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어째서죠?”
“우리의 희망인 티아를 찾아 준다고 약속했으니.”
“그럼 그 티아라는 분을 찾으면 샤를로즈를 버릴 건가요?”
“버리다니, 애초에 난 샤를로즈를 가진 적이 없다.”
루아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해리슨을 노려보았다.
그 말은, 즉 샤를로즈를 티아라는 분을 찾을 때까지 가지고 놀겠다는 의미를 말하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이 들자 루아는 머리가 잠시 차게 식었다.
‘저 황제라는 인간은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가? 내 앞에서 잘도 내 계약자를 농락하네.’
루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인간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샤를로즈 때문이라도 참기로 했다.
아직 저들을 죽이라는 샤를로즈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계약자의 명령이 아니라면 인간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저 황제라는 인간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계속 넘나들고 있었다.
루아는 자신이 이렇게나 참을성 많은 악마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옛날 같았다면 바로 목을 날리는 건데.
어쩌다가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나약해졌나 싶었다.
루아는 이 거지 같은 대화를 끝내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이 후원에서 떠났다. 물론 해리슨이 건넨 꽃다발은 받지 않은 채.
“그럼 앞으로 샤를로즈에게 착하게 구세요. 그러면 더 빨리 샤를로즈의 여동생분을 찾아 드리죠.”
해리슨은 그 말을 남긴 채 유유히 떠나는 루아의 뒷모습을 보며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 흥미진진한 광경을 지켜보던 요한이 해리슨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정말 저 악마 말대로 하게?”
“그래야지. 티아를 찾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지. 다른 놈들에게 알려. 이제부터 우리는 샤를로즈와 호의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그래야지 티아를 찾을 수 있다고. 네 마력을 통해 전달해.”
“물론, 폐하의 명령대로 할게. 그런데 우리 조금 이상해지지 않았어?”
해리슨은 요한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뭐가 이상해졌다는 거지?”
“그렇게 경멸하던 샤를로즈에게 우리가 꽤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숙이다니, 우리는 그저 티아를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요한.”
“하지만 티아가 도망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끼리 모였을 때, 폐하는 샤를로즈의 도움 따위 받으려고 하지 않았잖아. 기억 안 나?”
요한의 말대로 해리슨은 티아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아를 위한 남자들의 모임에서 샤를로즈를 절대 믿지 못한다며 그 애의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온 대륙을 세세하게 뒤지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샤를로즈와 우호적인 관계를 성립하려고 한다.
그렇게 싫어하던 샤를로즈와 말이다.
요한은 그새 해리슨이 샤를로즈와 미운 정이라도 들어 사람이 180도 바뀐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티아를 위한 남자 중 샤를로즈를 가장 싫어하던 해리슨이 샤를로즈에게 감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작 해리슨은 모르는 듯했지만.
아직은 해리슨의 마음이 티아를 향하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몰랐다.
“폐하, 샤를로즈를 눈여겨보지 마. 위험해.”
“예전부터 거슬리던 것이었어. 티아를 찾는다면 인연을 끊을 생각이다.”
“정말로?”
“그래. 요한,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나와 같은 생각인 건가?”
요한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잘 모르겠어. 샤를로즈처럼 재밌게 미친 애는 또 없거든. 원래 현자란 종족은 호기심이 강하잖아.”
“샤를로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 말인가?”
“조금은.”
“요한, 네 정신머리가 돌아 버린 건가?”
“그건 아닌데.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넌 항상 재밌는 걸 좋아했지. 멍청하게.”
“가끔은 멍청한 것도 나쁘지 않아.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거든.”
“쯧.”
해리슨은 혀를 끌끌 차며 루아가 무시했던 꽃다발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루아가 붙인 작은 불씨가 해리슨의 불쾌한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요한은 바닥에 흩어진 화려한 꽃들을 내려다보며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해리슨의 마음이 샤를로즈에게로 갔다가 티아에게로 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아주 조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위험한 상황에 군침이 돌았다.
해리슨은 과연 티아를 찾아 행복할까, 아니면 사라진 샤를로즈에 대한 후회를 할까.
괜히 궁금해졌다.
그래서 해리슨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폐하, 샤를로즈가 깰 때까지 레베크 공작저에서 기다리자.”
“어째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지?”
“샤를로즈에게 상냥하게 굴어야 한다고 했잖아. 우리에게 소중해진 샤를로즈를 저 악마처럼 아껴 주자는 거지.”
“그런 것까지 꼭 해야 하는 건가?”
“당연하지. 레이디의 호의를 가지기 위해서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해. 이제부터 폐하의 본모습을 버려야 해. 그래야 티아를 찾지.”
해리슨은 요한의 묘한 설득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알았어. 샤를로즈가 깰 때까지 기다리지. 물론 요한 너도 함께다.”
요한은 이미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유진에게 미리 통보 형식의 정신 전달을 했다.
<폐하와 나는 응접실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찾아와.>
***
유진과 제레미는 황급히 저택으로 돌아와 샤를로즈가 저택에서 벗어났는지를 집사장에게 물어보았다.
“집사장, 샤를로즈는 오늘도 얌전히 있었나?”
“샤를로즈가 사고는 치지 않았지?”
집사장은 갑작스러운 질문 공세에 많이 당황해 보였다.
“그게 사실 샤를로즈 아가씨께서 산책을 나가신다고 하셔서 몰래 지켜봤는데 정말 후원만 산책하고 계시더라고요.”
“혼자 산책을 했단 말이야?”
제레미의 질문에 집사장은 잠시 그 장면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 계셨습니다.”
유진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며 집사장에게 제레미가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정말 샤를로즈, 혼자 있었단 말인가?”
“네. 분명히 혼자 산책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저택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본 건 이게 끝입니다. 공작님.”
“수고했어. 이제부터 볼일 봐도 괜찮아.”
레베크 공작, 유진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사장은 제 주인에게 고개를 꾸벅 움직인 뒤, 자신의 할 일을 하러 유유히 사라졌다.
제레미는 집사장의 말이 신경 쓰이는 건지 유진의 팔을 툭툭 쳤다.
“형, 아무래도 이상해. 샤를로즈가 그 악마 없이 혼자만 움직인다고? 맨날 둘이 같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악마 능력 중 하나인 은신을 쓴 것 같아. 악마에게는 다양한 능력이 있어. 흔히 인간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능력들이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걸까?”
“그러니깐 말이야. 그나저나 빨리 응접실로 가야 해. 중요한 분들이 오셨어.”
“어?”
“아까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한 님의 전달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어.”
“요한 님이? 어째서?”
“일은 잘 모르겠지만, 응접실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네. 얼른 우리도 손님 받을 준비나 해야지.”
“그분들은 일 없대?”
“너도 딱히 황궁에 자주 출근하는 편이 아니잖아.”
“그거야, 나는 자유 출근이니까 그러지.”
“이분들도 마찬가지야. 자기가 원하는 날 일을 하는 위대한 분들이거든.”
“아무튼 간 아주 우리 집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데 마음에 썩 들지 않아. 불편한데 왜 자꾸 꾸준하게도 찾아오는 거야?”
“내가 허락했거든.”
“형은 남이 우리 저택에 연락 없이 찾아오는 거 싫어했잖아.”
“다들 티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신 분들이야. 우리의 협력자인 셈이지. 그리고 샤를로즈도 감시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거든.”
“샤를로즈를 감시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고? 샤를로즈를 경멸하는 그분들이 퍽이나 형의 부탁을 들어줬겠다.”
“흔쾌히 허락해 주셨지. 그때, 나도 너처럼 그럴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분들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샤를로즈까지 챙겨 줄 모양이더라고.”
“……그분들도 혹시 악마에게 홀린 거 아니야?”
“그럴 일 없을 거야. 그야 그분들은 분야들의 천재들이고, 정신도 강해. 악마에게 쉽게 홀릴 상이 아니야.”
유진은 티아의 남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신과 제레미 둘이서는 도저히 티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샤를로즈도 돌봐 준다고 하셨으니, 예전에 가졌던 그분들의 나쁜 감정들이 무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주 봐서 그런 것 같았다.
‘싫지만 티아를 찾을 수만 있다면, 친구라도 되어 주지.’
유진은 그분들을 떠올리며 제레미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아마 집사장이 그분들이 왔다는 걸 보고하지 않은 건 유진의 입막음 때문일 거다.
그분들이 갑자기 저택에 들이닥쳐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얌전히 굴라고 집사장에게 일러 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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