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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120)

57화

“넌 나를 위해서라도 샤를로즈 언니를 죽여서는 안 됐어. 엘.”

티아의 맑고 투명했던 푸른색 눈동자에 독기가 올라왔다.

착한 사람인 줄 알았던 엘이 제가 사랑하는 샤를로즈를 죽였으니 이만한 배신감은 또 없을 것이다.

“샤를로즈 아가씨를 죽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계속 죽여 달라고 애원하니 어쩔 수 없이 죽였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죽이면 어떡해. 샤를로즈 언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엘, 넌 내 편이 아니었어?”

“……솔직하게 말해서는 티아 아가씨는 제가 만난 제물 중 최상급 제물이에요. 그 이유 때문에 아가씨에게 잘해 드린 것뿐이고요. 제게 있어 편이라면 전 제 여동생 편이에요.”

“나를 희생해 네 여동생을 살린다고 해도 그 애가 과연 행복할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를 제물로 바쳐 그 애를 살리면 그 애가 널 보며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네. 널 보며 방긋 웃을까? 아니면 화를 낼까.”

“티아 아가씨는 레나에 대해 알 리 없잖아요.”

“그냥 감으로 추측해 봤어. 내가 만약 내가 죽은 네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해.”

“레나는 다시 살아나면 늘 울었어요. 미안하다고. 그렇게 착한 애가 티아 아가씨와 비슷한 마음을 가질 리 없어요.”

“있잖아, 사람은 선천적으로 착한 사람은 없어. 다 만들어진 이미지야. 나도 그렇거든.”

“하지만 티아 아가씨는 신성한 기운이 많고, 악의 기운은 전혀 없으신 최고의 제물이에요. 천 년을 살면서 이런 인간을 처음 봐요.”

엘은 티아의 신성함에 감탄을 연발하며 환히 웃었다.

티아를 제물로 바치면 레나와 평생 행복하게 둘이서 살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티아는 정신 나간 엘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 엘의 언행에 기분이 확 상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구원해 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들 안타까워 보여서 구해 줬을 뿐인데 다들 내게 사랑을 원해. 오라버니들도 마찬가지야. 나를 티아로 본 적이 없어. 다들 착하고 예쁘고 다정한 애로밖에 보지 않아.’

샤를로즈 언니만이 자신을 티아로 봤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숨통을 트여 준 샤를로즈가 비참하게 죽은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숨이 턱 막혀. 언니가 보고 싶어.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까.’

티아는 아직도 환희에 잠겨 있는 엘을 슬쩍 보았다.

‘나도 엘처럼 흑주술사였으면 언니를 살릴 수 있었을까.’

티아는 자신이 미친 생각을 하자 고개를 살살 저었다.

언니에 대한 감정이 점점 광기로 변하고 있어.

티아는 제 몸 안에 있는 순수한 마음이 탁해지는 걸 느꼈다.

‘내 신성력으로 언니를 살릴 수 없는 걸까.’

그러다가 티아의 머릿속을 반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머니의 유언장.’

잠깐만, 이거라면 언니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제 분명히 제 앞에서 심장에 칼을 꽂고 죽은 샤를로즈가 제게 유언장을 가지고 언니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비니 샤를로즈가 살아 돌아왔다.

‘어머니의 유언장이라면, 언니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티아는 다시 엘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엘에게 처연한 연기를 했다.

자신은 연기에 꽤 소질이 있었다.

특히 불쌍한 연기에는.

“엘. 나 갑자기 마지막으로 샤를로즈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졌어. 한 번만 더 네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환하게 웃고 있던 엘이 티아의 부탁에 올린 입가를 쓱 내렸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듯.

“티아 아가씨. 두 번은 없어요.”

“그럼 여기서 나도 샤를로즈 언니를 따라 죽을래.”

티아는 품에 숨겨 놓은 단검을 들어 목에 찌르는 시늉을 했다.

“…윽, 왜 자꾸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티아 아가씨!”

“우리 서로 윈윈하자고. 난 언니를 마지막으로 보고 죽고, 넌 내 죽음으로써 네 여동생을 살리고, 어때?”

“이미 전 티아 아가씨의 소원을 들어줬어요. 또 들어줘야 하나요?”

“지금 내가 죽어 버리면 넌 어디 가서 또 나 같은 최상급 제물을 찾을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봐. 난 그저 언니를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을 뿐이야. 너도 여동생이 있으니 내 마음을 잘 알 거야.”

안 그래?

티아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엘에게 매달렸다.

엘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티아는 엘의 얼굴을 보며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애원했다.

“엘. 내가 너한테 부탁 같은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응?”

엘은 티아의 끈질김에 하는 수 없이 티아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다.

제가 아끼는 레나의 비슷한 얼굴로 그렇게 매달리면.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엘은 한숨을 거듭 내쉬며 제 그림자를 펼쳤다.

“알았어요. 대신 진짜 마지막이에요.”

“응.”

엘은 티아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티아는 엘이 있는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어두운 그림자가 티아와 엘을 집어삼켰다.

***

티아는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보이는 건, 바닥에 싸늘히 죽어 있는 샤를로즈와 어둠에 묶여 있는 해리슨과 요한이었다.

해리슨과 요한은 다시 자신들을 보기 위해 티아가 온 것이라며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티아가 자신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오로지 죽은 샤를로즈만을 응시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해리슨은 티아를 향해 소리쳤다.

“티아! 나를 구해 주러 왔구나!”

티아는 해리슨의 외침을 싸늘하게 무시했다.

이에 요한 역시 외쳤다.

“티아! 나를 또다시 내 저주를 풀어 주러 온 거지?”

티아는 요한의 외침도 무시했다.

아니, 둘의 목소리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티아의 시선은 오로지 죽은 샤를로즈에 고정되어 있었다.

티아의 몸 역시 샤를로즈에게로 움직였다.

‘언니, 나 언니를 살리러 왔어.’

티아는 샤를로즈가 품에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유언장을 떠올리며 샤를로즈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티아는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다음 샤를로즈를 껴안는 척 샤를로즈의 품에 안전히 보관되어 있는 어머니의 유언장을 몰래 빼냈다.

티아의 이런 꼼수를 본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 그림자의 주인인 엘조차도.

그만큼 티아의 손을 빨랐다.

‘언니, 제발 일어나 줘.’

티아는 유언장을 구겨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손안에 어머니의 유언장을 감추었다.

“티아 아가씨. 샤를로즈 아가씨는 다 보셨어요?”

“아직. 잠깐만.”

“1분 드릴게요. 얼른 샤를로즈 아가씨와 작별 인사를 고하세요.”

“응.”

티아는 제 손에 쥐어진 어머니의 유언장을 다시금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엘은 59초부터 초를 세고 있었다.

티아에게 딱 1분이라는 시간을 주었기에 1분을 일일이 세고 있는 것이었다.

“58초, 57초…… 30초.”

점점 초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티아는 샤를로즈를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감이 들어 소원을 빌어야 하는데 자꾸 머뭇거리게 되었다.

“언니를……. 하.”

“티아 아가씨 30초도 안 남았어요. 얼른 샤를로즈 아가씨를 실컷 보세요.”

“27초.”

“어머니, 제발 샤를로즈 언니를 살려 주세요. 부탁이에요.”

드디어 티아의 소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유언장을 쥔 티아의 오른손이 새하얀 빛을 냈다.

엘은 갑작스러운 새하얀 빛에 당황했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성스러운 빛은 처음 봐.

엘은 그 새하얀 빛에 놀라 토끼 눈을 했다.

해리슨과 요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티아의 손에 빛이 나는 저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티아도 쓸 줄 아는 건가. 저 유언장의 힘을.’

해리슨은 티아가 너무 착해서 탈이라며.

자신을 미친 듯이 괴롭힌 언니를 살릴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티아가 성스러워 보였다.

모든 죄를 용서해 주는 성녀로 보였다.

해리슨뿐만 아니라 요한도 해리슨의 마음과 같았다.

자신이 만약 티아 본인이라면 죽은 샤를로즈를 보며 깔깔대며 웃을 것이다.

나쁜 언니를 퇴치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그랬을 텐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못된 언니를 살리는 착한 여동생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요한은 티아가 안타까웠다.

대체 샤를로즈에게 어떠한 협박을 받고 있길래 저런 짓을 벌이는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티아는 샤를로즈를 이성적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첫사랑이었다.

죽은 첫사랑을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쿨럭!”

샤를로즈의 핏기 없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검붉은 핏덩이를 내뱉었다. 곧이어 숱 많은 검은색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샤를로즈의 아름다운 금색 눈에 생기가 맴돌았다.

티아는 살아 돌아온 샤를로즈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흑흑, 언니. 정말 살아났어.”

샤를로즈는 제 옆에서 칭얼거리며 우는 티아를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티아의 손에 쥔 어머니의 유언장을 발견했다.

‘망할. 너까지 나를 살리는 거야?’

어차피 자신은 3년 후 죽어야 할 악역이었다.

게다가 원작 여자 주인공이 역하렘 게임 속 유일한 악역을 살리다니.

이런 개 같은 전개가 어디 있어.

샤를로즈는 작게 한탄했다.

이 망할 게임 속에서 또 어떻게 퇴장해야 하는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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