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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120)

47화

샤를로즈는 다시 쉬어지는 숨에 제 심장에 꽂힌 단검을 재빠르게 빼냈다.

다행하게도 자신의 빠른 대처로 세 번은 죽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는 새하얀 빛이 맴도는 제 절은 다리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힘이 안 들어가던 그 절은 다리에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제 병든 부인을 위해 부인을 업고 역병에 든 자를 살리는 분이 있다던 병자들의 섬에 들어왔다.

제 부인을 살리기 위해 섬 안을 돌아다니며 그분을 찾기 위해 이 큰 섬을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녔다.

운이 정말 좋게도 면역력이 좋았던 남자는 역병에 들지는 않았지만 몇 달을 온종일 돌아다닌 탓에 다리 한쪽을 절게 되었다.

무리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다리 한쪽에 과부하가 온 것이었다.

그래도 제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기세였기에 개의치 않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로즈의 뼈를 때리는 발언에, 건강한 부인과 멀쩡한 두 다리로 소풍을 가고 싶은 욕망이 잠시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말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펑펑 흘러나오는 눈물을 쥐어 삼키며 샤를로즈와 티아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계속해서 했다.

샤를로즈는 남자의 지겨운 감사 인사에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오늘 하루 묵을 방이나 줘 봐.”

“네, 네! 물론이죠.”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었던 한쪽 다리를 멀쩡하게 걸으며 방에서 나와 손님 방 하나를 내어 주며 고개를 숙였다.

“방들이 다 상태가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최고로 좋은 손님방으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하루 묵을 정도는 될 겁니다.”

남자는 좋은 밤이 되라며 밤 인사를 건넨 뒤 사라졌다.

샤를로즈는 피곤함이 몰려와 무턱대고 손님방을 벌컥 열었다.

탁한 공기가 샤를로즈의 후각을 자극했지만, 그녀는 익숙한 듯 안에 들어갔다.

티아 역시 샤를로즈를 따라 손님 방으로 들어왔다.

티아는 탁한 공기에 기침을 한두 번 하였다.

“콜록, 콜록!”

샤를로즈는 티아가 못마땅한 것인지 아니꼬운 말투로 티아를 지적했다.

“너는 이런데 익숙하지는 않은 가봐? 기침하는 걸 보니.”

“…응. 내가 엘과 묵었던 숙소는 이 섬에서 가장 좋은 집이야. 이런 데서 자는 건 처음이야. 엘이 유난이거든.”

역시 원작 여자 주인공의 버프인가.

어딜 가나 축복받을 캐릭터네.

이런 악취가 나는 병자들의 섬에서 가장 좋은 집에 들어가 잘살고 있었다니.

샤를로즈는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과는 다르게 봉사 정신이 뚜렷하고 주변이 다 완벽한 사람들뿐인 티아를 보고 있자니 속이 거북했다.

빙의해도 버프가 굉장한 여자 주인공에나 빙의하지.

이런 쓰레기 악역에 빙의하다니.

‘내 인생도 참 거지 같네.’

샤를로즈는 그리 생각하며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인지 먼지가 조금 쌓여 있는 새하얀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털어 냈다.

티아는 놀란 눈으로 샤를로즈의 뒷모습을 쫓았다.

‘언니가 침대를 정리한다고? 저 먼지 많은 침대를?’

자신이 알고 있었던 샤를로즈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언니는 무언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티아가 보는 시점에서는 샤를로즈는 아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티아의 속마음을 모르는 샤를로즈는 침대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 내고선 침대에 걸터앉았다.

“티아, 왜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는 거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티아는 샤를로즈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언니가… 조금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아.

김단은 순간 자신이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을 티아 덕분에 다시금 알게 되었다.

김단은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게 잘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하기보다는 조금 가난한 집안에 살고 있었다.

이 피폐 역하렘 게임을 알게 된 것도 알바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대충할 게임을 찾다가 우연히 하게 된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며 시간이 날 때마다 게임을 하게 되었다.

게임이 재밌었기에 스트레스가 풀려 더 몰입하고 집중했던 것 같았다.

이 게임 속에 빙의한 것도 잠들기 전에 한 번 더 게임을 하려고 스마트폰을 켜다 빙의된 것이었다.

정말 특별한 계기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게임 속 유일한 악역, 샤를로즈가 되기까지.

게임 속 원작 샤를로즈는 티아를 괴롭히는 일러스트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아끼는지,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등의 설정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김단은 샤를로즈의 죽기 전 기억을 애매하게 가지고 이 게임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샤를로즈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악행은 바뀌지 않으니 조금 의심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티아는 달랐다.

샤를로즈를 연민하는 티아는 제 언니가 하지 않은 행동들을 계속해 대니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올 뿐이다.

‘언니는 조금 더 악독하고 허드렛일도 나를 시켰는데. 혼자서 하는 타입이 아니었어.’

침대에 먼지 터는 일도 분명히 저를 계속 자극해 시켰어야 정상이었다.

‘언니는 나를 시키지 않았어. 오히려 익숙한 듯 침대까지 정리했잖아.’

자신이 없는 레베크 공작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티아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궁금증이 크게 모여 결국 티아의 입에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언니, 나 없는 레베크 공작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무슨 일이 났길래 언니가 이렇게 변했어?”

샤를로즈는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다른 이들은 비슷하게 못되게 굴어도 자신을 ‘진짜’ 샤를로즈라고 생각했었지만, 원작 여자 주인공 티아는 달랐다.

티아는 감이 되게 좋았다.

게임 속에서 티아는 샤를로즈의 애완동물처럼 매일 붙어 다닐 정도로 샤를로즈를 잘 따랐다.

그렇게 자신을 무식하게 괴롭히는데도 말이다.

도망가기 전, 매일 샤를로즈의 옆에 거의 붙어 생활했던 티아가 자신을 보기에는 ‘진짜’ 샤를로즈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미 감안했던 일이었다.

샤를로즈의 풍성한 속눈썹이 차르르 내려갔다.

그리고 단조로운 샤를로즈의 음성이 손님방을 꽉 채웠다.

“네가 쪽지를 두고 사라지고 나서 모든 것이 바뀌었어.”

“내가 사라진 날부터……?”

“응. 네 쪽지 때문에 나는 너를 쫓아냈다는 나쁜 언니로 소문이 쫙 났지.”

“…….”

“네가 구원한 자들은 다들 널 데려오라며 내게 아우성쳤고, 오라버니들 역시 널 데려오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더라고. 살벌했어.”

“언니, 그건 정말 미안해……. 나도 답답해서, 답답해서 그런 거였어. 언니가 싫어서 도망간 거 아니야.”

“결과가 제일 중요해. 티아. 결국은 네가 도망가서 내가 몇 달간은 네 추종자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다는 점이야. 그 덕분에 성격도 바뀌었고 많은 걸 놓게 되었어.”

“언니, 미안해. 정말.”

“티아. 나는 네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아. 내가 받고 싶은 건 자유야. 알겠어? 너만 내 품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끝나.”

아마도.

샤를로즈는 속말을 삼켰다.

분명 해리슨, 그 미친 황제가 제게 자유를 준다고 하였다.

티아만 찾아오면 자유를 주겠다고.

샤를로즈는 자유를 얻으면 일단 세상을 망가트리고 싶었다.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자신에게 비틀린 이 세상을 철저히 망가트려 제 아래로 꿇리고 싶은 심정이 가득했다.

샤를로즈에 빙의하다 보니 오만가지 나쁜 상상이 계속되었다.

악역은 어쩔 수 없는 건가.

현실 세계로 도망가겠다고 생각하면 계속 어머니가 죽은 이 망할 세상을 정복하자, 망가트리자라는 생각이 샤를로즈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본성을 어디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졌다.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몇 번이나 끊었는데.

샤를로즈는 허무한 마음에 아름다운 얼굴에 짙은 그늘이 지어졌다.

티아는 평소보다 더 우울해 보이는 샤를로즈의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언니를 잊고 싶어서 도망 온 건데.

‘언니는 나를 찾기 위해 이 무서운 섬까지 와 버렸네.’

티아는 내심 샤를로즈에게 기쁨이라는 감정을 저도 모르게 느껴 버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 보니 마음이 쓰리면서도 좋았다.

묘한 감정이 오갔다.

‘나 이러다가 언니를 정말 놓지 못할지도 몰라. 어머니의 것이라고 계속 자제해 왔는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끈이 풀어진다고 생각하자 티아는 아찔함에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언니를 떨쳐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많은 사람을 살렸어. 언니 생각에 벗어나고 싶어서.’

티아는 지독한 언니바라기였다.

물론, 샤를로즈가 티아의 저 불순한 마음을 알 리 없었다.

샤를로즈는 넋을 놓고 있는 티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제 옆자리에 손바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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