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집사장은 당연하게도 다른 사용인들에게 이 명령을 퍼트렸고, 그들은 저택 안에서 그분들을 봐도 투명인간 취급하며 제 할 일을 했다.
레베크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입이 굉장히 무거웠다.
누가 심한 고문이나 심문을 해도 그 고문을 달게 받고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레베크 공작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탓이었다.
이 충성심은 레베크 공작저를 처음 세운 초대 공작의 영향 때문이라고 했었는데.
유진은 초대 레베크 공작의 얼굴이 그려진 2층 계단의 벽면을 보았다.
액자도 없이 그냥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유진은 초대 공작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왠지 저와 꽤 닮은 외형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자신은 누군가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다.
(티아의 남자들과 샤를로즈를 제외하고)
그런데 초대 공작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졌다.
분명 죽은 건 저 사람인데, 자신이 죽은 느낌이 물씬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레미는 2층의 계단을 다 밟고 올라가자 인상을 쓰고 있는 유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은 2층 계단을 다 밟고 나면 늘 저런 얼굴이네. 초대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나? 하기야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한 죽은 초대 공작의 초상화를 보고 있다면 나라도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긴 하네.’
똑똑똑.
유진은 응접실을 노크한 뒤, 들어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응접실 안에 있던 해리슨의 명령이 떨어졌다.
“들어오도록.”
유진은 얼른 응접실 문을 연 뒤, 뻣뻣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해리슨과 응접실의 창문 바깥을 보던 요한을 마주했다.
유진과 제레미는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위대하신 분들을 뵙습니다.”
세계관 최강자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저들에게 인사를 할 때에는 저렇게 경외가 담긴 목소리로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그게 설령 황족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요한은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현자였다.
온 대륙의 마탑주를 관리하고 있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일개 귀족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존재였다.
유진은 요한에게서도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자 요한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내게는 그런 예의는 갖추지 말라고 했잖아. 왠지 부담스러워.”
요한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위대하신 분들에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유진, 너는 너무 고지식해서 문제야. 재미가 없어.”
“그런가요.”
“네 남동생 제레미를 봐. 예의는 폐하에게서만 갖추고 나는 아예 쌩 무시하잖아.”
요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은 제 옆에 있던 제레미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는 유진에게 있어 이런 치욕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제레미, 왜 요한 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은 거지?”
“내가 충성하고 있는 건 폐하뿐인데.”
제레미의 무심한 대답에 요한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맞아. 이게 재밌는 거지.”
“요한 님 제 남동생을 혼내 주시면-”
“굳이? 내가 왜? 충성하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원래 귀족의 예법이지. 제레미는 나를 상관으로 보고 있지 않아. 그러면 그런 예의는 갖추지 않아도 돼. 하기야 샤를로즈는 우리에게 예의를 갖춘 적이 한 번도 없었지. 샤를로즈가 머리를 숙여 우리에게 예의를 갖춘다면 그것도 조금 소름이 돋겠어.”
요한은 잠시 샤를로즈가 얌전히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어느 영애와 다름 없이 행동한다고 상상을 해 보았다.
‘윽, 별로야.’
샤를로즈에게 존경심을 받고 싶지 않은 생각이 요한의 머릿속에 꽉 찼다.
그러다가 넋을 놓고 있는 해리슨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아까 후원에 있었던 이야기를 유진과 제레미에게 해 주었다.
“아, 맞아. 샤를로즈가 악마를 데리고 산책을 하던데. 키스까지 굉장했어. 게다가 우리가 샤를로즈의 곁에 오지 못하게 그림자를 묶어 두더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손발이 떨려오네.”
제레미는 ‘키스’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샤를로즈가 그 악마 새끼랑 키스를 했다고요?”
요한은 팔짱을 낀 채 그렇다고 대답했다.
제레미의 눈에 독기가 점점 더 세졌다. 지나가던 악마가 제레미를 본다면 맛있는 음식이 놓여 있다고 달려들 정도로 제레미의 악의 기운이 점점 강해졌다.
요한은 조금 멍청했던 제레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 사내로서 질투감에 미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제레미, 언제부터 샤를로즈에 대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그래? 샤를로즈는 우리의 적이었잖아.”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제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폐하도 마찬가지야. 샤를로즈에게 약혼을 청하려고 후원에 갔다가 봉변만 당하고 왔지. 안 그래, 폐하?”
“입 닥쳐, 요한.”
유진은 샤를로즈와 폐하와의 ‘약혼’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폐하, 샤를로즈와 약혼을 할 생각이십니까?”
해리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사실 티아의 위치를 알 수도 있는 샤를로즈를 묶어 두기 위해서 약혼을 하려고 했어. 물론, 그 의견은 저기 있는 요한이 낸 거지만.”
“폐하께서는 티아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나요?”
“사랑하지. 원래 난 이번 티아의 생일에 그 애에게 약혼을 청하려고 했는데. 티아가 사라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무산되었지.”
“폐하에게 있어서 약혼은 쉬운 일입니까?”
유진의 보라색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티아를 사랑한다면, 다른 이에게 약혼은 하지 말아야 하죠.
그리고 약혼을 이용해 티아를 찾는다고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유진은 제 속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였다.
상대는 위대하신 분들이었고, 자신은 한낱 명문 가문의 가주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권력부터가 차이가 났고, 지금 난동을 부린다면 레베트 공작가의 사기는 더 떨어질 것이다.
뭐, 샤를로즈 때문에 더 떨어질 데도 없지만.
유진은 레베크 공작저를 지키기 위해 뭐든 하는 사내였다.
위대하신 그분들을 노하게 만들면 안 되었다.
하지만 조금은 반론을 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대담한 행동이었다.
유진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샤를로즈에게 호감이라도 생긴 겁니까, 폐하?”
“너나 요한이나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 왜 자꾸 샤를로즈를 들먹이는 거지?”
“폐하께서는 티아를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약혼이라뇨. 황족의 약혼은 그리 가볍게 진행하시면 안 됩니다.”
“레베크 공작, 넌 여전히 무뚝뚝하고 원래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군.”
안 그래도 해리슨은 샤를로즈와 그녀가 키우는 악마와 진득한 키스를 봐 기분이 아주 저조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유진은 해리슨에게 정신적인 공격을 조금씩 해 왔다.
해리슨은 유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이 나라에서는 내가 법이고 나라다. 레베크 공작. 선은 그만 넘도록 하지.”
“폐하, 최근 들어 이상합니다. 샤를로즈에 대해 예민해 보이십니다.”
“레베크 공작. 잘 들어. 난 샤를로즈에 대한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어. 단지, 샤를로즈의 옆에 있던 악마와의 대화를 듣고 샤를로즈와 약혼을 서두를 뿐이야.”
“……샤를로즈와 그 대악마가 무슨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 대악마라는 것이 온 대륙의 악마들에게 티아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릴 거라고 했다. 그럼 그 대악마의 계약자인 샤를로즈를 더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지 티아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해리슨의 발언에 유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른 악마들이 지금 인간들 틈에 섞여 있다고?
아닌데, 분명히 이 대악마를 봉인함으로써 악마들은 대다수 사라져 멸종 위기라고 들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유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 이마를 오른손으로 짚었다.
해리슨은 제 말에 갑자기 표정을 다 드러내는 유진을 보며 의아해했다.
“레베크 공작,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사실 저희는 지금 악마 사냥꾼들을 모집하러 새벽 길드에 의뢰를 하고 온 참이었습니다.”
“악마 사냥꾼? 전설에만 나오던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레베크 공작, 자네도 미쳐 버린 건가?”
“미치지 않았습니다. 악마 사냥꾼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악마를 유일하게 죽일 수 있는 빛의 힘을 가진 자들이죠. 물론 그 빛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들은 극히 드뭅니다.”
“역사에서만 듣던 악마 사냥꾼이 레베크 공작 입에서 나오니 생소하군.”
아무 말 없이 주변의 대화를 듣던 제레미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폐하, 샤를로즈 옆에 기생하는 그 악마 새끼를 죽이기 위해서는 악마 사냥꾼들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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