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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20)

22화

“또 무슨 개 같은 내용일까.”

샤를로즈는 편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작 남자 주인공들과 사이가 아주 많이 좋지 않았던 샤를로즈에게 있어 그들의 편지는 악담과 다름없었으므로.

샤를로즈가 저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악담만 퍼붓고 티아를 찾으라는 명령이 담긴 내용의 편지들뿐이었으니까.

샤를로즈는 해리슨의 편지를 확 찢어 버릴까 싶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을 받아 편지를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편지는 또 누가 보낸 건가요?”

루아가 샤를로즈가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보며 제 질투를 숨긴 채 물었다.

“폐하께서 보내셨대요.”

“그 황제는 할 일이 그렇게나 없으시나요? 왜 자꾸 샤를로즈를 건드리는 건가요? 혹시 제가 모르는 일들이 많은가요?”

루아는 샤를로즈를 뒤에서 껴안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계약자가 다른 사내들과 놀아나는 것이 불쾌한 루아의 귀여운 애교였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샤를로즈는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티아의 남자들과 좋은 일은 여태 없었어요. 모르는 일이라고 해도 미움받는 일 밖에 없었는 걸요?”

“샤를로즈는 왜 여동생의 남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건가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순수한 물음에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마 여동생을 싫어해서 그런 것 같네요.”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제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되고 싶거든요.”

“그 정도로 여동생을 싫어했어요?”

“그 애를 싫어했다기보다는 원망했달까요. 그 애는 다 가졌는데, 저는 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

“샤를로즈는 가지고 싶은 게 따로 있나요?”

“자유를 가지고 싶어요.”

저 말은 진심이었다.

샤를로즈는 지금 매우 지쳐 있는 상태. 누가 건드리면 툭 쓰러질 정도로 약한 상태였다. 몸이 아닌 정신적으로 말이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제 접어 두었다.

자살을 해도 제 남자 형제들이 살렸던 일들을 떠올리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죽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걸 살리고 자빠졌어.’

샤를로즈는 이 역하렘 게임 속의 주인공들에 대한 증오가 더욱이 커져 갔다.

루아는 갑작스럽게 커진 샤를로즈의 악의 기운을 느꼈다.

“샤를로즈? 기분 상한 일이라도 떠올렸나요?”

“네. 욕이 나올 만한 일을 잠시 떠올렸거든요. 왜요?”

“샤를로즈의 악의 기운이 커지는 걸 느꼈거든요. 이런 경우에는 정말 싫은 일들을 떠올릴 때뿐이거든요.”

“루아에게 거짓말은 전혀 통하지 않겠네요. 제 감정을 다 알아 버리니까요.”

“제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샤를로즈.”

“제 인생은 모두 다 거짓인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요?”

샤를로즈의 인생에서 자신이 진짜인 날은 없었다.

모두 다 가짜였다.

전 공작 부인의 어여쁜 인형으로서 이 가문에서 자라는 것밖에 없었다.

가족이 아닌 물건으로 대하는 주변인들에 샤를로즈의 감정은 더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울한 기분으로 해리슨의 편지를 거칠게 뜯어 내용물을 보았다.

샤를로즈는 그 편지의 내용을 보고는 헛웃음을 쳤다.

「샤를로즈, 이번 전쟁이 끝나면 나와 약혼하자.」

“약혼? 설마 이런 걸로 날 묶어 둘 생각인 건가?”

샤를로즈는 기가 찼다.

약혼이라니.

그건 원작 여자 주인공인 티아에게나 있는 남자 주인공과의 이벤트였다.

결코 자신에게 올 이벤트가 아니란 것이다.

원작을 조금 비틀었더니 다들 미쳤나 보다.

샤를로즈는 그 허무맹랑한 편지를 갈가리 찢었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루아는 샤를로즈의 입에 나온 ‘약혼’이라는 단어를 듣고 얼굴을 굳혔다.

감히, 제 하나뿐인 계약자를 건드냐며 화나 있었다.

루아는 당장이라도 해리슨인가 뭔가 하는 황제를 찾아 목을 비틀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샤를로즈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샤를로즈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

유진과 제레미는 샤를로즈 몰래 저택에서 나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악질의 길드 ‘새벽’에 들어갔다.

“길드장에게 볼 일이 있다.”

유진과 제레미는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 몸에 새까만 로브를 둘렀다.

이 때문에 유진과 제레미를 방랑자라고 보는 길드원들이 많았다.

“한낱 방랑자들이 우리 길드장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찾아온 거지?”

“돈을 두둑이 주겠다. 급한 일이니 길드장을 불러와.”

“길드장과 약속은 하고 오셨나?”

“약속은 하지 않았다.”

유진은 안내를 도와주는 길드원의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유진의 대답에 불쾌한 길드원이 미간을 좁히며 이를 내보였다.

“길드장과 약속을 해야 볼 수 있는 걸 모르는 건가? 이 구역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규칙일 텐데.”

유진의 옆에 선 제레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 안내 길드원을 반 협박했다.

“죽기 싫다면 얼른 길드장을 불러와.”

“죽기 싫다면?”

안내 길드원은 기가 차는지 비스듬하게 미소를 지으며 제레미의 말을 똑같이 말했다.

주변에 있던 새벽 길드원들 또한 유진과 제레미의 오만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다들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터벅, 터벅.

그러다가 외모가 빼어난 어떤 남성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나를 찾아온 건가?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아래층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새벽 길드장이 얼굴을 먼저 보였다.

붉은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붉은색 눈동자를 빛내는 외모를 지닌 새벽 길드장이 유진과 제레미를 번갈아 바라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새벽 길드장의 물음에 제레미가 돈이 든 봉투와 편지 하나를 새벽 길드장을 향해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의 의뢰가 담겨 있는 편지와 그에 걸맞은 돈이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 주길 부탁하지.”

새벽 길드장은 제레미의 억압적인 어조에 하는 수 없이 그 편지와 돈을 받아들었다.

‘오, 생각보다 두둑한데?’

돈이면 뭐든 한다는 새벽 길드의 길드장인 렐은 오래간만에 큰 수확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제레미의 말에 긍정적인 대답을 표했다.

“좋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하지.”

“그럼 좋은 소식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이번에 유진이 렐을 향해 거만하게 굴었지만, 렐은 이 정도의 돈이라면 그 거만함도 수긍했다.

새벽 길드장 렐은 돈에 아주 환장한 미친 도박꾼이었으니.

이런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지닌 고객을 함부로 대할 리 없었다.

“다들 이 귀한 고객님들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굴도록.”

길드장 렐의 명령에 길드원들은 하는 수없이 유진과 제레미를 향해 다들 일어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비굴함이었다.

***

유진과 제레미가 없는 레베크 공작저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샤를로즈는 루아와 함께 후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비록 다 죽어간 후원이지만 왠지 모르게 후원에 있어야지 샤를로즈는 제 불편한 마음이 풀렸다.

아마 이게 다 캐릭터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샤를로즈는 레베크 공작저 중 후원을 가장 좋아했다. 아무래도 전 공작 부인이 아끼던 후원이라서 그런지 더 애착이 간 모양이다.

지금 샤를로즈는 진짜가 아니라서 그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김단은 그렇게 단정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이 역하렘 게임 속 지식은 얕았다.

이 게임 속을 클리어하지도 못할뿐더러 도망간 여자 주인공이 3년 뒤에 돌아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미움받는 악역인 샤를로즈에 자신이 빙의한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샤를로즈는 제 옆에 딱 달라붙어 걷는 루아를 올려다보았다.

‘루아라는 캐릭터가 있는지도 처음 알았어.’

아무래도 이곳은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었다.

원작 남자 주인공들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둘 줄은 전혀 몰랐고, 자신이 죽어서도 제 오라비들이 살릴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기에 더욱 이곳이 낯설게 느껴졌다.

“샤를로즈?”

자신을 부르는 루아의 목소리에 샤를로즈는 제정신을 차렸다.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하면 여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괜찮은 방법이 없나 해서요.”

“음. 저도 한 번 생각해 봤는데 하나 방법이 있긴 해요.”

루아의 말에 샤를로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뭔데요? 알려 주세요, 루아.”

“제힘으로 온 대륙에 있는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법이 있는데, 악의 기운이 꽤 많이 소모돼서 쓰고 있지 않거든요.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서요.”

“악의 기운만 많이 모인다면 지금 바로 가능한 일인가요?”

들뜬 샤를로즈를 무심히 내려보던 루아가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네. 악의 기운이 많이 모여 제힘을 회복한다면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럼 어서 제 악의 기운을 먹어 주세요. 루아.”

“죽을지도 몰라요.”

“저는 죽지 않아요. 분명 제 오라버니들이 저를 또 살릴 것이 분명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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