 루아는 제 말을 들어주는데, 저는 단 한 번도 루아의 부탁을 들어준 적이 없잖아요.”

루아는 이제까지 샤를로즈를 위해 그녀의 모든 부탁과 명령을 들어줬던 자신을 대단히 여겼다.

‘다행이다.’

고작 이런 사소한 일을 대단히 여기는 루아의 모습에 샤를로즈는 조금 난감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감사할 일인가. 잘 모르겠네.’

샤를로즈는 어두운 낯빛을 하며 피곤함을 느꼈다.

“루아.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쉬어요. 피곤해요.”

“또 여동생분이 도망갈지도 모르니깐 이 옆방에서 쉬는 건 어때요?”

루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샤를로즈가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좋아요.”

“이안, 너는 꼭 우리를 따라오지 않아도 돼.”

“아뇨. 샤를로즈가 위험할 수 있으니 옆에 있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루아는 샤를로즈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싼 뒤, 티아가 머무는 옆방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새빨간 이불이 인상적인 침대가 보였다.

루아는 지쳐 보이는 샤를로즈를 이끌고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조금 쉬고 있으세요. 샤를로즈.”

“잠은 안 잘게요. 티아가 저를 찾으면 곤란하니까요.”

“괜찮아요. 피곤하면 한숨 돌려도 돼요.”

“그럼 잠깐 눈만 붙일게요.”

“네. 샤를로즈의 곁은 제가 지킬 테니 걱정 마세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안정적인 음성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이 섬에 온 후부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서 몸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죽어 심적으로도 힘겨웠다.

조금 쉬는 편도 나쁘지 않겠어.

샤를로즈는 제 곁을 지키는 루아나 이안의 인기척을 느끼며 잠시 잠에 빠졌다.

긴장이 풀리니 잠이 절로 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봐. 피곤함에 금방 잠이 오는 걸 보면.’

샤를로즈는 꿈나라에 빠졌고, 그런 그녀를 지키던 루아는 그녀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주변의 경계를 강화했다.

제 계약자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 저를 구원한 자를 지키기 위해서.

***

샤를로즈의 옆방에서는 아직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바로 요한의 저주 때문이었는데.

해리슨은 요한을 침대에 눕혔다.

“아아악!”

요한은 티아의 손길이 떨어지자마자 비명을 질러 대며 고통스러워했다.

요한의 붉은색 눈동자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주가 온몸에 잔뜩 퍼졌다는 증거였다.

거실에서 층계를 밟아 티아가 묵는 방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의 손길을 잠깐 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티아는 고통스러워하는 요한을 보자 샤를로즈의 죽음이 겹쳐 보였다.

잠깐 사이에 트라우마라도 생긴 모양인지 티아는 요한의 몸부림이 샤를로즈의 죽음과 비슷하게 보였다.

‘아니야. 저건 언니가 아니야. 요한이야.’

티아는 스스로 최면을 걸어 요한을 샤를로즈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언니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금색 눈을 가진 미인이야. 요한과는 달라. 외형부터가 다르다고.’

발악하는 요한을 눈에 계속 담고 있으니 티아는 샤를로즈가 계속 겹쳐 보여 미칠 지경이었다.

아까 거실에서는 괜찮았는데, 지금 왜 이러는 걸까.

티아는 몸이 파르르 떨리며 차마 요한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해리슨은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요한을 보다가 티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티아, 이러다가 요한이 죽겠어.”

“…….”

“티아. 정신 차려.”

“폐하……. 요한이 샤를로즈 언니와 겹쳐 보여서 다가갈 수가 없어요. 이상해요.”

해리슨은 정신을 반쯤 놓은 티아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티아. 샤를로즈는 옆방에서 쉬고 있잖아. 저건 요한이야. 망할 샤를로즈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티아. 정말 요한이 죽기를 바라고 있는 거야? 샤를로즈의 죽음을 방관했다고? 물론 나도 방관했지만.”

“솔직하게 말해 당신들이 너무 미워요. 미워 죽을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나를 위해 사는 사람 같아서 안쓰러워요.”

“……동정이라도 좋아. 내가 아끼는 보좌관 요한을 살려 줘, 티아.”

해리슨은 보기 드물게 티아의 남자들 중 요한을 굉장히 아꼈다.

자신과 뜻이 잘 맞았고, 자신을 평범하게 대하는 사람은 요한밖에 없었으니까.

티아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경쟁자를 없애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친구였다.

요한과 해리슨은 서로 투닥거려도 서로를 위하는 친구였다.

해리슨은 처음으로 티아에게 애원했다.

이렇게까지 애원한 적은 없었는데.

“제발, 미워도 우리와 함께 한 정을 생각해서 요한을 살려 줘. 티아.”

“……살리고는 싶어요. 그런데 몸이 딱딱하게 굳어선 움직여지지가 않아요. 마치 샤를로즈 언니가 요한을 살리지 말라고 막는 것처럼.”

“내가 샤를로즈에게 사과하고 그 애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어차피 그 애와 약속도 했어. 널 찾아만 준다면 뭐든 들어주기로.”

“그런 약속을 왜 했어요? 그럼 언니는 분명 저희 레베크 가문에서 나갈 것이 뻔한데.”

“너를 찾고 싶었어. 나랑 요한 말고도 나머지 두 명도 널 애타게 찾고 있어. 지금도 네 생각에 빠져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니깐 왜 다들 제게 집착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 당신들을 구해 준 것뿐이에요. 그저 당신들과 친구가 된 것뿐인데.”

“네 따스함에 중독되어서 그래.”

“우스운 일이네요. 다들 대륙에서 이름 좀 날리는 분들이면서. 한낱 공녀에게 집착하는 꼴이.”

“우스워도 좋아. 티아, 너는 우리들의 삶이자 희망이야. 그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아아아악!”

티아에게 매달리던 해리슨은 요한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꽥꽥 질러 대자 마음이 다급했다.

“티아, 요한이 불쌍하지도 않아?”

“다 알고 있다고요! 그런데도 자꾸 샤를로즈 언니가 눈에 밟히니까.”

벌컥!

잠잠하기만 했던 방문이 거칠게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곳엔 샤를로즈가 피곤한 낯짝으로 서 있었다.

“티아. 요한의 비명 때문에 한숨도 못 잘 것 같거든? 제발 어떻게든 해 봐. 이러다가 내가 답답해서 죽겠어.”

“…언니?”

샤를로즈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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