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티아는 울음을 꾹 참으며 해리슨과 요한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왜, 왜 샤를로즈 언니가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냐고요!”
티아의 이런 모습이 낯선 해리슨과 요한은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언니, 언니!”
티아는 숨을 쉬지 않는 샤를로즈를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언니. 아직 못다 한 말이 잔뜩 남았는데…… 이대로 죽으면 안 돼.”
티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샤를로즈의 창백한 뺨을 감쌌다.
해리슨과 요한은 티아의 이런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티아가 집을 나간 건 다 저 못된 언니, 샤를로즈 때문이 아니었던가.
왜 티아가 샤를로즈를 굉장히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두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침묵을 유지하던 해리슨과 요한 중 요한이 먼저 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티아. 샤를로즈가 밉지 않아?”
“……밉지 않아요. 저는 언니를 좋아해요. 굉장히.”
요한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티아에게 더 물으려고 했지만, 엘이 티아의 팔을 붙잡았다.
“티아 아가씨. 약속은 지키셔야죠.”
“아직 붉은색 보름달이 뜨지 않았잖아.”
“도망가실 수 있으니깐 제 옆에 붙어 있어 주세요.”
티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샤를로즈의 말을 거의 그대로 전하는 엘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도 샤를로즈 언니랑 똑같은 말을 하네. 이상하게.”
“샤를로즈 아가씨도 저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응.”
“샤를로즈 아가씨는 끝까지 자신 생각뿐이었네요. 도망가지 말고 제 옆에 있으라는 말을 하다니. 나쁜 언니네요.”
“언니는 나쁘지 않아. 나쁜 건 오히려 나야.”
“어째서요? 티아 아가씨는 선심이 곱고 상대방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잖아요.”
“엘.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야.”
“아뇨. 심성도 나쁘고 자기 생각밖에 모르는 샤를로즈 아가씨보다 훨씬 아름답고 깨끗하세요.”
“사람들에게 착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해 연기한 것뿐이야. 이기적이고 나만 알 줄 아는 건 오히려 언니보다는 나야.”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샤를로즈 아가씨를 사랑하시는 건가요?”
“사랑을 다 떠나서 그게 진실인걸.”
티아는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엘에게 힘없이 끌려갔다.
자신의 도망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언니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안고서.
“티아, 어디 가!”
“티아. 또 도망갈 거야?”
해리슨과 요한이 티아의 주눅 든 뒷모습을 보더니 뒤늦게 붙잡았다.
티아는 제 언니의 죽음을 방관한 자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엘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왔다.
“……티아.”
“설마 티아가 나를 버린 거야?”
해리슨과 요한은 티아의 냉담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입을 꾹 닫았다.
이건 마치 악몽이라며.
몇 달 만에 만난 티아가 자신들을 무시할 리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그녀가 올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예전에 자신들을 구원해 줬을 적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바보처럼.
***
뚝.
루아는 샤를로즈와 계약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통신이 끊겼다.
루아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몇 달간 샤를로즈와 통신이 끊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병자들의 섬에 있는 동안에도, 옆에 붙어 있지 않은 순간에도 통신이 끊긴 적은 없었는데.
무서운 예감이 제 마음을 뒤덮고 있었다.
아닐 거야, 그럴 일 없어.
샤를로즈가 사라질 일 없어.
분명 계약자 통신에 오류가 생긴 걸 거야.
루아는 현실을 부정했다.
계약자 사이에서 통신이 끊긴다는 건 한쪽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뜻이었기에.
-샤를로즈, 괜찮아요?
루아는 기다리라는 샤를로즈의 명령을 어기고 머릿속으로 통신을 날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샤를로즈, 샤를로즈?
루아는 적막이 흐르는 샤를로즈의 통신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샤를로즈가 죽을 리 없어. 샤를로즈, 저를 버리고 죽으면 안 되잖아요.’
이미 샤를로즈와 많은 정을 나누고, 그녀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낀 루아는 샤를로즈의 알 수 없는 죽음에 좌절했다.
샤를로즈.
게다가 샤를로즈의 위치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샤를로즈가 섬의 북쪽에 있다는 것만 파악을 하고 잠시 그녀를 감시하는 것을 느슨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별 탈 없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일단 북쪽에서 위치가 끊겼기 때문에 그곳으로 향하려는데 이안이 루아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아버지. 흑주술사의 냄새가 진동하는데요.”
“흑주술사? 아.”
계속 거북한 냄새가 흑주술사 냄새였구나.
루아는 이 섬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쾌쾌하고 역겨운 냄새를 맡았다.
그건 단지 인간 환자들에게서 나는 냄새인 줄만 알고 있었다.
천 년 동안 레베크 공작저 지하실에 봉인되어 있어 흑주술사의 지독한 냄새를 잊어버렸다.
이안은 자신과 다르게 봉인은커녕 악마 사냥꾼으로 인간들 틈에서 활동했기에 흑주술사의 냄새를 잊지 않고 있었다.
“흑주술사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야?”
“한 명이 남아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 여자라고 들었는데. 명문 흑주술사 가문의 후계자였대요.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인간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샤를로즈가 위험한 거 아니야?”
“그렇죠. 그래도 흑주술사가 인간 제물을 바치는 기준이 있잖아요.”
“그, 성스러운 인간이었던가.”
“거의 비슷해요. 착하고 악의 기운이 전혀 없는 사람을 제물로 세웠잖아요. 아버지, 천 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신가 봐요?”
“아무래도 그 망할 공작저 지하실에 천 년 동안 감금되어 있었으니 기억이 흐릿한 건 당연하지. 게다가 나는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평생 그곳에서 썩을 줄 알았는데.”
“샤를로즈가 구원해 주신 거군요.”
“맞아. 내 계약자 샤를로즈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어. 인간이면서 나를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참 신기한 인간이었어.
그러다 보니 정이 생기고 그다음에는 마음이 생기더라.
루아는 뒷이야기를 쏙 빼먹고 속내에 샤를로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사랑하지 말라는 샤를로즈의 말이 있었기에 루아는 더욱 제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샤를로즈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남은 흑주술사를 죽이러 가야겠어. 이안, 너도 날 따를 거지?”
“음. 샤를로즈의 피를 먹고 인간이 되어야 하니깐 갈게요.”
그 말을 아직도 믿고 있냐는 듯 루아는 이안을 대놓고 한심하다는 얼굴로 보았다.
눈치가 참 없는 이안은 루아의 하찮은 시선을 느껴지지 않았다.
“샤를로즈가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져 봐요.”
“북쪽에서 통신이 끊겼어. 아마 그 부근을 뒤지면 될 거야.”
“네.”
이안 역시 샤를로즈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급히 움직이는 루아의 뒤를 쫓았다.
***
티아는 멍청하게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티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삶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조금은 걱정되었다.
티아가 레나와 닮아서 그런 것인지.
왠지 모르게 티아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른 제물들은 대놓고 무시하거나 협박을 주곤 했는데.
‘티아 아가씨만은 함부로 못 하겠어.’
“티아 아가씨. 무슨 생각하세요?”
엘은 티아가 사랑하는 샤를로즈를 죽여 놓고선 뻔뻔한 낯짝으로 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티아는 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티아 아가씨. 제가 미우세요?”
엘은 심호흡을 한 뒤. 티아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티아가 고개를 돌려 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엘은 처음 보는 티아의 공허한 푸른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자 몸이 섬뜩 떨렸다.
제 여동생 레나를 보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예전에 레나도 티아처럼 이런 모습을 한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고치지 못해 곧 죽을 때였는데.
[언니. 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언니랑 영영 헤어지는 게 너무 슬프다.]
[레나. 우리는 평생 함께야. 너도 알잖아.]
[미안. 언니. 우리는 평생 함께할 수 없는 몸이야. 언니, 이제 현실을 직시해.]
자신을 놓으려는 레나의 옛날 모습이 지금 티아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엘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다시금 현실을 부정했다.
‘곧 있으면 레나, 너와 영영 함께 있을 수 있어. 망할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어. 널 괴롭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엘은 티아를 향해 소리쳤다.
“티아 아가씨. 저는 샤를로즈 아가씨가 죽여 달라고 해서 죽인 것뿐이에요. 절대로 원한이 있어서 죽인 것이 아니-.”
“닥쳐. 엘.”
티아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선 살기를 감추지 않고 엘을 위협했다.
엘은 티아의 위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늘 제게 다정하고 친절했던 티아가 저렇게 화가 잔뜩 난 모습은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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