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20)

59화

잘 봐 봐. 하늘에서 보고 있을 샤를로즈.

네가 그렇게 노력해서 만든 결과물이 고작 이거야.

짜증 나지 않니?

김단은 자신이 샤를로즈에 빙의되었다는 걸 가끔 잊어버리곤 했다.

현실과 게임에서의 경계가 흐렸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기억하고 있지만, 몸은 샤를로즈였다.

꼭 누군가가 괴상하게 조립한 캐릭터 같았다.

인형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랄까.

샤를로즈는 큭큭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티아. 네가 알고 있는 샤를로즈는 여기에 없어. 잘 기억해 봐. 샤를로즈가 무슨 습관이 있고,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원래는 엘부터 조지려고 했지만, 티아 먼저 현실을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야지 또 죽을 때 자신을 살리지 않지.

진짜 샤를로즈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이 몸을 살리지 않겠지.

라고 김단은 생각했다.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그래서 티아를 더 닦달했다.

“어서 대답을 해 보렴. 티아. 내가 과연 진짜일까, 가짜일까?”

“언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가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 언니는 언니야.”

“그러니깐 티아. 네가 이 애한테 미움을 받은 거야.”

“……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언니. 왜 그래? 혹시 죽었다가 살아나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런 부작용 따윈 없어. 티아. 내 정신은 아주 멀쩡해.”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나는 가짜야. 네가 생각하는 진짜가 아니라.”

“외형부터가 샤를로즈 언니인데.”

“티아. 너 샤를로즈를 좋아한다는 말 거짓말이지?”

아니면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의 속이 바뀌었는데 모를 수가 있어?

“아냐, 나는 샤를로즈 언니를 가장 좋아해. 내가 언니를 모를 수가 없어. 헤어져 있는 상태에도 언니를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는걸.”

그렇게 소중하다면서 왜 버렸니. 티아.

조금이라도 잡고 있지.

왜 그런 지옥에 샤를로즈 혼자 두고 떠난 거야.

좋아한다면서.

아낀다면서.

다 거짓말.

샤를로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티아에게 선을 그었다.

“넌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여동생이야. 그러니 다음번에 내가 죽는다 해도 날 살리지 마. 그게 네 벌이야.”

“언니. 나는 언니랑 잘 되고 싶어. 같이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고! 뭐가 문제야? 난 언니만 보면 가슴이 미어지고 힘이 들어.”

“그럼 나를 놓아줘. 티아. 내게서 도망간 것처럼.”

“싫어. 언니가 그랬잖아. 계속 언니 옆에 있으라고. 나, 그래서 생각 많이 했거든? 이제부터 난 언니 옆에 떨어지지 않을 거야.”

티아는 샤를로즈의 앞을 여전히 막으며 원작 남자 주인공들이 들으면 화가 날 만한 발언들을 서슴없이 했다.

샤를로즈는 한숨을 내쉬며 티아의 오른쪽 어깨를 붙잡았다.

“티아. 언니한테는 고집을 굽힐 줄도 알아야지.”

샤를로즈는 엘이 다시 어둠을 스멀스멀 꺼내는 걸 보았다.

분명히 티아를 공격할 거야.

샤를로즈는 그 어둠의 형체가 티아를 향해 빠르게 다가올 때, 티아의 오른쪽 어깨를 잡은 손을 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티아가 샤를로즈의 무식한 힘에 뒤로 넘어졌다.

“그러니깐 주변 좀 잘 살펴, 티아.”

푹.

샤를로즈는 어둠을 정면으로 맞섰다.

악의 기운만 많을 뿐이지 할 수 있는 게 없는 샤를로즈는 어둠의 칼날을 등에 맞아 버렸다.

“쿨럭!”

또다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이 섬에 들어와서 몇 번이나 죽는 건지.

샤를로즈는 이 고통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미간만 살짝 찌푸리고 말 뿐이었다.

티아는 언니가 또 죽어 가는 모습에 넋을 놓았다.

‘언니가 또다시 나를 위해 죽었어. 바보처럼 언니와 말다툼을 하다가.’

티아는 또다시 생기를 잃어 가는 샤를로즈를 보며 두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티아는 또 어머니의 유언장을 쓰려고 했다.

“티, 아. 이번에는 제발 나를 죽여 줘.”

그러나 제 귀에 들려오는 샤를로즈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머니의 유언장을 쓰려던 것을 멈추었다.

티아는 눈물이 잔뜩 고인 푸른색 눈으로 샤를로즈를 보며 속삭였다.

“언니, 왜 자꾸 죽으려고 해? 왜 자꾸 이 세상에서 떠나려고 해? 응?”

티아는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죽으려고 그러니 미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을까.

티아는 샤를로즈를 껴안으며 신성력을 배출했다.

엘은 평소보다 더 큰 신성력을 느꼈다.

‘설마, 각성?’

성녀로서의 각성은 다양하게 발현된다.

예를 들자면, 지금 같은 상황처럼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클 때.

주로 이럴 때 성녀로서 각성을 많이 했다.

엘은 진정한 성녀가 되어 버린 티아에게 허탈함을 느꼈다.

그렇게 성녀로 만들기 위해서 이 병자들의 섬에 데려온 자신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성녀로서의 각성은 병자들을 치료할 때도 자주 나타났기에 티아가 이곳에서 병자들을 치료함으로써 성녀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왜냐하면, 제물 중에서도 성녀는 특별한 제물이었고 레나와 평생 살 수 있을 정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엘은 천 년 동안 살면서 성녀라는 제물을 얻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녀를 납치하거나 성녀를 꾀기에는 자신이 너무 타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녀를 보호하는 신전의 보호막도 강력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망간 성녀의 정보를 입수했고, 그 도망간 성녀가 있는 곳이 레베크 공작저라는 걸 알게 된 엘은 하녀로서 잠입했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티아였다.

사실 샤를로즈 쪽도 유심히 관찰했지만, 신성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듣자 하니 레베크 공작저에 전례없는 입양아라고 했다.

그렇게 샤를로즈가 성녀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배제하니 티아만이 남았다.

엘은 티아가 성녀의 딸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신성력이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흑주술사로 천 년을 살다 보니 인간에게 감도는 기운이 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티아를 제 편으로 만들고 성녀로서의 각성을 위해 다른 이들이 절대 추적할 수 없는 병자들의 섬에 가두었다.

이곳에 와서 불쌍한 병자들을 보고 이 섬에 있는 병자들을 모조리 치료하겠다는 티아의 결심에 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티아의 성녀 각성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고.

하지만 몇 달간 성과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 각성이 샤를로즈를 죽임으로 나오니 허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샤를로즈를 계속 죽였지.

엘은 방대한 신성력을 느끼며 조금은 희열감이 들었다.

드디어 특별한 제물이 눈앞에 생겼다.

드디어 레나를 평생 살아갈 수 있게끔 할 강한 생명력이 눈앞에 있다.

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티아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배에 엄청난 고통을 느낀 엘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흑주술사는 언제나 봐도 역겹군.”

바로 샤를로즈의 위치를 추적해 엘의 그림자로 들어온 루아가 엘의 배에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다.

단, 한 손으로 말이다.

엘은 미친 듯한 고통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안, 안 돼!!”

엘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듯 발악을 해 보았지만, 대악마 루아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시간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샤를로즈는 위협하면 안 됐어. 아니지, 샤를로즈를 위협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내 손에 죽었어.”

루아는 엘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그녀의 숨통을 아예 끊기 위해 흑주술사의 생명력이라 불리는 어두운 심장을 배 안에서 꺼냈다.

흑주술사는 특이하게도 인간과 다른 구조를 가졌다.

인간이 살기 위해 뛰는 붉은 심장은 새까만 흑색이었고, 가슴에 위치한 심장은 배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흑주술사 심장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던 루아는 그걸 노리고 긴 손톱으로 엘의 배를 관통한 것이었다.

“다음 생에는 악마를 흉내 내지 짓은 하지 말도록.”

루아는 그 말을 하며 엘의 새까만 심장을 터트렸다.

주변에 새까만 피가 튀겼다.

루아는 손에 튀긴 피를 털어 내며 샤를로즈에게 다가갔다.

“샤를로즈, 제가 왔어요. 이 루아가 왔어요.”

“언니는 지금 잠들었어요. 제힘으로 잠들게 했거든요.”

금발이 묻어나던 티아의 머리카락은 점점 은백색으로 변해 갔고,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는 조금 붉게 변했다.

루아는 티아의 모습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성녀로서 완전한 각성을 한 모양이군.

루아는 티아를 내려다보다가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샤를로즈를 안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건들지 마세요. 아직 치료 중이니까요.”

“성녀로서 완벽한 각성을 한 게 아닌가요?”

“각성은 했지만, 아직은 신성력이 미흡해요. 언니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할 만한 신성력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티아는 샤를로즈의 배에 손을 올리며 계속해서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언니, 이제 고통은 사라질 거야. 다음에 일어날 때는 나를 보고 꼭 웃어 줘.”

티아는 샤를로즈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의 그림자가 무너졌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