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몇천 년 전부터 악마는 존재했어. 인간과 공존하면서 말이지. 악마는 악한 기운을 먹고 자라. 인간들의 증오와 한을 먹고 자라는 것과 같아. 그러다가.”
“그러다가?”
“인간이 악마를 사랑하는 일이 발생했어. 원래는 금지된 사항이었거든. 인간과 악마가 사랑하는 일은. 공존은 허락해도 사랑은 세상에서 허락하지 않았지. 악마에게 홀리는 자들은 뼈만 빼고 빼빼 마르다가 죽는다고들 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샤를로즈, 지금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 아니야?”
“위험한 상황이지. 어머니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거 진짜 큰일이잖아. 이 망할 샤를로즈! 사고를 치면 대형 사고만 치는구나.”
제레미의 한탄에 유진은 다시 과거의 일에 대한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점점 인간과 악마의 사이에서 사랑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돼. 제국의 황족들까지 건드리는 악마들까지 생겨나게 되지. 그렇게 벌어진 전쟁이 1차 악마 전쟁이야.”
“그건 옛날에 아카데미 역사 시간에 들어 본 것 같아.”
“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악마들에게 홀리고 말았어. 세상을 지탱해 줘야 할 성녀 또한 말이지.”
“…….”
“우리 어머니도 악마 때문에 죽었어. 악마와 계약한 것 때문이지. 세간에서는 그저 병으로 죽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어머니는 악마에게 홀려 죽은 거야. 그걸 알고 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켜 주려고 했지만 악마에게 죽임당했어.”
“……그럼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악마에게 죽은 거야?”
제레미는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에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었다.
“네게 진실을 말해 준다면 너도 미쳐버릴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제레미.”
유진의 냉정한 어조에 제레미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참 좁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유진은 제레미가 충격받을 것을 예상해 제레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레미.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잃을 수 없지?”
“……당연하지. 샤를로즈는 어떻게든 그 악마 새끼한테서 지킬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 사냥꾼들이 필요해.”
“악마 사냥꾼? 그럼 샤를로즈 옆에 머무는 저 대악마도 사냥이 가능한 거야? 유진 형, 대책이 있었구나!”
제레미는 어서 샤를로즈의 옆에 붙은 괴물 새끼를 없애고 싶은 심정에 유진을 향해 다시 밝은 얼굴로 질문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제레미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유진을 향해 다시금 물었다.
“유진 형? 왜 대답이 없어? 응? 샤를로즈의 옆에 있는 저 괴물 새끼를 없앨 수 있는 대책이 악마 사냥꾼이 아니야…?”
“악마 사냥꾼이라고 해도 샤를로즈가 데리고 있는 대악마를 사냥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악마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놈이니까.”
“…하!”
제레미는 유진의 허무한 대답에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샤를로즈, 너는 왜 자꾸 내 마음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거야?’
제레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샤를로즈를 포기할 수 없어.
제레미는 힘이 풀린 두 다리를 애써 일으켜 세운 뒤, 유진을 향해 소리쳤다.
“유진 형, 그 악마 내가 죽일 거야.”
유진은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 제레미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안 제레미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악의 기운이 점점 차오르고 있다는 증표였다.
“유진 형. 샤를로즈에게 갈 거지?”
“억지로라도 가야 해. 그 대악마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 악마 사냥꾼들을 모아서 찾아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
“어째서?”
“한 방을 노리자는 거지. 강한 악마 사냥꾼들을 몰래 모은 다음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악마 사냥꾼들을 모집하는 것도 힘든 일이야.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거든.”
“그러니깐 시간을 두자는 거지. 어차피 우리가 알고 있는 샤를로즈가 그 악마에게 쉽게 죽을 리 없을 것 같으니까.”
제레미의 설득에 묘하게 넘어간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하기야 샤를로즈가 금방 죽을 애는 아니지.”
“형도 샤를로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깐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자. 너무 훅하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폐하의 곁을 지키더니 이제 조금은 머리가 굴리는 모양이네, 제레미?”
“그냥.”
샤를로즈를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아서.
제레미는 차마 속내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자신의 말을 듣고 샤를로즈에게 물든 거 아니냐며 걱정할지 몰라서 말이다.
***
한편, 샤를로즈는 방 안에서 루아에게 자신의 악의 기운을 나눠 주고 있었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목덜미에 제 날카로운 두 송곳니를 꽂은 다음 그녀의 악의 기운을 빨아 먹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루아에게 악의 기운을 빨리고 있었다.
루아의 회색 눈동자가 슬쩍 샤를로즈의 옆얼굴을 보았다. 아픈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그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보통 인간들은 이렇게 악의 기운을 먹는 걸 선호하지 않았는데.
끊어질 듯한 숨소리와 고통 어린 외침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은데 샤를로즈는 다른 인간들처럼 그러지 않아 정말 인간이 맞나, 루아가 잠시 생각했다.
“다 먹었어요? 다 못 먹었다면 자세가 불편해서 그런데 누워서-”
루아는 자신이 딴생각을 하던 걸 들킨 것처럼 얼른 샤를로즈에게서 제 두 송곳니를 빼내었다.
그리고 나서는 두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샤를로즈의 말끝을 잘라버렸다.
“다 먹었어요. 괜찮아요, 샤를로즈.”
“그래요? 보통 루아가 먹는 양이라면 평범한 인간은 기절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게요, 왜 샤를로즈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요? 보통 제가 인간의 악의 기운을 먹는 날에 그 인간은 죽거나 기절하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무서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이 세상에 원한이 참 많아서요. 그래서 악의 기운이 많이 쌓였나 봐요.”
“……인간이 악의 기운이 많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랍니다, 샤를로즈.”
샤를로즈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루아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인간이기를 포기했어요. 괴물처럼 살래요. 그게 더 나아요.”
평범하게 살기에는 이미 그른 것 같거든요.
샤를로즈는 뒷말을 생략했다.
평범하게 살았던 자신이 어느 역하렘 게임 속 유일한 악역에 빙의해 이렇게 푸대접받으면서 사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걸 루아에게 말하면 그조차도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기에.
샤를로즈는 자신이 사실 진짜 샤를로즈가 아니라는 걸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루아는 인형처럼 웃는 샤를로즈를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일반 인간이 아닌 것처럼.
***
아이비크니 황제인 해리슨는 오란 왕국과 전쟁을 벌일 참이었다.
그 왕국의 왕이 해리슨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좋게 좋게 내 조건을 들어주었으면 이런 일까지는 벌이지 않았을 텐데. 샤를로즈나 이 왕이나 왜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건지. 나 원 참.’
오란 왕국은 광대한 마력석 광산을 가지고 있어 다른 나라들에게 무역 국가라는 이름을 날린 유명한 왕국이었다.
하지만 아이비크니 제국의 꽤 괜찮은 조건을 오란 왕국에서 거절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비크니 제국과 인연을 끊은 나라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것은 즉, 아이비크니 제국을 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해리슨은 자신의 조건을 잠시 떠올렸다.
‘1000억 로아를 매달 주기로 하고 마력석 광산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조건이었지. 이 정도 가격을 부르는 나라는 아무 데도 없을 텐데. 왜 거절했을까. 죽고 싶어서 거절했나?’
해리슨은 음침하게 웃으며 전쟁에 나갈 준비를 완료했다.
해리슨은 안 그래도 최근에 샤를로즈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생기니 기분이 조금 좋았다.
아주 조금.
해리슨은 샤를로즈에게 편지 한 통을 달랑 보낸 뒤, 전쟁터로 떠났다.
그 편지는 샤를로즈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야 말았는데.
어느 때와 다름없는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샤를로즈는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어느 하녀의 목소리에 직접 방문을 열었다.
하녀는 샤를로즈가 방문을 열고 저를 내려보자 얼른 고개를 숙인 뒤, 해리슨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샤를로즈 아가씨, 폐하께서 편지 하나를 보냈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 그럼 저는 이만 다른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응. 가 봐.”
샤를로즈가 평소에 무서웠던 하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샤를로즈는 하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는지 편지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손끝으로 잡아 허공에 팔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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