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루야는 해리슨이 누구를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아마 루야 말고 주드엔 역시 그녀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데 도가 텄어. 안 그러나, 요한?”
“그래. 샤를로즈는 정말 미쳤어.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벌여?”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또 자살 시도를 했나 보지요?”
주드엔의 물음에 해리슨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래. 그것도 나와 요한이 준 꽃다발을 들고 제 방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아예 우리를 얕잡아 보는 거지. 하아, 어떻게 하면 샤를로즈를 적당히 괴롭힐 수 있을까? 우리만 피해 보고 있잖아.”
“그 계집애는 내가 칼을 들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야.”
해리슨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초조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샤를로즈가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죽는 꼴을 볼 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은 티아를 원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샤를로즈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언제나 툭툭거리며 저를 농락했던 계집.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해리슨은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들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샤를로즈 이야기는 접어 두고 티아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 좀 하죠.”
주드엔은 샤를로즈에 휘말려 티아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들을 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주드엔, 넌 뭔가 티아에 대한 행방을 찾은 게 있나?”
요한이 묻자, 주드엔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어디로 증발한 건지.”
주드엔은 늘어지게 숨을 천천히 뱉었다.
자신의 구원자가 사라진 지 벌써 두 달 아니 석 달 정도 흐른 것 같다.
보고 싶습니다, 티아.
주드엔은 티아가 없으면 분리 불안증을 겪고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더 힘들었다.
[주드엔, 네 옆에는 내가 있잖아. 그러니깐 열심히 살아 줘.]
티아가 방긋 웃으며 자신을 껴안아 줬던 기억이 떠오르며 우울감을 감추지 못했다.
해리슨은 점점 침울해져 가는 분위기에 한마디 말을 툭 내뱉었다.
“샤를로즈가 3년 뒤에 티아가 나타난다고 했어. 그렇지, 요한?”
“아아, 그랬었지. 샤를로즈가 티아에 대해 뭔가 아는 눈치였어.”
“그럼 지금 당장 샤를로즈를 고문하거나 괴롭혀서 티아의 단서를 찾아내는 게 어때?”
세상에 사랑받는 천사 같은 치유사인 루야의 거친 어투에 해리슨은 손사래를 쳤다.
“샤를로즈 그것이 입을 열었으면 이미 열었겠지. 이번에는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는 작전이 나을 것 같은데.”
해리슨은 샤를로즈를 꼬시는 걸 포기했다. 그 계집애를 꼬시는 건 돌멩이를 꼬시는 것보다 어려웠다.
“걔를 어떻게 잡고 늘어질 건데?”
요한이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해리슨은 크흠, 헛기침하더니 악마같이 웃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샤를로즈 옆에 있는 거야. 계속, 계속. 그러다 보면 티아의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봐. 서로 싫어하는 사이에서 붙어 있다고 상상을 하면 샤를로즈도 끔찍하고 물론 우리도 끔찍하겠지만. 그래도 무심코 티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
해리슨의 해결책은 간단했지만, 그들이 하기에는 꽤 난이도 있는 해결법이었다.
하루에 한 번 보는 것도 싫은데 시간 날 때마다 꼬박꼬박 옆에 붙어 있다.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을 듯싶다.
하지만 해리슨의 제안에 요한과 루야는 마음에 드는 듯 찬성을 외쳤고 주드엔은 어쩔 수 없이 분위기상 찬성했다.
해리슨은 내일부터 하자며. 시간이 있는 자들은 샤를로즈를 달달 볶으라고 명한 뒤 아지트에서 모두 해산했다.
그들은 몰랐다.
샤를로즈의 강력한 편이 있다는 사실을.
***
욕실에서 샤를로즈와 제 오라비들의 다툼은 금방 끝이 났다. 제레미가 유진을 데리고 욕실에서 나가 버린 탓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는지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루아. 미안해요. 제 가족들이 예의가 없죠?”
루아는 악마인 제게 미안하다고 하는 인간은 처음 봐 샤를로즈를 멍하니 보았다.
“루아?”
“아. 미안할 필요 없어요. 어느 누가 인간이 악마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나요?”
“그냥요. 사과하고 싶어서요. 앞으로의 나날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미리 사과하는 거예요. 제가 좀 제정신 나간 녀석들이랑 엮여 있거든요.”
루아는 샤를로즈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제정신 나간 인간들? 그런 인간들을 상대하는 건 나쁘지 않지.’
샤를로즈는 루아의 희미한 미소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러니깐 나의 악마님. 제발 세상을 망가트려 주세요. 그래야 막힌 제 숨통이 열릴 것 같아요.”
“이 세상엔 정말 샤를로즈의 편이 없습니까?”
루아는 계속해서 세상을 부수자는 샤를로즈의 말에 의문감을 느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그의 질문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네. 없어요.”
상처 하나 받지 않은 올바른 듯한 목소리.
루아는 지금까지 만난 인간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샤를로즈를 신기하게 보았다.
모든 걸 버리려는 인간.
제 목숨까지도.
욕실 안에 있었던 루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샤를로즈를 안아 주었다. 그의 젖은 몸이 그녀의 드레스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샤를로즈는 갑작스러운 루아의 포옹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냥 악마에게도 동정을 받고 있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대에게는 착하게 굴게요.”
“좋은 악마분이시네. 원래 악마들은 다 이런가요?”
루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럴 리가요. 샤를로즈는 저를 풀어 준 은인이잖아요. 그리고 계약자이기도 하고.”
“음. 은인보다는 저는 루아를 대놓고 이용하고 있는데요.”
“이용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샤를로즈. 그대의 악한 기운만 있다면 그대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죠.”
“그럼 일단 맨몸은 부끄러우니까 수건으로 몸 좀 닦고 루아가 입을 옷을 가져올게요.”
그 순간, 루아는 자신이 맨 몸인 걸 알고서는 얼른 욕실 안에 몸을 숨겼다.
“생각보다 몸이 단단하네요. 그럼.”
샤를로즈는 루아의 귀여운 행동에 피식 웃으며 그에게 입힐 옷을 가지러 갔다.
“…부끄러움도 없네요. 샤를로즈는.”
욕실에서 나가는 샤를로즈를 보며 루아가 중얼거렸다.
양쪽 귀가 사과처럼 잘 익은 붉은색을 띠며.
***
샤를로즈는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몸이 된 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시간은 물 흐르듯 잘 지나갔다.
루아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졌다.
아무런 사건 없이 한 달이 흐르니 샤를로즈는 나른해졌다.
다만 매일 매일 한 명씩, 두 명씩 찾아와 응접실에 샤를로즈를 만난다고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고 있었다.
물론 샤를로즈는 따로 오는 그들을 만날 만큼 좋은 관계가 아니기에 내버려 뒀다. 금방 포기하겠지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샤를로즈의 오라버니들인 유진과 제레미는 그들이 계속 찾아와도 자신을 건들지 않았다.
‘어째서? 혹시 나 빼고 다들 이상한 걸 준비하려는 건가?’
샤를로즈는 침대맡에 앉아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나요? 샤를로즈?”
루아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샤를로즈의 악한 기운을 먹기 위해 뒤에서 포옹을 한 다음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그냥요. 저를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참 이상해서요. 그 개 같은 것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한숨부터 나오네요.”
“그 개 같은 것들이 샤를로즈의 적인가요?”
“적이면 적이라고 할 수 있죠. 왜냐, 전 여동생을 미워하는 나쁜 언니거든요.”
“음. 여동생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는데 어떤 애인가요? 샤를로즈처럼 악한 기운이 많은 인간인가요?”
샤를로즈의 악한 기운을 적당히 흡수한 루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착한 애예요. 저와 다르게 악한 기운은 없을 것 같네요.”
“그런데 이 한 달간 샤를로즈의 여동생분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가출했어요.”
“어째서요?”
“그러게요. 왜 가출했을까요? 그녀의 주변은 늘 밝고 행복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녀만을 사랑했어요. 이런 행복한 시간을 왜 직접 버렸을까요?”
루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툭 내뱉었다.
“혹시 샤를로즈가 괴롭혀서 나간 건 아니죠?”
“반은 맞고 반은 아닐 수도 있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 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적이 없거든요.”
“음. 그렇군요.”
“사랑받고 싶어서, 진정한 사랑을 위해 생각해 봤는데 다 부질없어요.”
“샤를로즈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적이 있나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어째서?”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요.”
샤를로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아에게 손을 뻗었다.
“루아. 아침 산책이라도 할까요?”
루아는 새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샤를로즈의 손을 빤히 보더니 그녀의 손위에 가벼이 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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