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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20)

12화

“그거 가지고 싶으면 제레미 오라버니가 가지세요. 저는 필요 없거든요.”

“정말로?”

“네. 아예 제 선물들을 다 가져가 줬으면 하네요.”

샤를로즈는 제 미간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유진 오라버니.”

“왜.”

“티아가 이제 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찾는 시늉도 하지 않으니. 설마 티아를 버린 건가요?”

여자 주인공의 위치는 원작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사라진 티아, 행방불명!

이렇게 적혀져 있었고 3년 후라는 갑작스러운 전개로 티아가 복수심에 일그러진 얼굴로 나타난다.

그리고 샤를로즈의 목숨을 가져가지. 남자 주인공들을 이용해서 말이다.

샤를로즈에 빙의한 지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되는 지금. 그녀는 이 빌어먹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적응하면 안 되는데, 왜 적응하는 거야. 무엇보다 샤를로즈를 싫어하는 여자 주인공 오빠들이 너무 잘 대해 주는 거 같은데. 왜? 어째서?’

샤를로즈는 큼, 헛기침하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 오라버니. 요즘 들어 저를 꾸짖지 않으시네요? 이제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나요?”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유진의 손이 샤를로즈의 시비조에 잠시 멈추었다.

“널 가족으로 인정하는 날은 없어. 그저 넌 어머니의 유품일 뿐이다. 샤를로즈. 적당히 기어올라.”

유진의 싸늘한 어조에 샤를로즈는 겁먹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겠지. 샤를로즈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

샤를로즈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이번엔 제레미에게 시비를 걸었다.

“제레미 오라버니는 왜 자꾸 제 주변에 얼쩡거리세요? 귀찮게. 뭐, 제게 괴롭힘당하는 게 취미이신가요?”

“……난 네가 죽을까 봐.”

제레미는 생각보다 겁이 많았다. 자신을 안타깝게 보는 시선이 역겨웠다. 샤를로즈는 피식하고 웃었다.

“왜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릴까 봐 그런 거죠?”

“그래! 그게 왜! 넌 어차피 이 가문에서, 여기서 도망가지 못해. 나와 형이 널 막을 거니까.”

샤를로즈는 발악하는 제레미를 흘겨보고선 고개를 홱 돌렸다.

이놈도, 저놈도 다 꽝이다.

제대로 된 녀석이 한 명도 없다니.

이래서 피폐물이라고 하는 건가.

샤를로즈의 금안에 시꺼먼 어둠이 자욱하게 깔렸다. 그녀는 다른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

“유진 오라버니. 내일 그들이 오면 제 방으로 와 달라고 해 주세요.”

“또 무슨 꿍꿍인 거냐, 샤를로즈.”

유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샤를로즈를 응시했다. 그녀는 아름답게 웃으며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제 방에 초대하고 싶어서요. 아 참. 방은 제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매일 아침에 찾아오는 남자 주인공들을 위해 샤를로즈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남자 주인공들 앞에서 또 죽을 예정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게 환심을 사려던 마음도 싹 사라지겠지.

샤를로즈는 티아의 남자들에게 넘어갈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 녀석들의 얼빠진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한 달 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기를 바라며.

샤를로즈는 내일이 오기를 바라며 제 방으로 향했다.

알고 있을까.

샤를로즈의 방은 저택에서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이었다는 것을.

유진과 제레미는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

샤를로즈는 하녀에게 돈을 쥐여 주며 의사에게 수면제를 사 오라는 명령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하녀는 샤를로즈가 무서워 그 돈을 받고 의사에게 수면제를 받아와 샤를로즈에게 바쳤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유진과 제레미는 샤를로즈가 약 없이 잘 자는 줄 알았다.

샤를로즈는 어리석은 제 오빠들을 떠올리며 수면제가 담긴 약통을 서랍에서 꺼냈다. 그리고 두세 알 털어 넣었다.

이래야 잠을 잘 수 있다.

샤를로즈의 몸은 이미 수면제에 의존한 상태이기에 약 없이 잠이 들기 매우 힘들었다.

약을 먹고 난 후 샤를로즈는 나름대로 제 방을 청소한 뒤, 깨끗해진 방 안을 둘러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이제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내일은 재미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네.

샤를로즈의 촘촘하고 검은 속눈썹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붉은 달이 아름답게도 세상을 비추던 밤이었다.

***

짹짹, 아침 새가 샤를로즈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눈을 뜬 샤를로즈는 인기척들을 느꼈다.

“우리를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지?”

익숙하고도 낯은 음성이 샤를로즈의 방에 울려 퍼졌다.

샤를로즈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해리슨 그리고 요한을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좋은 아침이 아닌데. 레베크 공작이 네 방으로 가야 한다 해서 기껏 왔더니 자빠져 자고 있네. 우리 샤를로즈.”

해리슨은 너무 늦게 일어난 거 아니냐며 샤를로즈를 비꼬았다. 요한 역시 해리슨의 말을 거들었다.

“난 기다리는 걸 제일 싫어해. 샤를로즈.”

둘 다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해리슨은 장미를, 요한은 백합을.

“그래도 기다리셨으니깐 선물은 받아 줄게요. 그런데 이 한 달간 왜 자꾸 제 주변에 얼쩡거리세요? 혹시 티아에 대한 단서를 얻고 싶은 건가요?”

“우리 샤를로즈는 눈치도 빠르네.”

해리슨는 입을 비죽거렸다.

요한은 꽃향기가 질색이라는 듯 얼른 꽃다발을 샤를로즈에게 건네주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난 꽃이 싫어. 그런데 영애들은 보통 꽃을 좋아한다고 해 가져왔어. 내 성의다. 샤를로즈.”

백합 꽃다발을 받아든 샤를로즈가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성의가 아니라 제게 환심을 사 티아의 위치를, 단서를 알려고 하는 거겠죠.”

“이제 눈치챘으니 좀 알려 줘. 샤를로즈.”

해리슨 역시 장미 꽃다발을 샤를로즈에게 건네주었다.

새하얀 꽃과 붉은 꽃이 샤를로즈의 품 안에 가득 찼다.

“이거 하나는 알려 줄게요.”

샤를로즈는 침대에서 벗어나 창가로 향했다.

해리슨과 요한은 티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샤를로즈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3년 후에 티아는 돌아올 거에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

둘은 샤를로즈를 아예 신용하지 않은 모양이다.

샤를로즈는 어찌 되었든 자신은 티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제 자신의 계획을 실천할 셈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 위에 맨발로 올라섰다.

샤를로즈가 무엇을 하려는지 해리슨이 먼저 알아챘다. 그다음 요한이 한숨을 내쉬며 제 앞머리를 손으로 뒤로 넘기며 그녀를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망할 샤를로즈! 어서 내려와. 내가 억지로 널 잡기 전에.”

해리슨이 샤를로즈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티아가 오기 전까지 넌 죽으면 안 된다고, 샤를로즈. 절대로.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샤를로즈의 반응이 더 빨랐다.

샤를로즈는 두 사람이 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삐딱한 미소를 지은 채 창문에서-저택의 꼭대기- 떨어졌다.

퍽, 소리가 들려오며 샤를로즈의 주변에 핏물이 퍼졌다.

아름다운 꽃들은 그녀의 죽음을 축복해 주는 듯 화려하게 샤를로즈의 몸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샤를로즈의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해리슨과 요한은 머리끝까지 열이 받았다.

저 망할 계집애는 언제까지 자신들을 농락할 것인지.

창밖을 내다보는 그들의 눈빛에 광기가 반들거렸다.

이를 으득 갈던 해리슨이 레베크 공작을 불렀다.

저택 바깥이 샤를로즈의 시체로 어수선하기 시작했다.

유진과 제레미는 해리슨과 요한의 부름에 얼른 저택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죽어 버린 샤를로즈를 보면서 한탄했다.

“하아, 샤를로즈. 이번에도 또?”

“살려 내야지, 형.”

유진과 제레미는 샤를로즈의 살아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이것이 공작 부인이 남긴 마지막 능력이었다. 샤를로즈를 레베크 공작가에게서 절대로 떠나지 못하게 만든 죽은 전 공작 부인의 힘이었다. 일기장에는 샤를로즈가 자신을 따라 죽으면 이 방법을 쓰렴. 꼭 누군가가 볼 거라 예상한 듯 쓰여 있었다.

그 방법을 다시 떠올린 유진과 제레미는 성스러운 기운을 모았다. 그리고 죽어 버린 샤를로즈에게 그 기운을 쏟아부었다. 아무런 접촉 없이.

샤를로즈는 아주 쨍쨍 빛나는 햇볕을 쬐며 죽었다.

심장이 멈추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샤를로즈의 초점 없는 금색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하여 샤를로즈는 또 살아났다.

지겹게도 제 오빠들이 저를 죽게 놔두지 않는다.

죽음의 고통도, 이 게임 속에 미련도 남지 않은 샤를로즈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꽃다발을 겨우 안고 있었다.

샤를로즈의 이마에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허공을 잠시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금색 눈에 그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새하얗게 부르튼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개새끼들.”

샤를로즈는 제 주변에 있던 여자 주인공을 위한 남자 주인공들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역시 샤를로즈라고 생각했다. 신분, 권력, 명예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막 나가는 미친 악역인 그녀는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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