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샤를로즈의 충성스러운 개새끼가 된다고 이미 말했을뿐더러 아이비크니 황족은 다른 황족들과 다르게 자신이 내뱉는 말에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벌을 받게 된다.
일종의 황족에 대한 저주 같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아직 샤를로즈가 몰라서 다행이군.’
해리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샤를로즈가 이 저주를 알게 된다면 자신을 얼마나 굴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럼 우리 여행이라도 떠날까요?”
샤를로즈는 허공을 바라보며 루아와 해리슨에게 물었다.
루아는 상관없다는 듯 샤를로즈의 마음대로 하라며 대답했고, 해리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샤를로즈는 해리슨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얼굴을 싸하게 굳히고 그의 뺨을 내리쳤다.
“폐하, 여행 가자고요. 같이. 벌써 저와 주종관계의 놀이에 질리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여행은 너무 무모해. 샤를로즈.”
해리슨은 후끈 붉어 오르는 제 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샤를로즈와 관계 회복을 위해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해리슨은 매우 후회 중이었다.
샤를로즈는 다시 해리슨의 뺨을 내리치려다가 그만두었다.
때려 봤자 소용없다.
원작 남자 주인공들 중에서 해리슨이 가장 고집도 세고 오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협박해도 해리슨은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샤를로즈의 몸으로 계속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정보였다.
좋은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똑똑똑.
샤를로즈는 또다시 누군가가 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썹 사이를 좁혔다.
오늘따라 왜 자꾸 자신의 방에 들어와 휴식을 방해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작 여자 주인공도 아니고 악역인데, 주요 인물들이 너무나도 관심을 가졌다.
샤를로즈는 그 관심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들어와요.”
끼이익.
방문이 열리며 개구지게 웃으며 들어오는 현자 요한을 볼 수 있었다.
‘뭐 차례대로 악역의 방에 들어오는 이벤트가 있었던가. 아니, 그런 것 따위 없었을 텐데. 여자 주인공 티아의 시점으로만 보니까 현실의 기억도 쓸모가 없네.’
샤를로즈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요한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요한인가요. 대체 왜 차례대로 제 방에 들어오는 거죠?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요?”
“너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찾아온 건데, 폐하가 먼저 선수를 쳐 버려서.”
“하, 저와 관계를 회복해 봤자 좋을 것 없을 텐데요?”
“오늘 네가 저 악마에게 행방불명된 티아를 찾아 달라고 명령하는 걸 봤어. 후원에서 말이지.”
“……후원에는 저와 루아뿐이었는데 무슨 소리세요?”
“우리도 있었어. 너와 저 악마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동안.”
샤를로즈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뻔뻔한 낯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요한.”
“나도 너희의 놀음에 껴 달라는 거지.”
“제가 왜요?”
“재밌어 보이니까. 그리고 티아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너와 함께라면.”
“요한의 말대로 저는 루아에게 티아를 찾아 달라고 명령한 건 맞아요. 하지만 요한이 낄 자리는 없는걸요. 제가 티아를 데려오는 그 날, 티아를 보시면 되잖아요. 귀찮게 굴지 마시고 나가세요, 요한.”
“나는 딱히 샤를로즈에게 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미움을 받고 있는 걸까?”
“티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별 이유는 없어요. 저는 티아가 싫거든요. 굉장히.”
“그런데 이상하네. 싫은 사람을 악마와 계약을 하면서까지 찾고 싶어?”
“찾아야지만 제 숨통이 트이니까요.”
“샤를로즈, 너 많이 변한 거 알지? 예전에는 나한테 말대답 따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잘도 하네. 마치 네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것처럼. 넌 죽으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살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지.”
샤를로즈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갑자기 찾아와 두통이 아려 왔다.
‘악역의 자세한 스토리를 내가 어떻게 알아. 샤를로즈와 원작 남자 주인공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가끔 나오는 서브 퀘스트인데.’
샤를로즈는 이마에 제 오른손을 짚으며 옅게 숨을 내뱉었다.
“이만 다 나가 주세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니까요.”
“내가 치유사 루야라도 불러 줄까? 내 소환 마법으로 부를 수 있는데.”
순간, 샤를로즈는 요한의 빈정거림에 머릿속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차라리 원작 남자 주인공들을 다 방으로 불러 모아서 내가 갑인 입장이 되는 거야. 티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꼬신 뒤, 해리슨처럼 다 내 개새끼로 삼는 거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거지?
지금까지 왜 계속 저 원작 남자 주인공들의 계략에 바보같이 당하기만 한 거야.
이런 귀한 방법이 있었는데.
“요한. 루야랑 주드엔까지 다 소환해 주세요. 할 말이 생각났거든요.”
요한은 눈웃음을 지으며 무슨 할 말이 있냐며 샤를로즈를 떠보았지만, 그녀는 어서 소환하라는 말만 내뱉을 뿐 그가 원하는 대답은 내놓지 않았다.
“내 흥미를 끄는 말이 아니라면 괴롭힐 거야, 샤를로즈.”
“요한의 흥미는 끌 만한 주제예요. 어서 그 둘을 소환해 주세요.”
요한은 소환 마법을 샤를로즈 방바닥에 펼쳤고, 곧 루야와 주드엔이 소환되었다.
식사를 하고 있던 건지 루야의 손에는 식사 기구들이 들려 있었고, 주드엔은 검술 수련을 하던 참인지 진검을 들고 서 있었다.
“샤를로즈, 네 말대로 루야와 주드엔을 소환했어. 어서 할 말이 뭔지 말해 봐.”
갑자기 샤를로즈의 방에 소환된 루야와 주드엔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무릎을 꿇고 있는 해리슨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선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곧 샤를로즈의 대담한 발언에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제 방에 잘 오셨어요. 다들. 제가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거든요. 바로 티아를 찾는 일에 관한 건데 제가 티아를 찾을 방법을 알게 되었거든요.”
루야는 또 샤를로즈가 헛소리를 하나보다 하고 그녀를 무시하는 대답을 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딴 말을 하는 건가, 샤를로즈.”
“누가 보면 제가 맨날 못된 짓만 하는 악역인 줄 알겠어요, 루야.”
“악역 맞잖아. 티아를 죽을 만큼 괴롭혀 댔으니.”
“그런 짓을 한 건 다 제 나름의 애정 표현이랍니다. 루야.”
“티아가 너 때문에 힘들다고 호소하며 운 날이 몇 년이야. 안 도망가고 배겨?”
루야의 특유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샤를로즈의 방 안에 깊게 울려 퍼졌다.
샤를로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반응했다.
“그래서 집 나간 티아를 같이 찾자는 거죠. 내 루아가 아주 큰 일을 벌였거든요.”
“저 악마가 무슨 일을 벌였는데.”
루야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샤를로즈는 아니꼽게 내려보았다.
“온 대륙에 있는 악마에게 티아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원작 남자 주인공들 중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다름 아닌 말수가 적은 주드엔이었다.
주드엔의 검은색 동공이 크게 떠졌다.
“이제부터 사라진 티아를 잡으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가실래요? 아무래도 최상위 악마들이 루아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요. 티아를 산 채로 데려오라고 했지만, 시체로 돌아올 가능성이 커서요.”
샤를로즈의 무시무시한 발언은 파장이 꽤 컸다.
다들-루아와 해리슨을 제외한 나머지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샤를로즈를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티아가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정말 흥미로운 발언이네, 샤를로즈. 그런 협박이 우리에게 통할 것 같아?”
요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허락할 샤를로즈가 아니었다.
“협박이 아니라 저는 진실만 말하고 있는걸요. 다들 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나 봐요? 제가 티아를 가지고 장난칠 사람은 아니거든요.”
“티아가 죽을 거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샤를로즈?”
주드엔은 평소와 다르게 사뭇 진지한 어투로 샤를로즈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아를 향해 손짓했다.
“루아가 명령을 내렸으니 루아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루아, 어서 말해 봐요. 진실이 무엇인지.”
루아는 샤를로즈의 명령에 꾹 다문 입술을 쉽게 열었다.
“샤를로즈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습니다. 악마인 저를 믿지 않는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전 샤를로즈를 가지고 장난칠 정도로 나쁜 악마가 아니라서요.”
“악마와 악역의 말을 어떻게 믿지?”
요한은 아예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으며 반론했다.
샤를로즈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를 으쓱이며 당황해하는 원작 남자 주인공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저들이 멍청하게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다들 웃긴 얼굴들을 하고 있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당신들과 관계를 다시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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