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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120)

39화

이제는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던 그 문제를 풀 때가 되었다.

유진은 품에서 어머니의 유언장을 해리슨에게 건네주며 부탁했다.

“이 유언장을 샤를로즈에게 전해 주세요. 꼭 부적처럼 몸에 지녀야 한다고 알려 주세요.”

“그래. 건네주지.”

“아, 그리고 샤를로즈가 반 악마화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악마 사냥꾼을 붙여 놨습니다. 그 사냥꾼도 데려가십시오. 대악마가 바깥에 나돌아다니면 백성들이 불안에 떨 것이니까요.”

“그래. 그러지.”

“마지막으로 염치없지만 샤를로즈를 잘 부탁합니다. 골칫덩어리여도 쓸 만할 겁니다. 나름대로. 그 애는 한 번 집중하면 뭐든 잘하는 애니까요.”

유진이 무슨 일로 샤를로즈의 칭찬을 하고 있었다.

다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진의 마지막 말에 납득하고야 말았다.

“다들 아시잖아요. 샤를로즈가 머리 하나는 똑똑하다는 걸. 저번에 샤를로즈의 장난에 다들 걸린 적이 있었죠. 이번에도 샤를로즈의 장난에 당하는 것이 아니길 빕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장난이 아닌 것 같아. 내 느낌상으로는 말이지.”

요한은 티아가 사라진 기점부터 샤를로즈의 달라진 모습을 계속 마법 구슬로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과는 달랐다.

무언가가 확 달라졌다.

탁한 영혼이 더 탁해짐을 느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상황을 장난으로 넘어갈 샤를로즈로 보이지 않았다.

영혼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대마법사로 살면 가끔가다 사람들의 영혼을 보게 된다.

우연히 샤를로즈의 영혼을 두 번 보게 되었다.

티아가 사라지기 전에는 금색의 영혼을, 티아가 사라진 후에는 검은색 영혼을.

완전히 다른 영혼이 되었다.

요한은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게 대마법사의 규율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달라지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생전 하던 짓을 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다른 영혼이 들어오는 것.

하지만 샤를로즈의 행동을 보아하니 다른 영혼이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저 단순한 변심으로 보였다.

요한의 눈에서는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샤를로즈가 필요한 순간이다.

티아를 찾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으니 거짓부렁은 하지 않을 거라고 조금은 믿고 있다.

티아 말고는 남을 완전히 배척하는 요한이.

“폐하, 얼른 샤를로즈에게 가자. 시간이 없어. 정말로 티아가 병자들의 섬에 갇혀 있는 거라면 위험해.”

“그렇지. 가지. 아, 레베크 공작에게는 늘 고맙군. 우리를 이해해 줘서.”

유진은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마음이 넓어서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 티아가 원해서 하는 겁니다. 폐하.

유진은 제 새까만 속내를 감추고는 집무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쾅!

문이 닫히자 유진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문을 보더니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참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현 레베크 공작은.

***

샤를로즈의 방 안은 남정네들로 꽉 찼다.

큰 방임에도 불구하고 네 명의 남자들이 거대한 몸으로 채우자 비좁게 보였다.

“그래서 제가 바깥에 나가는 걸 허락받았나요, 폐하?”

“물론이지. 나를 뭐로 보고.”

“티아를 위해 목숨을 바쳐 줄 바보로만 알았습니다.”

“…비꼬는 건가, 샤를로즈?”

“비꼬는 게 아니라 칭찬입니다. 폐하.”

“아. 그리고 레베크 공작이 전해 달라더군.”

해리슨은 유진이 제게 준 선대 공작 부인의 유언장을 꺼내 샤를로즈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뭔가요?”

“선대 공작 부인의 유언장이라고 하더군.”

“그걸 왜 제게 주는 겁니까?”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있으라는 레베크 공작의 부탁이다.”

“부적처럼 몸에 유언장을 지니고 있으라고요? 유진 오라버니는 참 가문을 위해 뭐든 하는 사람이네요. 무섭기까지 합니다.”

“가주가 가문을 위해 일을 하지 그럼 놀고 있게?”

“그렇긴 하지만 유진 오라버니는 가문의 명예를 많이 신경 쓰시는 분이잖아요. 골칫덩어리인 제가 사라지길 바라겠죠.”

“그런 말을 하지 않더군.”

“폐하. 그런 말을 대놓고 하겠습니까? 바보처럼.”

샤를로즈는 해리슨에게 빈정거리며 유언장을 반으로 접어 치마 주머니에 넣고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조금의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이 망할 방 안에서 탈출할 수 있어.

드디어.

이게 몇 개월 만의 일이지.

티아에게 감사해야 하나.

아니면 게임 속 나오지 않는 흑막 엑스트라들에게 감사해야 하나.

일단 이안이 티아의 위치를 대충 알려 준 거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아.

하지만 남은 2년이 넘도록 멍청하게 원작 여자 주인공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죽는 건 이제 두렵지 않아. 난 그저 퇴장을 하고 싶은 것뿐이야.’

퇴장을 하려면 원작 주인공들과는 멀리서 살거나 사라져야지.

그게 옳은 악역의 길이지.

샤를로즈는 처음으로 비스듬한 미소가 아닌 제대로 된 미소를 지었다.

피폐한 삶에 작은 행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샤를로즈. 괜찮아요?”

샤를로즈의 보지 못한 모습에 루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샤를로즈를 억압해야 했기에.

“난 괜찮아요. 그나저나 루아, 아직 병자들의 섬에 보낸 악마들의 통신이 오지 않았어요?”

“네. 그곳은 악마들도 기피 하는 곳이라서요. 병자인 인간들을 좋아하는 악마들은 없거든요.”

“하기야 젊고 싱싱한 인간을 좋아하겠네요. 악마들도.”

“뭐, 그렇죠.”

“그럼 저희가 직접 가야 할 차례가 온 것 같네요. 루아.”

“네. 샤를로즈. 저는 샤를로즈가 원하는 곳이면 언제든지 갈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듬직하네요. 루아.”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샤를로즈.”

“무리할지 안 할지는 그곳에 가서 제가 직접 정해요.”

그 말인 즉슨 무리할지도 모르니 알아서 봐달라는 소리인가.

루아는 샤를로즈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병자들의 섬에 가겠다고 하는 것인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계약자의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어쨌거나 계약자가 원하는 일이다.

따라가 줘야 한다.

“죽을 것 같아도 정말 죽으면 안 돼요. 샤를로즈.”

다만 늘 죽음에 진심인 샤를로즈를 말리기 위해 충고 하나는 늘어트리고선 루아는 말을 아꼈다.

“그것도 제 마음이에요. 루아.”

샤를로즈의 이 대답에 루아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다정한 루아와 샤를로즈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해리슨은 알 수 없는 질투감에 마음을 지배당해 짜증이 났다.

샤를로즈가 정말 저 악마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망할 샤를로즈.

그렇게 쉽게 마음을 줄 것이었으면 악마한테 줘 버리면 안 되지.

차라리 우리에게 주지 그랬어.

해리슨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샤를로즈를 힐끗 바라보았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앙상한 몸.

윤기가 흐르던 새까만 머리카락은 어느새 힘을 잃어 칙칙하기만 했고, 늘 밝던 금색 눈동자엔 탁기가 흘러 어둡기만 해 보였다.

예전에는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티아가 사라진 후로 샤를로즈의 이미지가 점점 어두워졌다.

달라진 건 딱히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아. 사냥꾼도 데려가 달라고 하더군. 감시라면서.”

“아, 저도 가도 되는 겁니까. 하기야 저는 악마를 잡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 따라가는 게 맞겠네요.”

이안의 밝은 목소리에 해리슨은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까 샤를로즈 주변에 왜 이렇게 남자가 많은 거야.

티아의 남자들도 짜증 나 죽겠는데.

티아나 샤를로즈나 남자 운은 많은 것 같군.

악마와 악마 사냥꾼이라는 놈들이 샤를로즈에게 붙으니 해리슨은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들만 알던 샤를로즈가 남의 손을 타니 점점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요한, 다른 분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건가요?”

“나중에 알리지. 지금은 빨리 그 섬으로 가 티아를 찾아야 해. 다른 새끼들은 알 바야.”

“그러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동 마법이나 부려 주세요. 단 한 번으로 우리 전부를 그 섬에 도착하는 걸 빠르게 보여 주실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마력이 많이 들어. 나도 쓰러질지도 몰라.”

“티아를 빨리 찾고 싶은 마음이 없으신가 보다. 요한은.”

샤를로즈의 금안이 요한을 빤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시가 돋은 말에 인상을 확 구겨 버렸다.

“티아를 지금 당장 원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이러면 되겠네요. 마력을 많이 소모한 요한은 저희가 티아를 찾을 때까지 얌전히 마력을 채우기 기다리세요. 우리가 티아를 찾을게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안 그래요? 요한.”

샤를로즈의 허를 찌르는 발언에 요한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영약한 계집애.

“알았어. 알았다고. 대신 꼭 티아를 찾아야 해. 내 귀한 마력이 낭비되는 거니까.”

“네, 네.”

샤를로즈는 짐도 싸지 않았다.

쌀 짐도 없었고, 충분히 지금 입은 원피스도 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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