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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120)

20화

“너희들도 요한과 같은 의견인가?”

오늘 샤를로즈에게 과하게 놀림을 받았던 루야와 주드엔은 뜻밖에도 요한과 같은 마음이었다.

루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티아가 사라지던 당일 샤를로즈는 티아의 방에 있던 목격자야. 티아를 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샤를로즈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주드엔도 루야와 같은 의견을 내었다.

“루야의 말이 맞습니다. 오늘 당한 건 분하지만, 티아를 마지막으로 본 건 샤를로즈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해리슨은 세 명의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쭉 둘러보더니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샤를로즈, 그 계집애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도망간 티아의 유일한 목격자니. 버릴 수도 없겠군.”

요한은 해리슨의 똥 씹은 듯한 얼굴을 마주 보며 또 다른 선택을 주었다.

“폐하는 샤를로즈를 우리들보다 더 싫어하잖아? 그럼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들어 볼래?”

“들어나 보지.”

해리슨은 요한을 향해 턱짓을 했다. 요한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샤를로즈와 약혼을 맺는 게 어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몇 번은 마주해야 하잖아. 우리는 샤를로즈에게 서슴없이 다가갈 수 있는데 폐하는 그러지 못한다고 한다면.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면 어쩔 수 없이 샤를로즈와 마주하게 되잖아? 어때, 내 다른 선택지는?”

‘약혼’이라는 단어에 해리슨은 들고 있던 술잔을 한 손으로 깨트려 버렸다.

콰지직!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잔을 들었던 해리슨의 오른손에 유리 파편이 박히며 피가 흘러 붉은 바닥 시트를 적셨다.

해리슨의 은회색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었다. 금방이라도 요한을 죽일 기세였다.

“미친 새끼. 선택지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나?”

“그럼 뭐 어떻게 하려고. 폐하는 샤를로즈와 손을 아예 안 잡게?”

요한은 빈정대면서 해리슨이 깨트린 유리잔들을 마법으로 모아 허공에 둥둥 뜨게 하였다.

“……잡아야지. 사라진 티아의 단서가 될 수 있는데.”

“그럼 방법이 없잖아. 샤를로즈와 약혼해. 폐하.”

“……하아. 요한. 다른 선택지는 없나?”

“난동을 피우는 샤를로즈를 묶을 수도 있고, 어느 때나 만날 수도 있는데. 약혼이라는 선택지밖에 없지. 다른 선택지를 떠올라도 이만한 선택지는 없는 것 같아.”

“현자라고 불리던 네가 그딴 해결책을 가져오니 돌아 버리겠군.”

“이게 최선이라고? 지금의 샤를로즈라면 폐하의 약혼을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네. 티아를 찾고 싶지 않아? 여기서 가장 티아를 아끼던 건 폐하 아니던가?”

해리슨은 요한이 말하는 사실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연한 입 안의 살결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티아만 다시 제 곁에 돌아온다면,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만 두 눈으로 본다면 아마 죽어도 여한이 없을 터이니.

해리슨은 한숨을 깊게 내리쉬며 요한이 건넨 최선의 선택지를 처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약혼은 티아가 돌아올 때 깨도 무방하니까.

사실 해리슨은 티아의 생일 파티에 그녀와 약혼을 하려고 계획을 했었다. 하지만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 그녀 때문에 약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못하고 샤를로즈에게 몇 달을 농락당하고 있었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약혼이라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해리슨은 다음 전쟁터를 떠올리며 그때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덤으로 샤를로즈의 약혼 선물로 적군 왕의 목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목을 본 샤를로즈는 분명히 소리를 지르거나 패닉 상태에 빠지겠지?

해리슨은 비스듬하게 웃으며 멍청하게 서 있을 샤를로즈를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

해리슨의 망상에 불과한 일이었다.

요한은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는 해리슨을 미친놈 취급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를로즈와 약혼을 해야 된다고 하니 진짜 돌아 버린 건가?’

그러면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해리슨은 금방 기분이 풀어지는 성격이기 때문이었기에.

***

조용한 샤를로즈의 방 안.

샤를로즈는 제 옆에 누워 저를 내려다보며 제 머리카락을 기다랗고 두꺼운 검지로 배배 꼬는 루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몇 시간째 계속 저런 상태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루아의 칙칙한 회색 눈에 생기가 없어 보였다.

샤를로즈는 본능적으로 루아의 부드러운 하늘색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가 몸을 흠칫 떨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배배 꼬는 행동을 멈추었다.

“…샤를로즈? 뭐 하는 거예요?”

“루아를 만지는 건데요? 루아는 저를 만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만져 보려고 하는데 안 되나요?”

루아의 텅 빈 회색 눈이 슬쩍 내려가 샤를로즈를 담았다.

안 될 거야 없지. 오히려 계약자의 스킨십은 악마의 힘에 도움이 된다.

루아는 눈을 부드러이 휘며 대답했다.

“제 모든 것을 만져도 상관없어요. 나의 유일한 계약자인 샤를로즈니까요.”

“그래요? 모든 것을 만져도 정말 상관없어요? 수치심 같은 건 안 드나요? 생각해 보니 악마는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거의 존재하지 않다고 봐요. 악마는 감정을 잃은 생물이라고도 불리거든요.”

“감정을 잃을 수만 있다면 저도 악마가 되고 싶어요.”

“인간이 악마로 변하는 경우는 극도로 희귀한 경우예요.”

“악마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나 보군요.”

“물론이죠. 만약에 샤를로즈가 악마가 된다면 이 세상은 망가질 수도 있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샤를로즈가 흥미로운 듯 밝게 웃으며 물었다. 루아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이미 샤를로즈는 저보다 더 뛰어넘을 정도로 악하거든요.”

“칭찬인가요?”

“악마에게 있어 이만한 칭찬은 없을 거예요. 악한 기운을 인간이 이만큼 가지기는 무척이나 희귀해요. 악한 기운은 무언가의 커다란 원망과 증오심에서 불러오거든요. 그런데 인간인 샤를로즈는 제 악한 기운을 뛰어넘고 있어요. 저는 그 악함을 먹고 더 자랄 거지만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날카로운 턱선을 손끝으로 따라 내려가며 속삭였다.

“좋아요. 저를 많이 먹어서 잘 자라 주세요. 루아.”

“네. 샤를로즈. 열심히 잘 자랄게요.”

루아는 샤를로즈를 꽉 껴안으며 낮게 읊조렸다.

마치 샤를로즈를 평생 놓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

샤를로즈는 대악마 루아와 함께 있으면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티아의 남자들이란 사내들이 멋대로 자신의 방에 들어올 때도 말이다.

샤를로즈의 첫째 오라버니인 유진은 샤를로즈가 대악마에게 마음이 홀렸구나 생각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유진의 생각대로 샤를로즈가 대악마에게 홀리기는커녕 관계가 바뀐 상황이었다.

오히려 대악마가 샤를로즈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샤를로즈의 말이면 뭐든 들어주는 충견처럼.

유진은 응접실에서 제레미와 함께 샤를로즈와 그 악마에 대한 대화를 가졌다.

“샤를로즈가 미친 것 같아. 아무래도 대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아. 큰일이야.”

“…그게 정말이야, 유진 형? 그러면 얼른 대악마를 다시 봉인해야 하잖아.”

“봉인도 하지 못 해. 그 악마 새끼가 기어코 선대 공작의 펜던트를 깨트리고 말았어.”

“그럼 샤를로즈는 어떡해!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지금 그분들이 찾아와도 샤를로즈는 웃으면서 받아 주고 있잖아! 이러다가 또 자살 시도라도 하는 거 아니야? 아아, 진짜 골칫덩어리야.”

샤를로즈의 둘째 오라버니인 제레미는 욱하는 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다가 끝에서 그녀에 대한 해탈함이 담긴 말을 중얼거렸다.

유진 또한 제레미와 같은 마음이었다.

저러다가 또 죽는다고 발악하면 어쩌나 싶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어미가 남겨 준 유서의 신성력으로 샤를로즈를 살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샤를로즈를 아예 살리기 위해서는 티아가 필요하다.

티아는 성녀의 힘을 이어받은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유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지금 상황을 한탄했다.

차라리 사라지는 건 티아가 아니라 샤를로즈였어야 한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긴 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레미는 제 형이 일어나는 걸 보고선 자신도 따라 일어났다.

“유진 형, 혹시 샤를로즈에게 갈 생각이야?”

“어. 지켜는 봐야지. 그 대악마가 샤를로즈를 통해 무엇을 할지 모르니까. 감시해야지.”

“업무는 괜찮아?”

“지금 업무가 중요한 게 아니야.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대악마가 봉인을 풀고 우리 저택에 돌아다니고 있어. 업무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해.”

“나는 공부에 대한 머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유진 형. 대악마가 세상에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난리야?”

유진은 제레미의 물음에 한숨을 내리 쉬며 그것도 모르냐고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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