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물론 진짜 샤를로즈의 마음이 무엇인지는 당사자가 아니니 몰랐지만.
그나저나 주변이 너무 어두운데.
잘 보이지도 않아.
하지만 샤를로즈는 저 멀리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촉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누군가 티아에게로 접근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 아가씨!”
샤를로즈는 저 멀리서 왼쪽 발을 절뚝이며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며 티아의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제발 제 아내를 살려 주세요.”
“밤에는 환자를 돌보지 않는다고 했었는데요.”
티아의 싸늘한 음성이 날카롭게 샤를로즈의 귀에 박혔다.
‘티아가 이렇게 차가웠나? 아닌데.’
“아가씨, 제발 부탁입니다. 몰래, 몰래 와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제 아내가 죽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오늘 밤에 죽는 분들이 한없이 많을 거예요. 전 신이 아니라 그냥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인간이에요. 저도 지치거든요.”
“온 섬에 평화를 오게 해 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섬의 규칙을 어겼으니 처형당하겠습니다.”
티아는 그렇게까지 꼭 해야 하냐며 곤란해했다.
이미 수많은 죽음을 봐 온 입장에서 티아는 저 남자의 말을 따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제 신성력에 한계가 와 자신이 죽게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섬의 환자들은 개죽음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티아는 규칙을 하나 정했다.
해가 지면, 자신을 찾지 않기로.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이 파격적인 조건을 응한 건 섬의 환자들이었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살면 운이 좋은 것이라고.
다들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규칙을 어겨 티아를 찾아오는 환자의 보호자들이 꽤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지만, 마음이 굉장히 쓰였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안타까움.
그것 하나만으로 티아의 마음은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안 돼. 지금 신성력이 회복 중이라 가도 치료할 수 없어.’
티아는 무릎을 꿇고 비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는데 샤를로즈가 끼어들었다.
“네 아내를 고쳐 준다면 오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방을 내어 주겠어? 그러면 생각해 보지.”
“…그, 그럼요! 제발 살려 주십시오. 흐윽.”
“티아. 오늘 묵을 곳이 없잖아. 규칙이야 몰래 깨면 되는 거 아니야? 발설할 수 없게 저들을 협박하면 되는 거고. 꽤 괜찮은 조건 아니야?”
“하지만 언니, 나는 약속을 했어. 밤에는 치료하지 않겠다고.”
“왜? 모든 환자는 다 치료해 주고 싶다며.”
“언니도 어렴풋이 알잖아. 내 능력을.”
“그렇지. 네 신성력 말하는 거지? 네 신성력 정도면 다 치료할 수 있지 않아?”
“언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 신성력은 많지 않아.”
“그래도 사람 한 명은 살릴 수 있잖아.”
“사실, 나 아직 신성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거든. 아까 노파의 딸을 치료해서…….”
“괜찮아. 네 신성력은 내가 회복시켜 줄게.”
“……언니가? 어떻게 내 신성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거야?”
샤를로즈는 또 하나의 도박을 하려고 했다.
바로 자신의 품에 있는 성녀였던 전 공작 부인의 유언장.
이 유언장은 신성력이 깃들었다.
아주 많은 신성력이.
이 신성력을 이용할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신성력이 발동하겠지. 그럼 환자를 안고 내가 죽는다면? 그 환자도 같이 신성력을 받아 살아나겠지.’
샤를로즈는 남자를 향해 명령했다.
“어서 네 집을 안내해. 곧 죽을 아내를 고쳐 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어, 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남자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언니. 정말 이래야 해?”
“나 못 믿어, 티아?”
“……못 믿지는 않은데.”
“그럼 나만 믿고 따라와. 넌 저 남자의 아내를 살릴 수 있어. 꼭.”
샤를로즈가 활짝 웃으며 티아를 꼬드겼다.
샤를로즈에게 마음이 있는 티아는 제 언니의 밝은 미소에 금방 넘어 가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티아는 샤를로즈에 홀려 그 남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각, 흑주술로 그림자 안에 갇힌 해리슨과 요한은 자신을 포박한 새까만 어둠 때문에 한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그 길이 함정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옆에 똑같이 어둠에 포박당한 요한을 본 해리슨이 말을 걸었다.
“야, 요한. 이거 네 마법으로 못 없애지?”
“폐하. 흑주술과 마법은 상성이 맞지 않아서. 게다가 그 하녀가 흑주술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흑주술은 고대 마법 아니야?”
“맞아, 고대 마법이지. 재물을 바쳐야 쓸 수 있는 아주 무서운 고대 마법.”
“잠깐만, 재물?”
해리슨은 요한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 하녀는 분명 티아와 함께 있었다.
티아가 아끼던 하녀였다.
그럼 설마 그 하녀가 티아를 재물로 흑주술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한. 설마 그 재물이 티아는 아니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티아의 옆에 있던 하녀니까. 고대 마법인 흑주술은 사람의 생명을 바꿀 수도 있는 무서운 마법이거든.”
“흑주술이란 고대 마법 말고 다른 고대 마법은 없어?”
“신성한 마법이 있긴 한데. 그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만 쓸 수 있어.”
“예를 들자면, 성녀?”
“그렇지. 똑똑하네, 폐하.”
“하아. 이번 대 성녀는 나오지 않았잖아.”
“티아가 성녀의 핏줄을 타고났으니 티아가 이번 대 성녀로 판별나겠지. 아직 성녀 의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그럼 우리를 풀어 줄 자는 아무도 없단 소리야?”
“글쎄. 악마라면 흑주술을 무너트릴 수도 있겠네. 샤를로즈에게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어.”
“윽, 샤를로즈에게 구해 달라고 하는 건 내 체면이 꽤 많이 상하는데.”
“뭐, 샤를로즈 앞에서 무릎도 꿇은 사람이 구해 달라고 하는 게 부끄러워? 폐하, 정말 귀엽네.”
“닥쳐, 요한!”
“그러니깐 왜 샤를로즈 앞에서 무릎을 꿇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야?”
“그건, 단지 티아를 찾기 위해서 내 무릎을 빌렸을 뿐이야.”
“정말로? 폐하는 샤를로즈의 예비 약혼자잖아.”
“……티아를 찾으면 샤를로즈가 아닌 티아가 내 약혼녀야.”
“폐하도 참, 욕심도 많으셔.”
“사실 샤를로즈가 눈에 밟혀. 아니, 신경 쓰인다고 해야 하나.”
“하긴 나도 샤를로즈가 신경이 쓰이긴 해. 사람이 달라졌어. 완전히. 아예 돌아 버린 건가 싶기도 해. 원래 샤를로즈는 남에게 베푸는 성격이 아니잖아?”
“그러니깐. 예전의 샤를로즈였다면 사고만 치고 다닐 텐데 너무 얌전해. 자살 시도한 후부터 바뀐 것 같아.”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샤를로즈가 완전히 딴판이 됐잖아. 제 어미만 찾던 어리석은 계집애였는데.”
“자유를 원한다더군. 가문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아니 퇴장해야 한다고. 티아의 생일 파티 때 내게 그러더군.”
“티아의 생일 파티 때 샤를로즈를 만났었어? 난 못 봤는데.”
“죽은 전 공작 부인이 아끼던 후원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더군.”
“샤를로즈 답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기가 있더군.”
“생기?”
“죽은 공작 부인 때문에 미쳐 버린 줄 알았던 샤를로즈가 내게 생기를 비쳤어.”
“그게 말이 돼? 그 샤를로즈가? 맨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
“제안을 하더군. 퇴장할 제안을.”
“이상하네. 샤를로즈라면 폐하에게 그런 것 말 안 하고 제멋대로 할 텐데.”
“조금 당황했지만 거절했지. 그 후부터 샤를로즈가 딴사람이 된 것처럼 바뀌었어. 지금처럼.”
“하긴 샤를로즈는 티아가 살든 말든 관심이 없던 애였으니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사람이 완전히 변했지. 샤를로즈의 몸에 딴 영혼이 들어온 것처럼.”
“나도 그 느낌을 받았어. 이질감이 들더군. 샤를로즈 앞에 있으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 애의 금안이 짜증이 났어.”
“3년 후, 티아가 돌아올 거라는 이상한 말도 지껄였고.”
“그런 발언을 하는 거면 보통 샤를로즈가 티아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꾸 위치는 모른다고 하면서 3년 후에 돌아온다고 계속 그러니 속이 답답했지.”
“그런데 결국 샤를로즈가 티아를 찾았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폐하?”
“찾으면 뭐 해. 우리가 함정에 빠져나오지를 못하는데.”
“또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뭔데?”
“그 하녀가 죽는 거야. 그럼 흑주술이 자동으로 풀려. 흑주술은 당사자의 생명을 권한으로 부릴 수 있어. 아, 물론 재물은 꼭 필요하고.”
“만약에 그 하녀가 죽는다면 티아는 안전해?”
“안전하지. 흑주술에서 풀리는데.”
“그럼 지금 티아가 흑주술에 사로잡혔다는 말이야?”
“뭐, 그렇겠지. 보통 흑주술을 하는 것들은 제물을 곁에 둔다고 해. 아마 티아의 목숨을 누군가와 바꿔치기하려고 하는 거겠지.”
“하아. 일이 거지같이 꼬였네.”
“이번 일은 샤를로즈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어. 지금 어둠에 갇힌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는 인질이거든.”
“빌어먹을.”
해리슨은 자신의 나약함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샤를로즈에게 희망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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