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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20)

40화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해리슨이 태클을 걸어왔다.

“넌 짐 같은 거 필요 없어?”

“필요 없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 한 벌이면 충분해요. 거기서 살 것도 아닌데 짐을 왜 가져가요?”

“다른 영애들은 이런 거리에 짐을 싸 가지고 가는 경우를 많이 봐서.”

“필요 없어요. 저는 그저 그곳에 티아가 있기만을 기도할 뿐이에요.”

“티아를 위해 기도를 해, 네가?”

해리슨은 기가 찬 듯 샤를로즈의 언행에 어이없어했다.

“저는 늘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티아가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기를. 저는 티아를 내쫓은 장본인이 아니라서요. 폐하.”

“그래, 티아를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될 일이지. 네가 장본인이 맞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요한, 시간이 없어요. 폐하의 말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병자들의 섬으로 가요.”

“마법진은 다 그렸어. 이제 정말 그 섬으로 가는 거야. 마법진 안으로 다들 들어와.”

이동 마법진 치고는 참 화려하게도 그려 놓았다.

샤를로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덩치 큰 네 명의 남자들 품에 갇혀 병자들의 섬 앞으로 이동되었다.

역시 마법은 편하네.

라고 생각하며.

***

병자들의 섬.

그 섬은 생지옥이 따로 없다고 한다.

역병이 든 환자들로 가득해 신관들도 꺼려 한다는 곳이었다.

환자만 수만 수백 명이 달하는 섬이었다.

이 섬의 수장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오래 산 사람 순으로 섬의 연장자가 될 뿐이다.

알 수 없는 역병 때문에 이 섬에 들어오는 환자의 수가 하루에 수십 명에 달했다.

하지만 몇 달 전,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여자로 인해 이 역병을 고칠 수 있었는데.

그 소문은 대륙 전체에 퍼지고 퍼졌다.

원인을 모를 역병에 든 환자들을 고치는 신관이 생겼다며 말이다.

그래서 역병이 든 환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병자들의 섬에 몰려들고 있던 참이었다.

섬의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이 섬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은 치유 능력을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의무 병사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어 역병에 걸리지 않았고, 또한 월급도 다른 병사들보다 5배는 많이 쳐주기 때문에 지원한 병사들이 여럿이었다.

자가 치유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병사들이지만 안쪽으로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저번에 역병을 안일하게 생각하고 섬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역병에 걸려 죽은 병사만 셋이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은 섬 주변만 지킬 뿐이었다.

그러다가 큰일이 벌어졌다.

섬 입구에 커다란 마법진이 생기면서 여기에 와서는 안 될 인물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폐, 폐하?”

황족의 의복을 입고 있는 해리슨과 해리슨의 전용 대마법사인 요한을 봐 버렸기 때문이다.

“하아. 여기에 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리슨은 한숨을 거듭 내쉬며 병자들의 섬 앞에서 망설였다.

“새로운 곳도 경험해야죠. 폐하.”

샤를로즈는 병자들의 섬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인지 평소보다 밝은 텐션으로 해리슨을 놀렸다.

“아. 힘 빠져. 누가 나 좀 업어 줘. 폐하.”

“……그냥 나를 부르는 거잖아. 요한.”

“아아. 폐하의 전용 대마법사는 이렇게 죽습니다.”

요한은 죽는 시늉을 내며 어서 자신을 업으라며 칭얼댔다.

해리슨은 하는 수 없이 사내놈을 업고야 말았다.

제 등에 닿을 수 있는 건 티아와 샤를로즈 말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쯧.

해리슨과 요한을 본 샤를로즈가 작게 박수를 치며 비아냥거렸다.

“와아. 잘 어울리세요. 폐하와 요한.”

“샤를로즈, 이 섬에서 죽고 싶은 건가?”

“저는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폐하.”

“너랑은 농담도 통하지도 않는군.”

“저와 농담할 시간이 있다면 어서 티아를 찾아 주세요. 폐하.”

샤를로즈는 끝말과 함께 웃던 얼굴을 정색하며 해리슨과 요한을 지나쳐 섬 입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섬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로 인해 샤를로즈의 발걸음이 끊기고 말았다.

“여기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샤를로즈 레베크.”

“……네?”

“내 이름이라고. 샤를로즈 레베크. 레베크 공작 가문을 모르나?”

샤를로즈는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병사 두 명을 노려보며 물었다.

병사 두 명은 ‘샤를로즈 레베크’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분명히 무서운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실물은 처음이다.

병사 두 명은 샤를로즈의 살기에 눌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섬에 볼일이 있거든. 그러니깐 협조 좀 해 줘.”

“이 섬에 들어가면 역병에 걸리실 겁니다.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돼? 그런 법이 있었나? 병자들의 섬에 환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법이.”

병사 두 명은 샤를로즈의 도발에 당황해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그, 그런 법은 없습니다. 다만, 병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출입을 불허한다는 황명이 떨어졌습니다. 아가씨,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나도 아파. 환자야.”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몸이 아파. 환자라고. 나도. 내가 환자라면 환자인 거지. 안 그래?”

“그, 그렇습니다!”

“이 바보야. 안 된다고 해야지!”

병사 두 명이 서로 눈치만 보다가 싸우기 시작했다.

샤를로즈는 그 두 명을 잠시 보다가 섬 안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해리슨은 샤를로즈의 미친 면모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라 익숙했다.

“폐하, 저래도 되는 거야?”

“안 돼.”

“샤를로즈는 안 되는 것도 다 되게 하네. 참 대단한 재주를 가졌어. 안 그래, 폐하?”

“샤를로즈, 저 미친 것. 쯧.”

해리슨은 싸우고 있는 두 병사 앞으로 갔다.

“그만 싸우고 우리가 왔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지 마. 절대로. 발설하게 된다면 네 삼대를 멸할 것이야. 알겠느냐.”

병자들의 섬 문지기였던 두 병사는 해리슨의 황명에 싸우던 걸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네! 들어가십시오. 폐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폐하. 워낙 역병이 심한 곳이라 감염될 수 있으니 정말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조심하지.”

그렇게 섬 문지기는 해리슨과 요한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러던 중 해리슨은 갑자기 의문점이 들었다.

“그런데 샤를로즈의 악마와 악마 사냥꾼은 어디로 갔지? 이 섬 앞에서 사라진 것 같은데.”

“샤를로즈의 옆에 있겠지. 폐하. 인간이 왜 악마를 신경 쓰고 있어?”

“아니. 그냥. 찝찝해서.”

“악마들이랑 엮이면 다 그렇지 뭐.”

“그런가.”

“마력만 더 있더라면 티아를 금방 찾을 수 있는데. 안타깝네.”

“그나저나 샤를로즈는 어디로 간 거지? 요한, 샤를로즈가 안 보여.”

“폐하. 우리는 샤를로즈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티아를 찾으러 온 거야. 정신 차려.”

“그렇긴 한데. 일단은 일행이잖아.”

“아, 골칫덩어리 샤를로즈.”

요한은 더는 말 할 힘도 나지 않는 것인지 해리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냅다 잠이 들었다.

마력을 다 쓴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잠이 든다.

마력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해리슨이 있어서 망정이지 마물의 숲이었다면 마물들의 먹잇감이 되기 참 좋았다.

해리슨은 무거워진 등을 느끼며 짜증을 냈다.

“망할 것들이 진짜.”

샤를로즈는 안 보이고, 요한은 잠들어 버리고.

돌아 버리겠네.

***

환자들이 북적이는 이 섬 안을 두리번거리며 아는 자가 없나 확인하던 엘은 누군가를 보고야 말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칙칙한 금색 눈을 한 아름다운 여자를 말이다.

그 여자의 모습이 너무 눈에 띄어서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샤를로즈 아가씨잖아! 왜 여기에 계신 거지? 아,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티아 아가씨에게 알려야 해!’

샤를로즈 아가씨가 기어코 이 섬을 찾았다고!

엘의 발걸음은 어느새 티아가 있는 곳까지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샤를로즈가 자신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기야 레베크 공작저는 웅장하고 그만큼 일하는 메이드들이 많았다.

자신을 알아볼 일 없다.

다만, 티아 아가씨를 찾게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엘은 섬의 가장 연장자인 한 노파의 집에서 노파의 딸을 치료해 주고 있는 티아를 찾아갔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엘, 조용히 해. 지금 환자를 돌보고 있는 중이잖아.”

“더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가씨.”

평소와 다른 엘의 모습에 티아는 무슨 일이냐며 조용히 물었다.

엘은 환자를 대할 때 조용히 해야 한다는 티아의 말을 새겨들었기에 티아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샤를로즈 아가씨를 봤습니다. 이 섬에서.”

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를 치료하던 티아의 손이 멈추었다.

“그럴 일 없어. 언니가 여기를 왜 와. 아니, 내 위치가 들통날 일 없어.”

“그러니까요! 들킬 수 없는 위치라고요!”

엘은 조용히 역정을 내며 자신의 계획이 비틀린 것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엘이 잘 못 본 거겠지. 어떻게 언니가 이 섬에 오겠어.”

“그러고 싶은데, 샤를로즈 아가씨의 외형이 워낙 눈에 띄잖아요. 신비로운 흑발에 금색 눈의 외형을 지닌 아름다운 아가씨가 샤를로즈 아가씨 말고 또 누가 있는데요.”

“정말로 샤를로즈 언니가 여기 온 거 맞아?”

티아는 다시 환자를 치료하며 엘에게 확인 사살을 했다.

“티아. 설마 나 찾고 있었어?”

그런데 엘의 목소리가 아닌 앙칼진 목소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티아가 황급히 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샤를로즈가 손을 흔들며 티아를 반겼다.

“안녕, 티아. 내가 너 때문에 꽤 고생했어.”

티아의 심장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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