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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20)

14화

“지독한 냄새가 나네요.”

“……그대는 내가 무섭지 않나요?”

샤를로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무서울 거 다 경험해서 별로 무섭지 않네요. 그냥 감옥에서 친구가 생긴 기분이 드네요. 부담스러우면 떨어져 있을게요.”

“괜찮아요. 제게 현혹당할 수 있으니 그런 것만 조심하세요.”

악마는 의외로 착했고 예의도 발랐다. 샤를로즈는 남자 주인공들과 제 오라버니들은 왜 인성부터가 그따위인지 한숨만 나왔다.

차라리 세상을 멸망시킬 악마가 더 천사같이 보였다.

샤를로즈는 개 같은 게임 속 주인공들을 속으로 욕했다.

루아는 제 옆에 딱 달라붙어 뚱한 표정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샤를로즈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보통 같은 인간이었으면, 악마라는 이유로 루아 곁에 있기를 거부했다. 루아는 지금까지 이 지하 감옥에 갇히면서 레베크 가문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많이 봐 왔다.

‘악마의 감금실’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레베크 공작가에 눈에 띄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으니.

그런데 800년 동안 이 감옥에 갇혀 있었더니 유례없는 레베크 공작가의 일원이 처음으로 악마의 감금실에 갇히는 걸 보게 되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텅 비어 보이는 금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여자였다. 악마는 종종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

사람을 잡아먹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스킨십을 통해 정기를 빼앗아 먹는다. 하지만 악마의 힘이 봉인된 상태여서 본 힘을 낼 수 없었다.

지금 그 본능이 깨지려고 한다. 처음 만난 이 여자의 정기를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악마와 계약한 자도 아닌데 말이다.

루아가 몸을 계속 움찔거리니 샤를로즈가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잠시 떼었다. 그리고 두 손을 그의 뺨에 얹어 저를 보게 하였다.

“왜 떨어요?”

눈을 가리는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에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동요하고 있었다.

이 맛있는 먹잇감에 말이다.

팔백 년 동안 이렇게 크게 욕망이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루아는 눈꺼풀을 살포시 내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대를… 먹고 싶어서요.”

샤를로즈는 뜬금없는 루아의 대답에 놀란 기색 한 번 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저를 어떻게 먹고 싶은데요? 저는 악마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그대의 정기를 먹고 싶어요.”

“루아가 내 정기를 먹으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야.”

악마의 계약자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루아는 뒷말을 애써 참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방금 전 말은 잊어 주세요.”

괜히 소란을 피우면 그 망할 레베크 가문의 가주가 찾아와 고문을 할지도 모른다. 루아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기에 말썽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하나, 제 옆에 있던 샤를로즈의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악마님, 악마님. 우리 세상을 멸망시킬까요? 악마님은 내 정기가 필요해 보이고 나는 이 망할 집구석에서 나가고 싶거든요. 솔직히 말해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좀 사고를 많이 쳤어요.”

“……그대는 제정신이 아니군요.”

샤를로즈는 어떻게 알았냐며 놀란 듯 눈동자를 살짝 크게 떴다.

“같이 미쳐 볼래요? 악마님? 재밌을 것 같아요.”

이미 이름을 알려 줬음에도 ‘악마님, 악마님’하는 꼴이 저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루아는 들뜬 숨을 내뱉으며 살짝 다문 입술을 열었다.

“같이 미치면 그대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 건가요?”

걱정스러운 루아의 어조에 샤를로즈는 미련 하나 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람들은 내가 미친 줄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악마님과 계약한 걸 알아 봤자 놀라지도 않을걸요?”

그 말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루아는 이런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제 정기를 먹으려면 옷이라도 벗어야 하나요?”

“아니-”

샤를로즈는 간편한 얇은 드레스 자락 중앙에 있는 단추들을 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루아가 황급히 막았다.

“왜요? 원래 정기는 몸으로 주는 게 아닌가?”

“손만 잡아도 돼요.”

“시시한데요.”

“지금은 그 정도만 해요. 샤, 샤를로즈?”

샤를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풀린 단추를 다시 잠갔다. 그러자 루아의 숨소리가 깊게 퍼졌다.

“루아, 제가 당신을 구원하면 당신은 제힘이 되어 줄 수 있나요? 계속 죽는 건 너무 미련해 보여서요.”

“미안하지만 샤를로즈. 지금 제힘은 봉인된 상태예요. 풀기 위해서는 악한 기운이 필요해요. 그러면 봉인이 풀려요.”

“악한 기운? 예를 들면 뭐요?”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고 있거나 평소에 악한 행동을 한 자들에게서 많이 느껴지는 기운이죠.”

루아가 예를 든 사람은 모두 샤를로즈에 해당하였다.

“그거 딱 전데요?”

“……강한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있나요? 그 사람들과 싸우나요?”

“네.”

싸우는 건 맞겠지. 자꾸 시비를 걸어오니까.

루아는 샤를로즈와 마주 앉았다. 이제야 조금 얼굴이 보이는 듯싶었다.

“한 번 그대의 악한 기운을 맡아 볼게요.”

루아는 샤를로즈의 손목에 제 입술을 비볐다. 악마란, 인간들은 유혹하며-정기를 잡아먹는- 그러다가 악마가 커 버리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어둠의 힘을 얻게 된다. 루아가 그 사례였다.

‘뭐지, 이 강한 기운은?’

샤를로즈는 손목에 찬 느낌에 눈을 흘금 내렸다. 입술이 차네. 원래 악마들은 입술이 찬가? 그가 얼른 그녀의 손목에 입술을 떼었다.

“이런 기운은 처음 느껴 봐요. 악한 기운을 이렇게 크게 가진 인간은 샤를로즈, 그대뿐일 거예요.”

샤를로즈는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싶었다.

뭐, 될 대로 돼라지.

“그럼 우리 계약하죠. 당신의 봉인된 힘을 풀어 줄 테니 마음껏 뛰어놀아요.”

샤를로즈는 이 망할 게임 세상을 망가트리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녀를 싫어하는 주변인들에게 트라우마를 주기 위해 자살을 계속했지만, 오히려 힘이 드는 건 그녀였다.

트라우마는 무슨, 자신을 비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가족인 첫째 오라버니인 유진은 샤를로즈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샤를로즈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루아는 사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팔백 년간 이 지하 감옥에서 썩어 있으니. 저 여자의 악한 기운으로는 충분히 제 봉인을 풀 수 있었다. 게다가 계약까지 맺어 버리면 팔백 년 전 세상에 날뛰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루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연기하더니 샤를로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즈의 두 입가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나는 도망갈 거야. 이제 제발 나를 붙잡지 말아 줘. 다들 날 싫어하잖아. 나 좀 내버려 둬.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건 잠시 보류하고. 일단은 이 게임 속 주인공들 틈에 끼인 이물질인 난 얼른 사라져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했었는데. 운이 좋게도 난 최고의 악마를 손에 넣었고, 그 악마를 이용해 엿같은 게임 속에서 다시금 퇴장을 준비할 예정.’

샤를로즈는 여전히 퇴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루아는 그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세상에 나갈 생각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유진은 샤를로즈가 감옥에서 또 깽판을 치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감에 서류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놈의 샤를로즈, 샤를로즈.

유진은 두통이 아렸다.

왜 그 애가 자꾸 생각나고 걱정이 되느냐 이 말이다. 지금 티아를 찾기도 바쁜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니 유진은 주방으로 향했다.

직접 샤를로즈에게 식사를 대령할 생각이었다.

아직 하루의 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반성하고 있는지 확인도 하려고 했다.

“공작님. 공작님이 명령하신 대로 샤를로즈 아가씨의 식사를 화려하게 준비해 봤습니다.”

레베크의 주방을 담당하는 주방장 리프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샤를로즈의 식사를 보여 주었다. 유진은 꽤 호화스러운 식사를 보며 잘했다며 칭찬해 주었다.

하녀가 자연스럽게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유진이 하녀가 든 쟁반을 빼앗았다.

“고, 공작님?”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지. 너희는 일자리로 돌아가.”

“알겠습니다.”

하녀는 고개를 숙인 뒤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쟁반에 든 윤기가 흐르는 스테이크와 부라타 치즈 샐러드 그리고 후식인 초콜릿 아이스크림까지.

이게 정녕 지하에서 반성하는 사람의 식사인가 싶었다.

뭐, 화려하게 차려 달라고 했으니 받아들여야지.

유진은 그 쟁반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유진은 지하실을 싫어했다.

눅눅하고 습하고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유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지하 감옥이 있는 곳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지하 감옥이 보였다.

‘왜 이리 조용하지?’

평소의 샤를로즈라면 꺼내 달라며 소리를 빽빽 지르며 울고 불며 할 텐데.

유진의 눈매가 세로로 찢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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