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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20)

26화

“제레미, 너까지 악마 사냥꾼을 믿고 있는 건가?”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대악마가 샤를로즈의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악마를 어떻게든 죽여야 합니다. 그럼 샤를로즈는 또 혼자가 되어 저희 가족의 것이 될 겁니다.”

“샤를로즈가 물건도 아니고, 누구의 것이라니 말이 지나친 거 아닌가? 제레미.”

“샤를로즈는 어머니가 남긴 유품과 다름없습니다. 지켜야 합니다.”

해리슨은 맛이 간 제레미의 푸른색 눈동자를 보고야 말았다.

티아와 쏙 빼닮은 푸른색 눈동자가 초점이 없어 보이니 이상했다.

마치 티아가 제 앞에서 정신을 놔 버리는 것 같이 보였다.

제레미와 티아는 외형이 그렇게 닮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해리슨은 묘한 이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들 샤를로즈 샤를로즈, 미치겠군.”

요한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들이 샤를로즈에 대한 집착이 커 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나 의외의 인물이 샤를로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건 바로 샤를로즈의 둘째 오라비인 제레미 레베크였다.

제멋대로인 성격에 샤를로즈를 아니꼽게 보던 그녀의 남자 형제였는데, 갑자기 제 본심을 대놓고 드러내니 이런 재밌는 일도 또 없었다.

레베크 공작인 유진도, 아이비크니 제국 황제인 해리슨 역시 점점 샤를로즈에게 감기고 있었다.

자신들만 모르고 있었다.

이런 웃기는 상황을 저 혼자만 알기에는 너무나도 재미없었다.

그래서 요한은 티아의 남자 중 나머지 두 명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혹시 모르지 않나.

그 두 놈도 자신도 모르게 샤를로즈에 대한 신경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니.

요한의 비뚜름한 미소가 점점 입가에 깊게 파였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과연 샤를로즈야. 너는 늘 내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을 벌이는구나.’

요한 역시 샤를로즈에게 흥미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싫던 샤를로즈에게 말이다.

“그래서 폐하, 샤를로즈가 폐하와의 약혼을 허락했습니까?”

유진의 물음에 해리슨은 이를 으득 갈았다.

“아니. 듣자 하니 내 약혼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더군. 황족에 대한 반기라도 들 셈인 건지.”

제레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샤를로즈는 티아의 주변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하잖습니까. 흔쾌히 받아 줄 애도 아니고.”

해리슨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점점 좁혔다.

“티아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약혼녀가 되어 티아를 찾는 걸 도와줬으면 해. 티아가 돌아오면 샤를로즈와 파혼하면 되니까. 파혼은 내게 쉬운 일이지.”

제레미는 해리슨의 말을 얌전히 듣고선 두 손에 주먹을 쥐었다.

죄다 샤를로즈를 자신들의 인형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샤를로즈는 레베크 공작가의 유일한 인형인데 말이다.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주인도, 위대한 분들도. 다.

샤를로즈는 본래 우리 레베크 가문의 것인데.

제레미의 썩을 만큼 썩은 마음이 점점 곪아 가기 시작했다.

유진은 제레미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고 제레미가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받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새벽 길드장에 직접 의뢰했으니 빠른 시일 내로 악마 사냥꾼들이 저희 저택에 찾아올 겁니다. 그날 다들 모이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해리슨은 악마 사냥꾼에 대한 실체를 믿지는 않지만, 샤를로즈의 옆에 붙어 있는 악마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긍정의 뜻이었다.

요한 역시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진은 저택에서 조금 더 즐기고 가라는 좋은 말만 남긴 채 제레미를 끌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유진은 제레미를 바라보며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제레미, 너 위대하신 분들에게 그게 무슨 예의야?”

“유진 형은 샤를로즈를 빼앗기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난 절대 싫어. 샤를로즈는 레베크 가문의 것이라고. 알잖아, 응?”

“그래. 샤를로즈는 어머니가 직접 입양한 레베크 가문의 최초 입양아야. 네 말대로 샤를로즈는 레베크 가문의 것이지. 하지만 티아를 괴롭히는 인형을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유진 형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서 샤를로즈를 데리고 있는 거지?”

“맞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 샤를로즈는 절대로 레베크 가문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할 거야.”

“제레미, 너도 악마한테 홀린 거야?”

“아니. 과거를 되짚어 보니 나는 티아를 아끼는 평범한 오라비였어. 하지만 티아가 사라지고 샤를로즈가 계속해서 죽으려는 그 꼴을 보고는 내 어둠에 갇힌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악마가 나타나면서 내 어두운 내면이 폭발해 버렸지. 사실 나는 티아보다 샤를로즈를 더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웃기는 소리지?”

제레미는 하하, 웃으며 실성했다.

자신이 숨겨 왔던 마음을 제 형에게 다 들춰내는 꼴이 되었으니.

유진은 제레미의 속마음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예전부터 제레미의 눈은 늘 샤를로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유진은 제레미의 어두운 내면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나 역시 샤를로즈를 지켜야 해. 어머니의 유언을 져 버리면 난 악마를 봉인할 힘을 아예 잃어버려 레베크 공작저를 무너트리게 될 거야. 그 꼴은 절대 못 봐.”

“……유진 형.”

“그러니까 일단 샤를로즈부터 구하자고. 제레미.”

“……응.”

두 명의 형제는 어째서인지 샤를로즈 때문에 다시 똘똘 뭉치게 되었다.

***

샤를로즈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을 힐끔 보니 루아가 있었다.

루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샤를로즈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있었다.

“루아, 혹시 저 죽어 있었나요?”

“아뇨. 그냥 기절한 것뿐이었어요.”

“그럼 이제 힘을 거의 다 되찾은 건가요?”

“네, 이게 다 샤를로즈 덕분이에요.”

“고마워하지 말아요. 전 그저 루아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는 비열한 인간이니까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제게 있어 샤를로즈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서로에 대해 감정을 갖는 건 규칙 위반이에요. 루아.”

“그냥 전 샤를로즈를 제 하나뿐인 계약자로서 소중히 여기는 건데, 이 정도의 감정도 허락하지 않으실 건가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처연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걸음질도 제대로 못 해 안아 달라는 강아지가 떠올랐다.

“그 정도의 감정은 이해할게요.”

“정말요?”

루아는 정말 기쁜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평화로움을 느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안정된 기분인가.

샤를로즈의 몸으로 자신을 방어하느라 늘 긴장한 상태로 살아와서 예민했다.

루아에게는 최대한 이런 자신의 불안정한 기분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연기했다.

어느덧 루아와 알게 된 지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그를 아예 신뢰하는 쪽은 아니었다.

악마를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어느 책 속에서 봤기 때문이다.

악마는 연약한 인간을 좋아하고 간사하며 사악하다.

하지만 루아는 그러하지 않았다.

샤를로즈는 점점 루아를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하게 믿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

“루아, 지금 당장 온 대륙에 살고 있는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려 주세요. 어깨까지 오는 백금발에 푸른색 눈동자의 외형인 여자 인간을 찾고 있다고. 이름은 티아 레베크예요. 어서요.”

“눈 뜨자마자 여동생부터 찾으니 왠지 서운하네요. 샤를로즈.”

“계약자로서 명령하는 거예요.”

“알았어요. 지금 당장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려놓을게요.”

“그 애의 몸에 생채기 하나 없이 데려와야 해요. 살아 있는 상태로 돌아와야 해요. 이 명령도 넣으세요.”

“네, 네.”

루아는 제 이마를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새까만 안개가 루아의 몸 주변에 어슬렁거렸다. 샤를로즈는 그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악마들이여, 인간 여자애를 하나 찾으세요. 이름은 티샤 레베크. 어깨까지 오는 백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인간입니다. 가장 빨리 찾아오는 악마에게는 제 충신이 될 기회를 드리죠.”

루아는 허공에 대고 그리 말했고, 새까만 안개는 마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으로 흩어졌다.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샤를로즈는 빤히 루아를 쳐다보았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래로 내렸던 하늘색 빛이 조금 나는 회색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서로 다른 눈동자 색깔을 가진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샤를로즈의 눈동자는 보면 볼수록 신기해요. 금을 발라놓은 것처럼 아름다워요.”

갑작스러운 루아의 칭찬에 샤를로즈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왜 갑자기 칭찬이지?

이대로 무시하기에는 뻘쭘해 샤를로즈 역시 루아에 대한 칭찬을 했다.

“루아의 얼굴은 신기해요. 보면 볼수록 아름답거든요.”

“……저, 샤를로즈는 제 얼굴이 취향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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