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뭐하신 건가요?”
“그냥 깨물고 싶어서 깨물었는데, 싫어요?”
루아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싫지 않아요. 오히려 샤를로즈가 제게 스킨십을 하면 전 더 강해질 수 있으니-”
“루아.”
루아의 말을 끊은 샤를로즈는 그를 불렀다.
“네?”
“우리는 비즈니스에요. 절대로 사랑하면 안 돼요. 그럼 미래가 무척 비참할 것 같으니까.”
보통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에 빙의하면 여주는 이런 말들을 많이 했다.
절대 사랑하지 않을게요.
뭐, 그리고서는 남주와 사랑에 빠지고 해피엔딩을 보게 된 소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샤를로즈는 약간 달랐다.
사랑은 마음이 아프니 하지 말자고.
“인간은 악마에게 쉽게 홀려 금방 사랑에 빠집니다. 샤를로즈. 그대가 과연 정말 절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도발적인 발언에 샤를로즈는 활짝 웃었다.
“노력해 볼게요. 우리는 비즈니스. 절대로 감정을 가지면 안 돼요. 제가 누군가에게 죽더라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마세요.”
샤를로즈의 강압적인 명령에도 루아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긴 키스가 이어지는 것 같더니만 루아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나서 중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샤를로즈의 말대로 할게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대답에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검지로 배배 꼬며 작게 웃었다.
참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
샤를로즈는 남자 주인공들의 밀회를 몰래 듣고 이미 자신의 방에 들이닥친 그들을 보며 반겼다.
“다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길래 모두 제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거죠? 설마 제가 키우는 악마를 보려고 온 건가요? 하기야 소문은 금방 퍼지니까.”
“…악마?”
해리슨은 의문을 품고 샤를로즈의 옆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루아를 바라보았다. 루아의 회색 눈과 마주한 해리슨이 거만한 루아의 눈빛에 한쪽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샤를로즈?”
주드엔은 ‘악마’라는 단어에 치를 떨었다. 샤를로즈는 그의 화들짝한 반응에 꺄르르 웃었다.
“무슨 일이긴요. 별거 없어요. 그저 옛날에 세상을 멸망하려던 대악마를 제 손에 쥐고 있다고 보여 주는 건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주드엔?”
“……악마는 이 세상에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그건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죠. 게다가 악마와의 계약은 세상의 이치를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샤를로즈, 대체 당신은 제정신이긴 합니까?”
주드엔의 설교에 샤를로즈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였다.
듣기 싫은 건지 샤를로즈는 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딴짓까지 하고 있었다. 주드엔은 자신을 아예 무시하는 그녀의 반응에 울컥했다.
“사람이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 주세요. 샤를로즈. 당신은 여전히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구석이 있군요.”
샤를로즈는 주드엔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 말만 벌써 오라버니들에게 몇 번째 듣는 말이거든요. 좀 색다른 말 좀 해 볼래요? 그렇게 저를 까고 싶으면 색다르게 까라고요.”
주드엔은 열이 확 받아 무어라 하려고 샤를로즈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루야가 주드엔을 막아섰다.
“샤를로즈에게 화내는 행위는 그녀에게 졌다는 의미야. 그러니깐 참아, 주드엔.”
“……빌어먹을.”
주드엔은 평소 하지도 않은 욕지거리를 입에 담으며 뒤로 물러섰다.
뒤를 보고 있던 루야가 몸을 돌려 샤를로즈를 향해 다가갔다.
“무슨 일로 루야가 제게 올 생각을 하시나요? 늘 뒤에서 노려만 봤던 연약한 소동물 같은 분이.”
“네 빈정거림을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너도 잘 알잖아?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데, 그걸 왜 자꾸 제게 와서 들으려고 하세요? 전 티아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티아가 다시 돌아오는 날은 어렴풋이 알고 있어요.”
“3년 후라고 들었어.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루야가 진심으로 샤를로즈를 싫어하는 티를 내며 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예지몽을 꿨거든요. 기가 막히는 예지몽을요. 티아가 3년 후에 돌아오는 거지 같은 꿈을요.”
“네 예지몽을 지금 믿으란 소리야?”
“믿는 건 자유인데, 이렇게 막 몰려다니면서 저를 쪼아 대지는 말아 주세요. 슬슬 귀찮아지려고 하니까.”
루야는 저 망할 것은 어쩜 변하지 않고 똑같은지 탄성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샤를로즈는 자존감 높은 루야를 놀릴 만한 거리를 번뜩 생각해 냈다.
루아, 루야.
비슷한 이름.
샤를로즈가 키우고 있는 악마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루야를 놀리려고 했다. 심심하기도 했고, 이제 제게 적대심만 가지고 지랄하는 것들을 놀려 줄 때가 되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루아.”
“왜?”
“왜 부르시나요?”
“푸하하, 둘이 이름이 비슷해서 루야가 착각했나 보네요. 제 악마의 이름은 루아거든요. 루, 아.”
“루아, 라고? 이름이? 왜 내 이름이랑 비슷해?”
“따질 걸 따지세요. 루아는 수천 년을 산 악마예요. 고작 막 성인이 된 루야가 따질 일이 아닌 거죠. 이름이 비슷하면 왜요? 정감가고 좋잖아요.”
“저, 망할 것이!”
루야는 주드엔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이 샤를로즈에게 화를 내는 꼴이 되어 버렸다.
샤를로즈의 입가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왜 화를 내시고 그러세요? 찌질하게.”
샤를로즈는 감옥까지 갔다 온 마당에 뵈는 게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편이 생겨 오히려 자신감이 올라간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요한이 드디어 한 입 떼었다.
“그럼 샤를로즈, 넌 티아를 찾을 생각이 있나? 우리에게 협조해 줄 생각이 있냐고.”
샤를로즈는 잠시 고민하는 척 턱에 손을 올리더니 금방 답을 내렸다.
“물론이죠. 저도 지금 티아를 찾는 중이거든요.”
요한은 그러면 정보를 공유하자며 다른 이들보다 오히려 우호적으로 샤를로즈를 대했다.
“그럼요. 정보 공유는 필수 아니겠어요? 대륙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티아를 찾아내야 하는 건 아무래도 제 몫이기도 하죠. 폐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언니인 넌 왜 티아를 찾지 않냐고. 그래서 고민 좀 해 봤어요. 아, 언니니까 동생을 찾아야 하는구나, 깨달았거든요.”
해리슨은 저를 언급하는 샤를로즈에 신경질 내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니꼬운건지.
요한은 긍적적인 샤를로즈의 반응에 살짝 놀랬다.
티아를 괴롭히기만 하는 나쁜 언니가 아니었던가. 조금은 개과천선이란 걸 한 걸까?
요한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어차피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슨 변덕이 있어 샤를로즈가 티아를 직접 찾겠다고 발을 나서는 건지 궁금해졌다.
“근데, 샤를로즈. 넌 티아를 싫어하잖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티아를 직접 찾겠다고 나서는 거야?”
샤를로즈는 찌뿌둥한 어깨에 두 팔을 위로 올리며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티아가 돌아와야지 제가 퇴장할 수 있거든요. 이 망할 세상 속에서. 그래서 협조하려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당신들과 말이죠.”
샤를로즈의 폭탄급 발언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티아를 열정적으로 찾으려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깐 다들 꺼져 주실래요? 루아랑 낮잠 좀 자고 싶은데. 그리고 매일 찾아오는 건 괜찮은데 귀찮게만 굴지 말아 주세요. 특히 폐하. 말씀이 너무 많아요.”
“…저게, 진짜.”
해리슨은 샤를로즈를 향해 기분 나쁨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그녀에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신의 감정이 점점 샤를로즈에게 무뎌지는 걸 안 해리슨은 소름이 돋았다.
‘이러다가 샤를로즈랑 원수지간에서 끝나겠어. 소름 돋게.’
해리슨은 콧방귀를 뀌며 먼저 샤를로즈의 방에서 나섰고, 그렇게 한두 명씩 차례대로 그녀를 슬쩍 노려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나갔다.
샤를로즈는 제 방에서 나가는 저 귀찮은 것들이 조잘대지 않고 얌전히 나가자 왠지 모를 희열감을 느꼈다.
‘아, 왠지 남자 주인공들이 내 발밑에 수그린 기분이 드네. 나쁘지 않아. 오히려 기분이 좋은데?’
샤를로즈는 악마처럼 실실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참 기분 좋은 날이네.’
샤를로즈는 거창하게 비가 오려고 준비하는 어두컴컴한 이 날, 처음으로 기분이 날뛰는 걸 마음속으로 느꼈다.
***
티아스에 다시 모인 그들은 다시 한번 회의에 들어갔다. 샤를로즈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어떻게 그녀를 믿을지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서였다.
해리슨은 떫은 표정으로 도수 높은 보드카가 들어 있는 얼음 컵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아무래도 샤를로즈와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딱 봐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먼저 말문을 텄다.
“샤를로즈의 말을 믿나?”
“못 믿을 것 없지.”
요한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해리슨의 마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어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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