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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120)

50화

“제가 언니를 두고 도망간 건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였어요. 언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그러니깐 저는 언니를 사랑하고 있어요. 아주 많이. 이 감정을 숨기기 위해 또 자꾸 저만 보면 죽으려는 언니를 위해 저는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루아는 티아의 파급적인 발언에 놀라지 않고 조용히 반응했다.

“그러니깐 그 이야기를 제게 하는 이유는 뭔가요?”

“샤를로즈 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동맹을 맺어요. 우리.”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샤를로즈는 저만 있으면 될 텐데요.”

티아는 자꾸 저를 자극하는 루아가 짜증 났지만, 애써 웃음을 지었다.

“언니가 저도 옆에 있어야 한다고 말해서요. 안됐지만, 언니는 당신만 원하는 게 아니라서요.”

루아는 티아의 말에 타격 하나 없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계약자가 원한다는데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이런 건 받아들여야지.

“알았어요. 이제부터 우리는 친한 사이가 되는 거예요.”

악마와 예비 성녀의 구도라.

정말 이상한 조합이었다.

루아는 일단 샤를로즈를 봤으니 다시 샤를로즈가 부를 때까지 오지 않겠다고 티아에게 일러둔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

티아는 사라진 루아를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두근, 두근.

극심한 긴장감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티아는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바보처럼.

***

새까만 어둠이 점점 흩어지고, 밝은 햇살이 하늘에서 떠오르는 새벽에 샤를로즈는 감았던 눈을 떴다.

너무 피곤했나 보네.

잠이란 걸 바로 드는 걸 보니.

이렇게 푹 자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샤를로즈는 개운한 느낌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어디를 간 거야. 티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손님방에 있는 건 샤를로즈 하나뿐이었다.

분명 제 옆에서 잔다던 티아가 사라졌다.

또 도망이라도 간 건가.

지겹지도 않은가.

샤를로즈는 개운한 느낌을 받기 무섭게 다시 두통이 아려 왔다.

설마 잡아도 도망가는 그런 전개가 펼쳐지는 건가?

그러면 곤란한데.

샤를로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진짜로 도망간 거야?

겨우 잡았는데?

그 생각이 들자 샤를로즈는 뒤통수를 거하게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아, 어지러워라.

샤를로즈는 이 망할 원작 여자 주인공이 다시 한번 제 손에 잡히기만 하면 이번에는 감금을 해야겠다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접어 두었다.

티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샤를로즈는 한숨을 거듭 내쉬며 티아에게 어디 갔다 왔냐며 추궁했다.

“찝찝해서 씻고 왔는데.”

“이제 너 어디 갈 때 나한테 일일이 다 보고하고 가. 너 사라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돌아 버릴 뻔했다고.

샤를로즈의 눈매가 세로로 가늘게 좁혀졌다.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티아는 샤를로즈의 정신 나간 집착에 설레던 것도 잠시 곧바로 긍정의 답을 내렸다.

“응. 알았어. 이제부터 언니한테 다 보고 할게.”

“내 말은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들어서 신기하네.”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며. 이렇게라도 보답해야지.”

배려심 많고 착한 우리 여자 주인공.

샤를로즈는 티아의 주눅 든 모습을 힐끗 보다가 그 애의 백금발 머리카락에 물기가 젖어 든 것을 보고 수건을 달라 하였다.

“수건 줘 봐.”

“왜?”

“내가 말려 줄게.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말리니.”

“어, 언니가 내 머리를 말려 준다고?”

“왜. 싫어? 싫으면 말고.”

“아니야. 말려 줘.”

샤를로즈는 티아가 건넨 새하얀 수건을 받아 들고선 그 애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 주었다.

기분 좋은 향기가 샤를로즈의 코 끝을 자극하였다.

샤를로즈가 무심코 그 향기에 반응해 버렸다.

“너, 향기 좋다.”

“……응? 그래?”

“응. 딱 내가 좋아하는 향기야.”

샤를로즈는 티아의 얼굴 주변에 코를 가져다 대어 킁킁 맡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향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간에 향기가 마음에 들어서 티아의 머리를 말리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다.

“다 말렸어. 수건으로는 이게 한계야.”

“고마워, 언니.”

“이제부터 네 모든 것을 다 내게 맡겨. 도움이 될 거야. 아, 물론 또 도망가면 내가 널 어디론가 가둘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야.”

“응. 알았어. 내 모든 것을 언니에게 다 내어 줄게.”

티아는 해맑게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샤를로즈는 그래도 제게 경계를 푸는 티아를 보자 마음이 좀 풀렸다.

계속 뚱해 있거나 인상을 쓰거나 불안해하는 모습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티아. 넌 이제부터 나처럼 우울해하지 말고 평소처럼 하고 다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러기에는 내가 언니에게 양심이 찔려서 말이야.”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면 됐어. 그리고 난 널 이용하려는 거야. 날 위해서 말이지.”

“응. 내가 헤질 정도로 이용하고 다녀. 나는 이제 상관없어. 언니만 옆에 있다면.”

“그래? 그럼 이제 슬슬 제자리로 돌아갈 기분이 나?”

“……언니. 미안하지만 나는 이 병자들의 섬의 환자들을 최대한 다 치료해 주고 싶어.”

“그럼 나랑 하나 약속해.”

“어떤 건데?”

“요한을 이용해서 레베크 공작저와 이 병자들의 섬을 왔다 갔다 거리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그게 아니라면 다 집어치워.”

“그러다가 요한 님이 역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네가 치료해 주면 되잖아.”

그리고 요한은 마력이 방대하기 때문에 병에는 걸리지 않는다고 했어.

저주만 있다고 했지.

샤를로즈는 어서 결정하라며 티아에게 눈짓을 주었다.

티아는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로 이미 제 자신을 언니에게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니 말대로 그렇게 할게.”

“그 대신, 도망가는 일은 없어야 해. 알겠어?”

“알았어. 이제 절대로 도망가지 않아. 나를 한 번만 믿어 줘. 언니.”

제게 매달리는 티아를 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유가 코앞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내 자유를 위해서라면.’

샤를로즈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똑똑똑-.

누군가가 손님방에 노크했다.

티아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어제 자신이 치료해 준 남자가 서 있었다.

“아이고, 아가씨들. 일어나셨습니까? 밥을 준비했습니다. 맛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먹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언니, 밥이래. 밥.”

“응. 밥 먹자.”

티아는 활짝 웃으며 샤를로즈의 손목을 붙잡고 남자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오게 되었다.

식당에는 어제 곧 죽을 위기에 놓였던 남자의 아내가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저를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소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식사입니다.”

평범한 식단이었다.

레베크 공작저처럼 화려한 식단이 아닌.

조금 딱딱해 보이는 둥그런 빵들과 각종 야채가 들어 있는 샐러드가 테이블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티아는 슬쩍 샤를로즈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야 제 언니의 입맛은 무척이나 까다로워 레베크 공작저에 있었을 적 최고의 주방장을 몇 번이나 바꾼 전적이 있었으므로.

“어서 먹자. 식겠어.”

티아는 분명히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거라는 제 예상과는 다르게 샤를로즈가 얌전히 식당 의자에 앉는 걸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언니가 이런 음식도 먹는단 말이야?

아닌데.

언니는 딱딱한 음식이라면 질색했는데.

“티아. 뭐 해, 옆에 앉아.”

샤를로즈는 티아가 옆에 앉기도 전에 식기를 들어 샐러드부터 빵을 손으로 뜯어 먹고 있었다.

티아는 샤를로즈의 생소한 모습에 음식이 아닌 제 언니에게로 눈길이 갔다.

샤를로즈는 그 시선을 느꼈지만 차분히 무시했다.

그리고 남자의 아내분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맛있네.”

아내분은 감사하다며 몸을 반으로 접었다.

티아는 이 섬에서 이런 음식들을 많이 접해 맛이 익숙했지만, 제 언니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평민들의 음식도 맛있다고 먹는 언니의 모습이 신기해서 자신이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티아. 칠칠치 못하게 다 흘리고 뭐 해.”

“아, 으응. 미안. 언니가 잘 먹는 거 보고 놀래서.”

“왜, 내가 음식 먹는 거 처음 봐? 그것도 아니잖아.”

“언니는 까다로워서……. 아니다. 그냥 오랜만에 언니랑 같이 밥 먹으니까 좋아서 말이야.”

“그럼 어서 먹고 떠나자. 엘이라는 애도 찾아야 한다며.”

“응. 엘을 찾고 떠날 거야.”

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전혀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하려는데 남자의 아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엘, 엘… 엘? 혹시 아가씨들. 엘이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티아는 입 안에 오물거리며 씹던 빵을 얼른 삼킨 뒤 대답했다.

“응. 내가 아끼는 메이드야.”

원래는 자신의 정보를 알려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제 언니에게 본명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실토했다.

그러자 남자의 아내가 미간을 좁히더니 무언가 가만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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