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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120)

16화

루아는 샤를로즈의 악한 기운이 점점 강해질수록 먹음직스러웠다. 악한 기운이 강할수록 악마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그리고 잡아먹혀 죽거나 악마에게 저주를 받아 평생을 괴롭게 살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이 인간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말이다.

“일단 루아 씻을까요? 제가 씻겨 주고 싶어요.”

루아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괜찮은데요. 혼자 씻고 싶어요. 샤를로즈.”

“제가 깔끔하게 씻기고 싶은데…안 될까요?”

샤를로즈는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루아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욕실에 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샤를로즈와 루아를 본 사용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샤를로즈는 2층에 있는 커다란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루아를 집어넣었다. 그녀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은 다음 온도 체크 후 그에게 어서 욕조 안에 들어가라 일렀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알몸은 보지 않을 테니까 어서 들어가요. 깨끗하게 씻어야 지독한 냄새가 사라질 거예요.”

“……절대 보지 마세요. 샤를로즈.”

루아는 제 깡마른 몸이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정기도 먹지 못하고 지하 감옥에 팔백 년간 갇혀 고문까지 받고 있었으니 몸을 만들 시간도 없었다.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따뜻한 물 위에 붕붕 떠다녔다. 투명했던 물이 조금씩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고작 몸 한 번 담갔을 뿐인데.

샤를로즈는 첨벙, 하는 물소리가 들리자 몸을 돌렸다.

때에 찌든 하늘색 머리카락은 물에 닿음으로써 제빛을 뽐내고 있었고, 샤를로즈를 보는 회색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조금만 씻겨도 아름다운데, 다 씻기면 엄청나게 미인이겠어요. 루아.”

“……원래 악마는 강할수록 아름다워요. 인간을 홀리려면 그만한 외형이 필요해서요.”

샤를로즈는 욕조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루아에게 손을 뻗었다. 찌든 때가 아직 묻은 뺨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가 그들의 열기를 후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 같이 신나게 세상을 가지고 놀아 봐요. 루아.”

샤를로즈는 눈매를 반달로 휘어 매혹적이게 웃었다. 그 웃음에 루아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를 유혹하려는 인간은 처음 봤다. 수 천 년을 살아왔지만,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인간은 난생처음이다.

“샤를로즈. 정기를 먹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드세요. 어차피 저는 죽어도 살아나는 몸이니. 마음껏 드세요. 루아.”

루아는 제 뺨에 얹은 샤를로즈의 손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잡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신음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루아는 이렇게 맛있는 정기는 처음 먹어 봤다. 중독될 것만 같아.

이대로 계속 먹고 싶어.

악마의 욕구는 참을성이 없었다. 한 번 이성을 놓으면 미친 듯이 정기를 먹는 사악한 존재였다. 멈출 줄 모르는 루아의 진득한 입맞춤에 샤를로즈는 잠시 눈꺼풀을 내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루아. 당신은 이제 제 편이죠?”

샤를로즈의 물음에 루아는 입맛을 다시며 샤를로즈의 손을 놓아 주었다.

“네. 계약을 맺었으니 우리는 하나에요. 그리고 악마는 쉽게 죽지 않아서 아마 샤를로즈의 방패가 되어 줄 수도 있겠네요. 단, 정기만 꾸준히 먹어도 된다는 가정하에요.”

“제 정기를 언제 먹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죽어도 그 새끼들이 날 살릴 게 뻔하거든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양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다 씻으면 우리 잠이나 자요. 어차피 다음 날 아침이 되어야 난리를 칠 수 있어요.”

“샤를로즈의 편은 저밖에 없나 보네요.”

“네. 루아밖에 없네요.”

샤를로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루아의 넓은 등을 물로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충 루아를 다 씻기고 긴 수건을 가져오려는데, 잠갔던 욕실 문이 박살이 났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욕실 문이 덜렁거렸다.

그리고 욕실 안에 들어오는 건 유진과 제레미였다.

샤를로즈는 2차전이라도 하자는 건지, 한숨부터 나왔다.

제레미는 샤를로즈가 다른 놈을 씻기는 걸 보니 눈이 뒤집히는 거 같았다. 왠지 모를 짜증 남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샤를로즈!”

“아, 오라버니들. 씻으려고 욕실에 오셨나요?”

“샤를로즈. 너 지금 무슨 일을 한 건지 알아?”

다혈질인 제레미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샤를로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저 제 악마를 씻긴 거뿐인데, 뭐가 그리 문제에요? 아, 또 루아가 세상을 멸망시킬까 두려워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아니잖아. 샤를로즈.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건 죽고 싶다는 말과 다름없어. 그건 알기나 해?”

이번엔 유진이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속 안에 감추고 샤를로즈에게 쪼아 댔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사라지려면 이 악마가 필요하거든요. 자살도 그들에게 엿을 먹이긴커녕 저만 아프잖아요. 그럴 바에는 가장 센 놈을 구해 도망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샤를로즈, 너는 정말, 악마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네가 사랑했던 어머니도 악마에게 정기를 다 빼앗겨 죽은 거야. 자살이 아니라. 세간에서는 그냥 자살로 죽었다고 하지만 악마에게 잡아먹혀 죽은 거야. 너도 그럴 셈이야?”

유진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다다다 쏘아붙였다. 하지만 샤를로즈는 그 둘의 말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라버니들. 루아는 제가 알아서 관리할 테니 신경 끄세요. 언제부터 제게 이런 관심을 두었나요? 티아가 없으니 이제 제가 보이기 시작한 건가요?”

샤를로즈는 지겹다는 듯 혀를 찼다.

어차피 티아만 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3년 뒤 티아가 샤를로즈를 죽인다고 하여도 살아날 방법이 있으니 괜찮았다.

그것보다는 지금 샤를로즈는 힐링이 필요했다.

아주 많이.

그러니 가출한 여동생을 얼른 찾아 준 뒤, 가짜는 빠져 주기로 마음먹었다.

샤를로즈는 이런 호화스러운 생활보다는 자유를 원했다. 그녀의 주변인들이 죄다 미친 새끼들밖에 없으니 그녀 역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피폐함의 절정이 오른 지금 샤를로즈는 퇴장이 아닌 도망을 선택했다.

현실 세계에 돌아갈 확률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 예정이다.

샤를로즈는 일단 티아를 찾아야 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고서 떠날 예정이었다.

루아와 함께라면 꽤 괜찮겠지.

“루아, 우리 평생 함께 지내요.”

샤를로즈는 상의를 벗은 채 욕조에 앉아 있는 루아를 뒤에서 껴안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꼬셨다.

그 모습에 유진과 제레미의 눈빛은 그녀를 향한 몹쓸 집착으로 반짝였다.

“오라버니들, 조심하세요.”

샤를로즈는 루아의 뺨에 입을 살짝 맞닿으며 경고했다.

“아, 그리고 티아를 찾는 데 저도 도움을 줄게요.”

유진은 갑작스러운 샤를로즈의 발언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넌 티아를 싫어하고 괴롭히던 나쁜 언니였잖아.”

제레미가 유진의 말을 대신해 주는 듯 유진보다 앞에 나오며 말했다. 샤를로즈는 고민할 틈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티아를 다시 데려오고 나서 저는 떠날 거예요.”

“샤를로즈. 그건 네가 마음대로 정하는 문제가 아니야.”

유진은 한숨을 거듭 내쉬며 샤를로즈를 말렸다.

하지만 샤를로즈는 유진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듣지 않았다.

“어차피 저만 없으면 화목한 남매가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요. 이물질인 저는 빠지겠다고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예요?”

“네가 레베크 가문에서 도망가게 내버려 둘 줄 알아?”

유진이 서슬 퍼런 눈빛을 하며 샤를로즈에게 묘한 짙은 갈증을 느꼈다.

“내버려 두세요. 좀.”

샤를로즈는 이제 질린다는 듯 허공에 손짓했다.

“어서 나가요. 루아가 부끄러워하잖아요. 그리고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 주변에서 떠나겠다는 게 무슨 문제가 돼요? 아, 어머니의 유언장? 그 유언을 어기면 죄책감이라도 크게 들어 못 사나 보죠?”

“샤를로즈, 너 정말!”

샤를로즈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저는 어머니의 인형이 아니에요.”

“샤를-”

“이제는 죽은 공작 부인의 어여쁜 인형이 아니란 말이에요.”

샤를로즈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유진과 제레미는 할 말을 잃었다.

인형이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인형이 감정을 얻고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형이었던 샤를로즈가 혼자 떠나려고 한다.

***

오랜만에 ‘티아스’에 모인 그들 중 해리슨과 요한의 표정이 어두웠다.

루야는 심각한 얼굴을 하는 해리슨과 요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해리슨은 짜증이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그 계집애 말이야.”

그 계집? 아아. 샤를로즈를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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