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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120)

55화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티아의 귀에 작게 들려왔다.

티아는 사실 졸린 척 연기를 한 것이었다.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티아가 연기를 하고 있는 걸 몰랐던 엘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터벅, 터벅.

엘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게 들려왔다.

티아는 소파에 누웠던 몸을 번쩍 일으켰다.

한편 엘은 지하실 문을 닫는 걸 잊은 건지 지하실 문을 닫지 않은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

티아는 오히려 잘 되었다며 고양이 걸음으로 엘이 들어간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 안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구조였다.

티아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숨을 최대한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하실 안쪽으로 도착한 티아는 엘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티아는 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얼른 벽 뒤에 숨었다.

과연 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착한 애인지, 아니면 여자가 말했던 나쁜 애인지 판별할 때였다.

티아는 입가를 손으로 막으며 엘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레나, 드디어 널 살릴 최고의 제물을 찾았어.”

최고의 제물?

티아는 순간 여자의 말을 기억해 냈다.

분명히 제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고 하였다.

설마 여자의 말이 진짜인 거야?

조금만 더 엘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있잖아, 레나. 오늘 내 그림자 속에 세 명을 가두었어. 한 명은 황제고, 한 명은 현자라고 불리는 고귀한 자고 마지막은 내가 모시는 아가씨를 괴롭히는 언니야.”

헙!

티아는 순간 당황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다행히도 엘은 티아의 거친 숨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레나. 이번 제물로 인해 너와 평생 살아갈 수 있는 예감이 들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티아는 미간을 좁히며 귀를 쫑긋 세웠다.

“티아 아가씨는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아주 착한 사람이야. 천 년이 넘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영혼이 깨끗해. 아마 너와 잘 맞을 거야. 아, 맞아 너랑 외형도 비슷해.”

티아는 엘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엘에게 가졌던 신뢰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여자의 말이 맞았어.’

티아는 또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늘 베풀며 살아왔다.

그래야지 칭찬을 받고 사람들이 찬양하니까.

티아는 제 성격이 이기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선한 이미지를 위해 갖은 일들을 하며 많은 사람을 살려 주었다.

그런데 착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행동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엘의 도움으로 저택에서 도망 나와서도 병자들의 섬에 와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있지 않은가.

‘남을 돕는 건 좋은데,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은 없네.’

티아는 제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남을 위해 사는 제 인생을.

티아가 행복했던 적은 샤를로즈와 산책하거나 샤를로즈와 우연히 밥을 같이 먹거나 아니면 샤를로즈가 제게 관심을 두었을 때밖에 없었다.

티아는 일단 부정적인 마음을 떨쳐 내고 엘의 말에 경청했다.

“레나. 붉은색 보름달이 뜨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기다려 줘. 사랑해.”

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엘은 보고 싶었던 제 여동생을 봤으니 지하실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제 그림자 속에 일이 발생하였다.

바로 샤를로즈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다.

엘은 얼굴을 완전히 구기며 짜증을 냈다.

“샤를로즈 아가씨도 참. 그림자 속에 얌전히 있으라니깐.”

엘의 말을 들은 티아는 샤를로즈를 납치한 범인이 엘이라는 걸 알고 돌발 행동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엘의 그다음 말 때문이었는데.

“샤를로즈 아가씨도 참. 왜 자꾸 티아 아가씨 대신 죽여 달라고 발악하는 거야. 귀찮게.”

언니가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다고?

티아는 다시금 아래로부터 치솟는 분노에 엘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엘이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는 걸 보고 멈추었다.

“티아 아가씨 대신 죽는다고?”

엘은 코웃음을 치며 샤를로즈를 비아냥거렸다.

티아는 당황스러웠다. 샤를로즈 언니가 저를 위해 죽어 준다는 엘의 말에 묘한 감정이 오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건 보기 싫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죽어 줄 수 있다는 샤를로즈의 행동은 감동적이었다.

‘언니가 목숨까지 내던질 정도로 나를 생각해 주고 있구나.’

기분 좋은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티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샤를로즈가 저런 반응을 보이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티아는 엘에게 덤벼드는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그 순간, 엘의 싸늘한 어조가 지하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샤를로즈 아가씨. 죽여 드릴게요.”

티아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엘을 덮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티아의 인기척을 감지한 엘은 가볍게 티아의 공격을 피했다.

“티아 아가씨. 이런 중요한 일은 나중에 알려 드리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티아 아가씨가 샤를로즈 아가씨를 아끼는 만큼 저도 제가 아끼는 제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험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샤를로즈 언니를 죽였어?”

티아는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로 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엘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네.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길래 죽였어요.”

“너…!”

“샤를로즈 아가씨는 제게 있어 위험한 존재거든요.”

티아는 얼굴을 굳혔다.

“언니와 너와 맞지 않아서?”

“뭐, 그런 셈이죠. 제게 위협되는 인물들은 빨리 죽이는 편이 낫거든요.”

티아는 엘의 서슴없이 나오는 발언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남긴 신성력이 깃든 유언장도 언니가 가지고 있었다.

그 유언장은 오로지 레베크 혈통인 자만이 쓸 수 있었다.

티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언니가 죽다니, 죽다니!

티아의 푸르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엘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참, 저는 티아 아가씨를 제물이 되기 전까지는 해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살기는 그만 풍기세요.”

“너도 네 여동생을 잃은 마음처럼 나도 내가 사랑하는 언니를 잃은 마음에 미칠 것 같아.”

“샤를로즈 아가씨는 티아 아가씨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어요. 이만한 자매의 우애가 어딨겠어요.”

“넌 그저 샤를로즈 언니가 위협적이니까 죽인 것뿐이잖아. 언니에게 꾀를 부려서.”

“맞는 말이긴 해요. 하지만 자꾸 죽여 달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신경이 쓰여서요. 그래서 죽였어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악역을 없앤 것뿐인데 뭐가 문제죠? 아. 티아 아가씨께서 샤를로즈 아가씨를 사랑하니깐 화를 내는 건가요?”

티아는 엘의 물음에 마음이 찔끔 찔렸지만, 엘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내린 명령이 벌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샤를로즈 언니가 있는 곳으로 나도 데려가 줘.”

“그건 안 돼요. 티아 아가씨는 그런 어둠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거든요.”

“내 목숨을 기꺼이 내어 줄 테니 샤를로즈 언니가 있는 곳으로 보내 줘. 주인으로서 명령이야. 엘.”

티아는 섬뜩한 표정을 하며 엘에게 협박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엘이 아니었다.

“티아 아가씨, 그런 표정을 지어도 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잖아요.”

“그래도 내 인생에 샤를로즈 언니가 없어서는 안 된단 말이야!”

“저는 최고의 흑주술사에요. 티아 아가씨. 반항은 이쯤에서 하시죠.”

“그렇다면 난 언니를 따라 죽을 거야.”

티아는 주머니에 들고 다니는 단도를 꺼내 들었다.

이 단도는 아주 예전에 샤를로즈가 처음으로 티아에게 선물을 준 아주 특별한 무기였다.

티아는 제 목에 단검을 가볍게 찔러 넣었다.

티아는 고통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자매끼리 쌍으로 미쳤네.

엘은 어이없는 실소를 내뱉었다.

“샤를로즈 언니가 있는 곳으로 보내 줘, 그렇지 않으면 언니를 따라 죽을 거야.”

푹.

티아가 제 목에 단검을 살짝 가져다 대자 둥근 핏덩이가 올라왔다.

엘은 이러다가 진짜로 귀중한 제물이 허무하게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엘은 티아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엘은 티아를 어둠으로 속박한 뒤 제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

엘의 그림자 속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해리슨과 요한, 그리고 죽어 버린 샤를로즈.

티아는 샤를로즈에게로 다가가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언니. 죽으면 안 돼. 응?”

해리슨과 요한은 티아의 옥이 굴러가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자 크게 반응했다.

해리슨은 티아가 괜찮은 모습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요한 역시 해리슨과 마찬가지였다.

“티아. 우리도 있어.”

해리슨이 티아에게 말을 걸자 그녀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은 샤를로즈였다.

샤를로즈의 심장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본 티아는 경악했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면 어떡해, 언니.’

티아는 세상을 모두 잃은 기분에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샤를로즈 언니가 죽는 동안 폐하와 요한은 가만히 구경이라도 한 것인지 샤를로즈의 죽음에 무신경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티아가 폭발했다.

“폐하, 요한. 대체 왜 언니를 죽게 가만히 뒀나요?”

티아의 차갑고 날 선 음성에 증오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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