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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120)

48화

“티아. 내 옆으로 와.”

“……꼭 언니 옆에 있어야 해?”

“안 그러면 또 도망갈 것 같아서. 너 찾아다니는 거 그만하고 싶어. 지쳐.”

“알았어.”

티아는 쭈뼛거리며 샤를로즈가 있는 곳까지 다가가 샤를로즈 옆에 털썩 앉았다.

딱딱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언니는 엄청나게 푹신한 침대만 좋아해서 죄다 사치스러운 물품들만 사 드리곤 했는데. 지금은.’

이런 딱딱한 침대에서도 잘도 앉아 있네.

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샤를로즈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샤를로즈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물결을 치며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새까만 속눈썹 아래 은은히 빛나는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신비로웠다.

티아는 저도 모르게 샤를로즈의 외형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가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언니. 있잖아.”

티아는 이런 충동적인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서 샤를로즈와 평범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고개를 티아가 있는 방향으로 틀었다.

“말해.”

“그게… 언니는 나를 싫어했잖아. 지금도 나를 싫어해?”

아니지, 그게 아니지.

티아는 제 입술을 툭툭 치고 싶었다.

하필 꺼내도 저런 류의 이야기야.

티아는 속으로 후회하며 슬쩍 샤를로즈의 반응을 보았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싫어하지 않아. 그냥 귀찮아.”

“정말 내가 싫지 않아?”

“응. 싫지 않으니깐 내게서 도망가지 말아 줘.”

티아는 샤를로즈의 뜻밖의 답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나 때문에 고생한 언니 앞에서 설레고 있는 나도 참 바보 같네.’

티아는 설렘과 동시에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이 도망가지 않고 언니를 챙겼더라면 언니는 지금처럼 더 우울한 모습을 하지 않았을 거야.

괜스레 죄책감까지 들었다.

티아는 미간을 좁히며 샤를로즈의 창백한 손 위에 제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언니. 나 이제부터 언니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게. 절대로. 그러니깐 언니, 무서운 생각하지 마.”

티아는 샤를로즈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살 시도를 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레베크 공작저에서 자신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티아가 도망간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샤를로즈가 자신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어머니를 찾아 대니.

샤를로즈를 살리기 위해서 도망간 것이다.

절대로 나쁜 뜻은 없었다.

그런 것뿐이었는데.

다들 언니를 나쁜 사람으로만 보고 내면을 봐주지 않아 이렇게 피폐한 얼굴을 내비치는 거겠지.

티아는 샤를로즈의 힘든 모습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언니를 지킬 수 없다는 불안정함이었다.

게다가 마침 자신의 전속 하녀인 엘의 꼬드기기까지 하니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도망간 것이다.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본 언니의 모습은.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감정이 전혀 비치지 않은 무뚝뚝한 얼굴. 비웃을 때 빼고는 전혀 올라가지 않는 매끄러운 두 입가.

저를 관찰하듯 보는 금색 눈동자.

티아는 한숨을 내리쉬듯 샤를로즈에게 말을 꺼냈다.

“언니. 좀 전에는 왜 죽으려고 한 거야? 또 죽고 싶어진 거야?”

“너와는 달리 난 죽음에 익숙한 것뿐이야.”

“왜 익숙한데……?”

설마 예전처럼 또 어머니의 뒤를 쫓기 위해 죽으려고 하는 거야?

티아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거든.”

죽어야지만 현실로 돌아갈 수 있어.

샤를로즈는 이어지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어차피 티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것이 뻔했고, 되려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괜히 남자 주인공들의 눈에 또 띄면 더 귀찮아진다.

‘이런 이유는 내 선에서 정리하자.’

샤를로즈는 대충 대답하곤 티아를 향하던 고개를 뒤로 돌렸다.

창문 아래 빛나는 달빛을 보던 샤를로즈가 잠깐 생각했다.

자신을 편안하게 해 줄 루아가 필요하다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듣고 행동하는 편안한 루아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샤를로즈는 저도 모르게 “루아.”라고 중얼거렸다.

샤를로즈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티아가 얼굴을 크게 굳혔다.

그 사람 누구야, 언니?

라고 물음이 턱 밑까지 올라온 티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언니,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얼른 자자.”

“응. 자자.”

티아가 밑에서 대충 누워 자려고 침대에 붙은 엉덩이를 떼려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 나랑 같이 자야지.”

“……언니랑?”

샤를로즈가 티아의 손목을 붙잡고 제 옆자리를 턱짓했다.

“당연하지. 넌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럼 나, 나랑 언니랑 같은 침대에 자는 거야?”

“응. 왜, 싫어?”

“아니, 좋아서.”

이상한 애.

샤를로즈는 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티아의 모습에 아이러니했다.

아직 샤를로즈가 괴롭힌 트라우마 때문에 저러는 것 같은데.

조금 안타깝긴 하네.

‘그래도 내 개같은 인생보다는 나아서 부럽기도 하고.’

샤를로즈는 티아에게 어서 자자며 일렀고, 티아는 조심스럽게 샤를로즈의 옆자리에 누웠다.

“잘자.”

“언니도.”

티아는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아마 오늘 밤은 잠 못 이룰 것 같은 예감이 물씬 밀려 들어왔다.

반면, 샤를로즈는 피로함에 금방 잠들었다.

티아는 제 언니의 자는 얼굴을 구경하다가 눈을 살포시 감았다.

***

깊은 밤이 병자들의 섬에 찾아오자 루아와 이안은 악마답게 잘도 이 야밤에 돌아다녔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무척이나 걱정되었지만, 찾기 전까지는 찾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 옆에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버지. 샤를로즈가 신경 쓰이면 한 번 찾아가 보십시오.”

“안 돼. 샤를로즈가 부르기 전까지는 난 갈 수 없어.”

이안은 한심하게 루아를 보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언제부터 인간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그러십니까?”

“나도 이렇게 인간에게 휘둘리며 다닐 줄 몰랐어.”

“정말 진귀한 광경이긴 하네요.”

“그나저나 이안, 너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악마 사냥꾼이 돼서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온 거지?”

이안은 루아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냥 아버지가 봉인에서 풀리셨다고 하길래 축하할 겸 찾아온 것뿐입니다.”

“그리고.”

루아는 이안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 소중한 계약자인 샤를로즈를 진짜로 죽이면 어떡해. 이안.”

“하지만 샤를로즈가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샤를로즈의 피를 먹으면 저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인지, 제 몸에 흐르는 악마의 힘이 서서히 빠지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신기한 존재입니다.”

이안의 말에 루아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좁히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악마의 힘이 서서히 빠져?”

“네. 악마의 힘이 서서히 빠지고 있습니다. 샤를로즈의 피를 먹고 난 다음부터 말이죠.”

“말이 안 되는데.”

“무엇이 말입니까.”

루아는 차마 샤를로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이실직고를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계약자가 거짓말을 하든 사기를 치든 존중해 줘야 할 악마로서의 의무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샤를로즈는 참 특별한 인간인 것 같습니다. 악마보다 더 악독함에도 제 피로 악마를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은 그녀뿐일 겁니다.”

“……그건 나도 동감해.”

이안은 루아의 앞을 지나쳐 느긋하게 걸었다.

루아는 무언가 찝찝한 모양인지 표정이 곱지 않았다.

샤를로즈, 언제든 부르면 갈게요.

루아는 이안이고 샤를로즈의 여동생이고 뭐고 간에 자신에게 있어서는 샤를로즈가 가장 중요했다.

제발, 저를 불러 주세요. 샤를로즈.

그렇게 루아가 속으로 샤를로즈에게 매달리던 순간이었다.

-루아.

샤를로즈의 작은 음성이 루아의 귀에 내리꽂히게 된 것은.

“이안.”

루아는 황급히 이안을 불렀다.

이안은 왜 그러냐며 물었다.

“이 섬을 순찰하고 있어. 난 샤를로즈에게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아, 저도 가겠습니다. 아버지.”

“아니. 샤를로즈가 나를 원했어. 너는 필요 없어. 이안.”

이안은 루아의 황당한 발언에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제 아버지가 주인을 찾기 위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개새끼 노릇을 하다니.

역시 샤를로즈는 대단한 인간이야.

이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을 부르는 샤를로즈가 있는 곳으로 계약자의 순간 이동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안은 루아가 사라진 곳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악마도 홀리는 인간이라. 흥미롭긴 하네.”

이안은 다시 몸을 돌려 제 아버지의 말대로 섬 안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밤새.

***

루아는 샤를로즈가 있는 어느 집 안의 방에 계약자 순간 이동이 되었다.

새까만 빛이 루아를 감싸며 샤를로즈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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