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20)

29화

“샤를로즈, 착각하는 게 있는데 우리는 관계를 바로잡을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지 않나?”

샤를로즈의 말을 도저히 못 듣겠는지 가만히 있던 루야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티아가 위험해질 수 있는데 괜찮겠어요? 저와 관계를 바로잡는 편이 나을 텐데 말이죠. 당신들과 재밌는 거래를 하려는데 싫어요? 아아, 이러다가 티아가 죽어서 오겠어요.”

샤를로즈는 말을 끝낸 다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이다.

그런데 다들 말이 없다.

이상하리만큼.

분명 티아와 관련된 발언을 하게 된다면 원작 남자 주인공들이 개처럼 짖어야 정상일 텐데 다들 너무 진지한 얼굴로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샤를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을 살펴보려는데 주드엔이 진검을 빠르게 들어 자신의 목에 겨누는 것이었다.

샤를로즈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거만하게 주드엔을 쳐다보았다.

루아가 옆으로 와 방어해 보려고 했지만 샤를로즈의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죽여 봐요. 제가 죽으면 티아를 찾는 일이 모두 끝날 거예요. 주드엔, 당신이야말로 티아를 가장 원하는 자가 아니던가요? 티아가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자주 말씀하셨잖아요. 그 구원자를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없으신가 봐요.”

“……당신을 비참하게 죽이고 싶어 미칠 것 같습니다.”

주드엔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샤를로즈의 새하얀 목에 겨눈 진검을 서서히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목에 생채기가 생겼다. 붉은 핏물이 동그랗게 고이기 시작했다.

샤를로즈는 고통을 느끼지도 않은 것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어디 더 해 보라는 식으로.

주드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티아를 찾을 수 없다면 평생 티아를 볼 수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샤를로즈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 티아가 살아 돌아오는 겁니까.’

주드엔은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칼을 거두었다.

“만약에 티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샤를로즈, 당신은 제게 죽을 준비를 하십시오.”

“물론이에요. 주드엔의 말대로 제가 만약 티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죽겠어요.”

샤를로즈는 이 세계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편이 나았다.

샤를로즈의 정신은 이미 피폐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악의 기운이 더 커지는 걸 보며 놀랐다.

인간 중에 저렇게 큰 악의 기운을 담고 있는 자는 처음 봤다.

지하실에서도 그렇고 샤를로즈는 자신의 기준을 뛰어넘는 신기한 인간이었다.

루아는 하는 수 없이 샤를로즈가 악의 기운 때문에 폭주하기 전에 그녀를 막기로 했다.

내키진 않지만 저 인간들이 보는 앞에서 진한 스킨십을 해야 했다.

루아는 자리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샤를로즈에게로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거칠게 키스했다.

샤를로즈의 차가운 입술이 제 입술에 닿자 어마어마한 악의 기운이 제 몸에 흘러들어 왔다.

샤를로즈의 악의 기운이 더 커졌다면 감당하지 못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루아는 여느 때와 다르게 그녀의 입술에 거친 키스를 했다.

루아와 샤를로즈의 묘한 관계를 보던 원작 남자 주인공들이 멍청하게 그 둘을 응시했다.

진득한 소리가 들리는 샤를로즈의 방 안에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 분이 지나자 루아와 샤를로즈의 입술이 떨어졌다.

샤를로즈는 명령을 지키지 않은 루아를 나무라 하지 않았다. 악의 기운이 몸 안에서 커짐을 스스로도 느꼈다. 그 기운이 자신을 좀 먹을 것 같은 예감이 물씬 들었다.

그런데 그 악의 기운을 루아가 먹어 치워 준 덕분에 샤를로즈는 피폐해진 정신에서 조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싸늘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정적을 깨고 말을 꺼냈다.

“다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저만 바라보고 계시는 건가요? 혹시 제가 악마에게 홀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한동안 말이 없던 해리슨이 샤를로즈의 손등에 말없이 짧게 입을 맞추었다.

“티아를 위해서라면 내가 뭐든 하지.”

해리슨의 충격적인 발언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폐하, 정녕 티아를 위해 저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너희도 얼른 샤를로즈와 관계를 회복해. 티아를 보기 위해서라면 샤를로즈의 편에 서야 해. 우리도 찾지 못한 티아를 샤를로즈가 찾아 줄 거야.”

해리슨은 자신을 미쳤다고 바라보는 주변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참 재밌는 발언을 하시는군요. 폐하와 같은 마음이신 분들이 더 없나요? 다들 티아를 찾고 싶지 않으신가요?”

샤를로즈는 주변을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주드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샤를로즈, 당신이 티아를 찾고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샤를로즈는 픽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티아를 찾는다면 바로 그 애를 당신들에게 보여 드리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이라는 샤를로즈의 말에 다들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마 샤를로즈가 또 폭탄과도 같은 발언을 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샤를로즈의 그다음 내용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티아를 찾았다면 이제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그게 제 조건이에요. 그럴 리 없겠지만, 티아가 절 보고 싶어 한다 해도 찾지 마세요. 절대로.”

이 말을 하는 샤를로즈의 얼굴이 창백하고 파리해 보였다.

‘원작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그냥 느긋하게 살고 싶어.’

샤를로즈는 이 지긋지긋한 레베크 공작 가문에서 정말로 나갈 생각이었다.

원작은 이제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다들 샤를로즈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말이 없었다.

샤를로즈가 루아의 어깨에 기대며 천천히 그들에게 물었다.

“제 말에 다들 동의하시죠?”

“그래.”

해리슨부터.

“동의해.”

루야.

“티아만 찾을 수 있다면 동의합니다.”

주드엔.

“네 말을 따르지.”

요한까지.

원작 남자 주인공들 모두 다 샤를로즈와 친구가 되었다.

물론 어감이 좋아 친구지, 속은 거지 같은 갑과 을의 관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럼 다들 제 친구가 되어 제 부름이면 무조건 오셔야 해요?”

거미줄같이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남과도 못한 사이였던 그들과.

***

샤를로즈는 오늘 밤에도 여전히 루아에게 악의 기운을 먹히고 있었다. 제 목덜미를 가볍게 내준 그녀는 앓는 소리 하나 없이 루아의 두 송곳니에 박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아무 말이 없자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그녀의 악의 기운을 먹던 행동을 잠시 멈추었다.

샤를로즈의 하얀 목덜미에 루아의 두 송곳니가 떨어졌다.

눈을 감고 있었던 샤를로즈는 반쯤 눈을 떠 루아를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루아, 왜 먹는 걸 멈춘 거예요?”

“오늘따라 샤를로즈가 조용해서요. 혹시 아픈데 말 못 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마음이 뒤숭숭해져서요.”

“왜요? 티아의…… 남자들과 친구가 되어서요?”

루아는 아직 입에 착착 감기지 않는 ‘티아의 남자들’이라는 단어에 말을 흐리고야 말았다.

“그런 것도 있고, 얼른 티아를 보고 싶거든요.”

“샤를로즈는 티아를 보면 먼저 하고 싶은 행동이라도 있으세요?”

“뺨 한 대를 날릴까 생각 중이었어요.”

“……뺨이요?”

“저를 이렇게 고생시킨 벌로 뺨 한 대면 싼 거 아닌가요?”

“뺨 한 대로 되겠어요?”

“사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어.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티아는 잘못이 없잖아요. 그저 운명에 순응한 죄밖에 없어요. 저 역시도.”

“샤를로즈는 이렇게 보면 아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이 보여요.”

“루아는 여태껏 저를 나쁜 사람으로 봤던 거예요?”

“아무래도 악의 기운이 많은 인간이라 어쩔 수 없이 그리 보였나 봐요.”

“뭐, 루아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도 상관은 없어요. 루아에게는 왠지 내 모든 걸 다 보여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다 정말 잡아 먹혀요, 샤를로즈.”

“루아야말로 제게 잡아 먹히면 안 돼요. 저는 세상을 떠날 사람이고요. 루아는 이 세계의 흑막으로서 잘 자라 주세요”

“……샤를로즈는 자유를 얻으면 제일 가 보고 싶은 데가 어디인가요?”

“집이요.”

“……집이요? 지금도 샤를로즈의 집 아닌가요?”

“제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집이요.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는데요?”

루아의 순수한 의도가 묻은 질문에 샤를로즈는 악마처럼 대답했다.

“제가 죽으면 갈 수 있어요.”

“……네?”

루아는 자신이 잘 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잘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죽어야지 갈 수 있는 곳이에요. 저만의 집이란 공간에.”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