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샤를로즈는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어느 여자애도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뭐, 어떤가.
자신은 샤를로즈가 선택한 유일한 악마이자 계약자다.
계약자가 자신을 원한다면 따르는 법.
루아는 그 여자애를 신경도 쓰지 않고 샤를로즈에게로 다가가 샤를로즈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사라락.
결 좋은 샤를로즈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루아의 손에 의해 움직였다.
“샤를로즈, 제가 왔어요.”
샤를로즈는 한 번 잠을 자게 되면 잘 일어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잠을 잘 자지는 않지만, 한 번 자면 많이 잤다.
하여 이렇게 조용히 말을 해도 샤를로즈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아의 애착 어린 목소리를 들은 건 다름 아닌 샤를로즈의 옆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던 백금발의 여자애였다.
‘백금발? 설마 저 인간이 샤를로즈의 여동생인 건가.’
루아는 저 여자애가 누군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같이 자는 거였구나.
루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과 동침하고 있다면 그 상대방을 죽일지도 몰랐다.
악마의 질투는 꽤 광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피를 봐야지만 극성이 풀렸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옆에 있던 여자애가 눈을 번쩍 뜬 다음 상체를 일으키는 걸 우연히 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계약자의 여동생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샤를로즈의 여동생분이시죠?”
“안녕하세요. 당신이 루아인가요?”
“네. 제가 루아인데요.”
“저도 샤를로즈 언니의 여동생이에요.”
둘 사이의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샤를로즈를 중앙에 내버려 두고선.
‘저 녀석이 루아구나.’
티아가 드디어 ‘루아’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샤를로즈가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리움에 젖어 입에 담은 그 이름.
루아.
티아는 속이 거북했다. 게다가 저 나쁜 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니는 루아의 첫인상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신성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악마의 기운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티아는 루아가 악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악마가 썩 보기 좋지 않은 티아는 제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언니한테 이 밤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오신 거죠?”
“샤를로즈가 저를 찾아서 왔어요.”
“언니는 당신을 찾지 않았어요.”
“저는 분명히 들었어요. 제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샤를로즈의 고운 목소리를요.”
으득.
티아는 이를 으득 갈며 무서운 눈빛으로 루아를 노려보았다.
제 사랑에 침범하려는 나쁜 악마는 얼른 꺼져 줬으면 했다.
게다가 도대체 언니는 무슨 짓을 했길래 악마까지 옆에 붙었나 싶었다.
‘아니, 다 내가 사라져서 그래. 그래서 언니가 제정신이 아닌 걸 거야.’
티아는 그리 믿고 있었다.
죽은 어머니를 따라 악마에게 현혹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악마에게 현혹된 척하는 거라고.
티아는 흥, 콧방귀를 끼며 비아냥거렸다.
평소의 티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보통 티아라면, 상대방에게 먼저 예의를 보이며 상대방을 존중해 주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샤를로즈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샤를로즈가 없다면 평소와 같았을 텐데 지금은 제 옆자리에 누워 아이처럼 잘도 자고 있기에 티아는 루아를 향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언니는.”
티아가 운을 떼려는 순간, 루아가 먼저 선수 쳤다.
“당신은 참 뻔뻔하네요.”
“뻔뻔하다뇨. 말이 심하시네요.”
“샤를로즈는 당신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어요. 서슴없이 죽기도 하고 미친 듯이 웃기도 하고 생기가 없을 때도 많았어요. 당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샤를로즈의 주변인들이 유난을 떨었거든요.”
티아는 줄줄 외우듯 나오는 루아의 발언이 찔리는 것인지 할 말을 잠시 잃었다.
“그건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언니한테 미안해하고 있다고요.”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샤를로즈의 망가진 마음은 돌아오지 않아요.”
루아의 회색빛 도는 하늘색 눈이 티아를 담았다.
티아는 루아가 보내는 무언의 압박에 숨이 턱 막혔다.
신성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악마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그러하듯.
“저기, 살기 좀 지워 주실래요? 숨통이 막혀서요.”
“아, 그렇군요. 저도 모르게 살기를 내보였네요. 갑자기 열이 받아서 그만.”
티아는 루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언니는 왜 저딴 악마가 보고 싶다고 이름까지 중얼거린 거야. 그러면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잖아.’
티아는 시선을 내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도 잘도 자는 샤를로즈를 내려보았다.
루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샤를로즈를 괴롭게 한 저 여동생이라는 티아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악마의 본능이었다.
계약자를 지키기 위한 아주 지극히 정상적인 본능.
“언니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티아는 이 무거운 침묵이 싫었다.
하는 수 없이 제가 먼저 말을 꺼내 살벌한 상황을 변환시키려고 했다.
“저를 봉인해 둔 악마 감금실에서 만났어요.”
“악마 감금실이요?”
티아는 토끼 눈을 뜨며 놀라 되물었다.
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그곳에서 제 봉인을 풀어 준 유일한 구원자가 샤를로즈예요.”
“잠깐만, 언니가 어떻게 봉인을 푼 거예요?”
“샤를로즈는 악마보다 더 악의 기운이 많아요. 봉인 때문에 힘을 잃던 제게 힘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저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보통은 악마가 인간을 가지고 놀아야 정상이었다.
악마보다도 악의 기운이 많다면 얼마나 미친 것인지 지레짐작이 갔다.
티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샤를로즈를 내려다보며 루아에게 또 질문을 던졌다.
“언니는 정말 몇 번이고 계속 죽었었나요?”
“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두려워하지 않더군요.”
언니, 왜 이렇게 망가진 거야.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우울증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도망간 시점부터 샤를로즈는 더욱이 미쳐 버린 것이다.
티아는 샤를로즈가 안타까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애써 꾹 감정을 눌렀다.
잘한 게 뭐가 있다고 우는 거야.
울면 안 돼.
“울고 싶으면 우세요. 샤를로즈에게 꽤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루아는 티아에게 큰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하게 반응했고, 그녀는 결국 투명한 눈물을 조금씩 떨구고야 말았다.
투툭, 툭.
자신은 울 자격이 없는데도 말이다.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으으. 언니,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자신의 라이벌 관계인 루아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봐 온 샤를로즈의 일상을 요약해서 말해 준 거에 마음이 약해져 눈물이 터져 나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참 간사해요. 미안하고 울면 죄가 다 사라지는 줄 알거든요. 멍청하게.”
루아는 샤를로즈의 코끝을 검지로 툭 치며 무심하게 티아를 향해 경고했다.
티아는 그 경고를 듣고선 가만히 있었다.
루아의 말이 다 맞기 때문이었다.
반박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샤를로즈의 걱정뿐이었다.
“그럼 언니가 행복하게 웃은 적은 있었나요?”
“제가 보기에는 없었어요. 아니지, 저와 계약했을 때 웃었을 때 빼고는 잘 본 적이 없네요.”
그때는 참 아름다웠는데.
인간이 악마보다 더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 샤를로즈였다.
이렇게나 아름답고 악마가 좋아하는 악의 기운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샤를로즈를 싫어할 악마는 없을 거야.
루아는 자신이 제일 먼저 샤를로즈를 발견한 일이 몇천 년 만에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자부했다.
그 정도로 루아는 샤를로즈를 아끼다 못해 헌신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샤를로즈에게는 제 이런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선.
“루아라고 했죠?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티아라고 불러 주세요. 우리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조금은 친해지죠. 뭐, 신성력이 많은 저와 악마인 당신과는 상극이지만요.”
“어째서 친해지자는 말을 그리 쉽게 하시는 건가요?”
티아는 쓰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샤를로즈 언니를 위해서요. 언니는 저희 두 명을 다 원하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것 같네요.”
티아는 옛날처럼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성년이 된 몸이었다.
여전히 샤를로즈의 치마폭에 안겨 있을 순 없었다.
이러다가 꼼짝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샤를로즈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일단은 라이벌이고 뭐고 간에 언니의 인생에 숨 좀 불어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아도 샤를로즈 언니가 행복했으면 하죠?”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사실 샤를로즈 언니에게는 비밀이지만 당신에게는 말할 것이 있어요.”
“말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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