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20)

53화

엘은 빠르게 두뇌를 돌렸다.

샤를로즈가 정신이 나가서 대악마와 계약한 건가.

아니면 레베크 공작저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선대 공작 부인이 악마와 계약했으니 자신도 소문을 따라가려는 걸까.

일반 인간이라면 악마를 피하고 악마를 멸시해야지 정상이었다.

게다가 흑주술사는 악마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즉, 악마의 복제품이란 뜻이다.

진짜 악마의 힘이 아닌, 가짜 악마의 힘.

그래서 흑주술사는 악마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마주하게 된다면 죽을 것이 뻔하니깐.

악마들은 악마를 따라 하려는 인간.

흑주술사들을 무척이나 경멸했다.

너희 같은 인간은 절대로 악마가 될 수 없다며 말이다.

악마들은 흑주술사들을 사냥하는데 맛을 들였고, 결국 남은 흑주술사는 엘, 하나였다.

제 여동생도 흑주술사인데 악마한테 걸려 비참하게 죽어 버렸다.

흑주술사 가문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가여운 동생인데.

엘이 기적적으로 흑주술사로 살아남은 건 대악마가 봉인되었을 때였다.

그때, 악마들이 대다수가 동면에 들어가 아무런 쪽도 쓰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악마의 힘을 이용해 반 불로불사로 살던 엘은 여동생 레나를 살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당시에는 저를 위협하는 악마들이 거의 없었으므로.

하여 레나를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던 중, 선한 인간을 제물로 바치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는 고대의 흑주술법을 읽게 되었다.

그 고대의 흑주술에는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엘은 그 고대의 흑주술법을 흥미롭게 읽은 나머지 실행에 앞섰다.

진짜 이게 되나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제물이 필요했다.

그 첫 번째 제물은 바로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마을에서 아주 착한 이웃집 소녀였다.

그 여자애는 자신이 판 함정에 빠졌음에도 원망도 하지 않고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내 인생은 재미없었거든. 네 동생을 살리려면 나를 죽여도 돼.]

인간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언행과 행동을 했다.

마치 이 삶이 지루하다는 듯.

그 여자애가 갑자기 떠오른 건 바로 샤를로즈 때문이었다.

샤를로즈 또한 악마로 자신을 죽일 수 있으면서 자기가 죽기를 바랐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반인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엘은 레나를 위해 죽을 수 없었다.

결국, 엘은 샤를로즈를 죽이기로 했다.

자신도 원하고 있었으니.

“샤를로즈 아가씨. 죽여 드릴게요.”

어차피 레나를 위한 제물이 될 수는 없지만, 위협적인 존재는 빨리 없애는 편이 백배 천배 나았다.

엘은 그림자 어둠을 검으로 만든 뒤, 샤를로즈를 속박한 어둠에게 각각 팔과 다리를 붙잡게 했다.

어둠에 묶여 있던 해리슨과 요한은 샤를로즈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샤를로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아를 대신해 죽는다는데 말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은 샤를로즈가 아닌 티아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샤를로즈는 슬쩍 해리슨과 요한의 반응을 보았다.

‘내가 티아였다면 과연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보고만 있었을까.’

샤를로즈는 유일한 악역의 입장이 거지 같다며 속으로 욕했다.

‘빌어먹을.’

죽음은 고통스러웠다.

심장에 칼을 꽂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다시 느껴야 했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제 악역에서 퇴장할 수 있다.

조금 행복했다.

샤를로즈는 제 심장에 확 꽂히는 새까만 검을 보며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쿨럭!”

“샤를로즈!”

해리슨은 샤를로즈가 죽어 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생기 하나 없이 어두운 샤를로즈의 금색 눈동자가 해리슨을 향해 스르륵 움직였다.

해리슨은 샤를로즈의 시선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왜 샤를로즈의 이름을 부른 거지? 왜?’

그냥 죽게 내버려 두면 되잖아.

해리슨은 샤를로즈를 향한 알 수 없는 이 비틀린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 가져간 건 티아였다.

결코 샤를로즈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불쾌한 감정은 뭘까.

저렇게 죽고 싶어 하는 샤를로즈를 뒤늦게 잡고 싶은 이 감정은 대체 뭐야.

해리슨의 숱 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이 감정.

하지만 제 눈앞에 영영 사라진다면 미칠 것 같은 이 기분.

‘설마 내가 지금 샤를로즈가 죽을까 봐 겁내고 있는 거야? 샤를로즈가 죽는 걸 아무렇지 않아 했던 내가?’

해리슨의 머리와 마음이 쿵, 하고 충돌했다.

해리슨은 다시금 샤를로즈를 봤다.

샤를로즈의 죽어 가는 금안이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샤를로즈가 무어라 입 모양을 냈다.

해리슨은 샤를로즈가 한 입 모양을 소리 없이 따라 했다.

‘저를 살리지 마세요. 제발.’

해리슨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띵해졌다.

샤를로즈의 유언에.

해리슨은 결국 자신의 비틀린 감정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이래야지, 티아를 살릴 수 있으니까.

티아를 데리고 돌아가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악역, 샤를로즈였다.

모든 사람에게 원망과 눈총을 한 번에 받은 유일한 악역.

샤를로즈 레베크.

해리슨은 샤를로즈의 죽어 가는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이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엘은 의문감이 들었다.

‘샤를로즈 아가씨를 폐하께서 왜 저렇게 안타깝게 보실까. 마치 보낼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자자한 두 사람인데.

오히려 요한의 반응이 정상이었다.

티아를 괴롭히는 나쁜 언니 샤를로즈의 죽음에 무덤덤해야 했다.

그들은 사이가 안 좋다 못해 경멸한다는 말이 제국 전체에 돌았다.

‘설마 폐하께서 티아 아가씨에서 샤를로즈 아가씨에게 갈아탄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엘은 샤를로즈의 숨이 멎어 감을 느끼고 샤를로즈의 심장에 꽂았던 어둠으로 만든 검을 빼냈다.

그러자 샤를로즈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엘은 이 잔인한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샤를로즈의 심장을 한 번 더 찔러 넣었다.

한 번 더 찔러 넣는 동안 샤를로즈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 냈다.

엘은 샤를로즈가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고통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살려 달라고 난리 치고도 남았을 텐데.

정말 대단하네요.

샤를로즈 아가씨.

그 죽음으로써 절대로 돌아오지 마세요.

저와 제 여동생을 위해.

아니, 아가씨의 여동생 티아를 위해서.

하여 샤를로즈는 드디어 제대로 된 죽음을 맛보았다.

‘드디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다.’

샤를로즈는 서서히 고통이 느껴지지 않음에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이 망할 역하렘 게임 속에서 드디어 퇴장한다고.

드디어.

그렇게 샤를로즈는 죽었다.

씁쓸하게.

***

김단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익숙한 천장을 확인했다.

‘내 방이네.’

돌아왔어.

드디어.

그 게임 속에서 퇴장한 거야.

탈출한 거라고.

김단은 희미하게 웃으며 제 손에 붙든 네모난 스마트폰을 힐끗 보았다.

지금 몇 시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지?

게임 속에서는 몇 달이 흘렀는데.

현실도 마찬가지로 몇 달이 흘렀으려나.

아, 아르바이트는 어떡하지?

짤렸겠지?

김단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됐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이랑 날짜를 확인하자.

스마트폰의 홀드 버튼을 눌렀다.

배터리가 아예 나가지 않은 것인지 스마트폰 화면이 켜졌다.

그리고 시간과 날짜를 곧바로 확인했다.

“이게 뭐야?”

새벽 1시 30분.

2022년 12월 24일.

그 게임에 빙의하고 나서 시간과 날짜가 제대로 흐르지 않은 것이다.

김단은 멘붕이 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분명히 게임 속에서는 몇 달이 흘렀는데.

현실 세계의 시간은 게임 속 시간과 같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게임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현실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게 말이 돼?

김단은 황급히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들고 자신이 빙의한 피폐 역하렘 게임.

그 게임의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김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바로 샤를로즈에 관한 글이었다.

샤를로즈살려내: 애들아. 내 최애 샤를로즈가 죽었어. XX.

ㄴ 피폐맛집: 원래 죽는 설정이잖아.

ㄴ 샤를로즈살려내: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샤를로즈 일러 보려고 게임을 초기화하고 다시 시작했거든? 근데 샤를로즈가 이상해.

ㄴ 피폐맛집: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궁금하네.

ㄴ 샤를로즈살려내: 그냥 죽고 싶어 환장한 것 같이 행동하는데…처음 게임 할 때는 악역 영애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죽고 싶어 미친 캐릭터 같이 느껴져서 이질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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