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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20)

52화

샤를로즈는 제 몸을 휘감고 있는 어둠을 내려보며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이런 건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

원작 여자 주인공 찾아 헤매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샤를로즈는 제 팔자가 좋은 팔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조금 우울해졌다.

김단은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한 후부터 무력감과 우울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끝은 어두웠다.

샤를로즈는 한숨을 거듭 내쉬며 해리슨과 요한을 보기 위해 고개를 치켜세웠다.

“폐하, 요한. 아직도 제가 싫으세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원작은 비틀만큼 비틀었다.

과연 악역에 대한 감정도 바뀌었는지 조금 궁금했다.

샤를로즈의 물음에 해리슨이 요한보다 먼저 대답을 꺼냈다.

“싫은데. 마냥 싫지는 않아졌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싫다는 거예요, 좋다는 거예요?”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아.”

“그렇군요. 지금 엘이라는 애가 저보다 더 싫죠?”

“어. 더 싫어. 이 어둠만 없다면 최고로 고통스럽게 죽여 주고 싶을 정도야.”

“엘이라는 애. 폐하한테 잘못 걸려서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그러니깐 누가 티아를 건들래?”

“그러게요. 저 말고도 티아를 이상한 쪽으로 건드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샤를로즈와 해리슨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요한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난 샤를로즈, 괜찮아. 나름.”

“요한의 대답이나 폐하의 대답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다르지. 폐하는 너를 싫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다고 했는데 나는 네가 괜찮다고 했어. 나름대로.”

“왠지 비꼬는 느낌이라 더 기분이 상하는데요.”

샤를로즈는 피식 웃으며 생기 하나 없는 금색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요한?”

샤를로즈는 현자라고 불리는 대마법사 요한이 지혜를 깨닫는 자이기에 방법이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요한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랑 계약한 그 대악마가 필요해.”

“루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그 악마의 힘이 필요해. 흑주술사를 상대하려면 아주 큰 힘이 있는 악마가 최고거든.”

“루아를 이 일에 더는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데요. 루아는 제가 굉장히 아끼는 악마라서요.”

“그럼 넌 여기서 허무하게 흑주술사에게 죽을래?”

요한의 반협박이 섞인 어조에 샤를로즈가 비뚜름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차라리 죽을래요. 저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살 생각이 없거든요.”

해리슨은 샤를로즈의 미친 대답에 어안이 벙벙했다.

“미쳤어, 샤를로즈?”

이내 윽박을 질렀다.

샤를로즈는 해리슨의 고함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원망이.

사람들이 주는 불운이.

샤를로즈는 해리슨을 완전히 무시하고 허공에 소리쳤다.

“엘! 차라리 날 죽여 줘! 내가 티아를 대신할 제물이 될게. 어때, 좋은 조건이지 않아?”

가시밭길만 놓인 악역으로 평생 살 생각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과거 티아에게 나쁘게 대한 것에 사죄도 할 겸, 현실로 돌아갈 겸.

죽는 운명을 선택했다.

샤를로즈는 그편이 마음이 편안했으니까.

샤를로즈의 몸이 완전히 죽어 버리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샤를로즈가 처한 상황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현실로.

샤를로즈로 연기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쉬고 싶다.

원작 여자 주인공도 찾았으니 다 끝난 거 아닌가.

그런 책임감 없는 생각이 샤를로즈의 새하얀 머릿속을 채워 나갔다.

샤를로즈는 대답 없는 엘의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티아 대신 내가 죽는다고! 네 죽은 여동생을 살릴 제물이 되겠다고! 그러니깐 다른 사람들은 풀어 주고 나만 데려가.”

샤를로즈의 발언에 해리슨과 요한은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리고 싶었지만 티아를 위해 대신 죽는다고 하니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죽겠다고! 네 망할 여동생을 내가 살려 주겠다고!”

계속되는 샤를로즈의 고함에 엘은 시끄러운지 결국 샤를로즈의 말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샤를로즈 아가씨.”

“티아 대신 내가 죽겠다고. 잘 안 들려?”

“샤를로즈 아가씨는 제물의 조건에 충족되지 않아서 말이죠. 제 여동생을 위해 죽겠다고 나섰는데 아쉽게 됐네요.”

“그 조건이 뭔데. 내가 지금 그 조건에 맞춰 주면 되잖아.”

“사람들에게 원망 한 번 받아 보지 않은 선한 사람이 그 조건이에요. 사람들에게 원망을 많이 산 사람은 오히려 제 여동생에게 독이 되더라고요.”

“나 지금 평판 좋은데. 방금 폐하와 요한도 내가 싫다고 하지 않았거든. 그리고 티아보다는 내가 훨씬 제물로서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도 포함되는 거예요. 샤를로즈 아가씨. 너무 비참하게 굴지 마세요.”

“비참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죽고 싶다고.”

“죽길 원한다면 혀라도 깨물고 죽으세요.”

“그런 걸로 죽었으면 난 진작에 죽었어.”

샤를로즈는 레베크 공작가의 일원이 없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최고의 기회를 그냥 통째로 날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나 꽤 네게 위협적인 존재야. 네 흑주술을 대적할 만한 대악마도 데리고 있거든.”

샤를로즈는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엘을 도발했다.

샤를로즈는 사람들을 도발하는 일을 잘했다.

지금처럼.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샤를로즈 아가씨.”

“넌 귓구멍이 막혔니. 그럼 다시 말해 줄게. 너를 위협할 대악마를 내가 데리고 있다고.”

샤를로즈는 요한이 알려준 방법을 이렇게 쓰고 있었다.

요한은 샤를로즈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나가려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죽으려고 사용하는 샤를로즈를 보자니 속이 답답했다.

‘왜 자꾸 쟤는 죽으려고 하는 거야. 죽는 게 좋은 건가.’

요한은 샤를로즈의 행동을 머리로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해리슨도 마찬가지였다.

샤를로즈의 저 요망한 입을 어떻게든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둠에 속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러든 말든 샤를로즈는 계속 엘을 자극하였다.

“샤를로즈 아가씨. 자꾸 제게 덤벼드는 이유가 뭔가요. 그런 거짓말이 제게 통할 것 같아요?”

평온했던 엘의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었다.

샤를로즈는 엘의 기에 눌리지 않고 꿋꿋이 대답했다.

“거짓말이라고 누가 그래? 나는 내 말이 거짓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샤를로즈 아가씨. 참 뻔뻔하시네요. 이런 무서운 거짓말도 잘하시고.”

“그러니깐 누가 내 말에 거짓이라고 토를 달았는데. 저기 폐하? 아니면 요한? 아무도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저분들은 샤를로즈 아가씨를 싫어하시잖아요. 당연히 아가씨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으시겠죠.”

“엘.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너를 죽일 악마를 데리고 있다고. 아마 내가 그 악마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 어둠을 뚫고 올지도 모르겠네. 부를까. 말까.”

“……정말 샤를로즈 아가씨는 악마와 계약을 하신 건가요? 만약에 악마와 계약하셨다면 티아 아가씨의 목숨을 살려 드리죠.”

물론 거짓말이지만.

엘의 꼼수에 넘어간 해리슨과 요한은 샤를로즈가 죽기를 바랐다.

샤를로즈는 싸한 분위기 속에 미간을 좁히며 엘에게 애원했다.

“나는 죽고 싶어. 엘. 제발 좀 나 좀 죽여 줘.”

엘은 점점 샤를로즈가 무섭게 보이기 시작했다.

샤를로즈의 모습은 가히 광기에 몸을 맡긴 사람 같았다.

엘의 불안감은 그림자 속에서도 느껴졌는데.

바로 해리슨, 요한 그리고 샤를로즈를 속박하고 있는 어둠이 잠시 흐려졌다가 진해지기를 반복한 것이다.

“샤를로즈 아가씨. 악마를 데리고 있다는 증표를 보여 주시겠어요?”

“증표? 어떤 증표?”

“어머, 악마를 데리고 있다면서 악마에게 새겨진 증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세요? 샤를로즈 아가씨. 제가 말했죠.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샤를로즈는 정말 증표에 관해선 알지 못했다. 루아가 그런 것까지 알려 주지 않았으니깐.

하기야 계약 내용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무턱대고 루아와 계약부터 진행해 버렸으니.

‘내 잘못인가.’

싶었다.

샤를로즈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표가 있을 거라고.

‘루아는 내 목덜미를 자주 빨았는데.’

아, 혹시 목덜미에 증표를 남겨 놨나?

혹시 모르니 엘에게 함정을 파 보았다.

“내 뒷목덜미에 증표가 있어.”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믿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한 번 내 목덜미를 확인해 봐.”

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샤를로즈를 속박한 어둠을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샤를로즈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사르륵.

샤를로즈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엘의 어둠으로 인해 올라갔다.

그리고 엘은 어둠으로 샤를로즈의 새하얀 목덜미를 확인했다.

‘어, 라?’

엘은 샤를로즈의 목덜미를 보고는 놀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자, 이래도 내 말을 못 믿겠어?”

“……미쳤어!”

샤를로즈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들고 있던 엘의 어둠이 빠르게 움직였다.

샤를로즈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엘은 제 두 눈이 잘못되었나 의심했지만, 계속 봐도 보이는 건 그대로였다.

대악마와 계약했다는 증표인 악마의 새까만 날개가 샤를로즈의 뒷목덜미에 증표로 남아 있었다.

엘은 이번 일이 꽤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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