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해리슨은 한 번 들은 샤를로즈의 대답을 물고 늘어졌다.
“글쎄요. 폐하. 알아서 생각하세요.”
“샤를로즈, 폐하께 말버릇이 그게 뭐야. 사과드려.”
제레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샤를로즈를 쪼아 댔다. 그녀는 해리슨을 흘끔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과를 해 봤자 뭐가 달라지나. 어차피 이미 엎질러진 물. 담기는 어렵지 않나.
그래도 해리슨은 한 나라의-폭군으로 불리는- 군주였다.
이렇게 자신을 하찮게 대꾸하는 건 이 세상에 아마도 샤를로즈뿐일 것이다.
샤를로즈의 캐릭터는 막무가내에 제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교양 지식도 없고 장점이라곤 오로지 얼굴이 환상적으로 예쁘다는 점. 그거 하나였다. 예의도 없고, 무서움도 없었다.
지금까지 샤를로즈로 살아 본 결과, 그녀는 미쳤다.
아니고서야 남자 주인공들과 제 오라버니들을 학대하는 악역이 나올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스며드는 게임 속에서는 나오지 않은 샤를로즈의 기억들을 토대로 보면 지금 저 남자 주인공들은 샤를로즈의 목을 조르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그야 티아를 내쫓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그리 단정 지었으니까. 샤를로즈의 말은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는 놈들이었다.
아무리 샤를로즈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샤를로즈에게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아. 제레미 공자.”
해리슨은 애초에 샤를로즈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감히 제게 저런 말투와 언행을 할 수 있을까.
점점 분위기가 싸해졌다.
유진의 보라색 눈동자가 샤를로즈 때문에 차게 식었다. 대체 얼마나 더 추락해야 네가 제정신을 차릴까.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그녀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의 유언도 있었겠지만, 이건 개인의 감정이었다.
그래도 샤를로즈와 가족이긴 했다. 서류로 얽혀 있는 가족.
한 달 동안 같이 있어 본 결과 샤를로즈는 얌전하고 사고도 딱히 치지 않았다. 예전에 봤던 그녀는 다 연기였는지 그녀는 제 곁에서 얌전히 굴었다.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유진은 샤를로즈의 반듯한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텅 비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유진은 샤를로즈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는데, 요한이 선수 쳤다.
“샤를로즈. 그래서 우리를 다과회에 부른 이유는 뭐지? 네 자살 기도 사건에 관해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른 건가?”
누가 들어도 독기가 서린 어조였다. 요한은 샤를로즈를 노려보며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샤를로즈는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런 독이 묻은 관심은 썩 반갑지 않았다. 샤를로즈는 말문을 텄다.
“다 같이 친해지면 좋잖아요. 티아를 위해서라도 서로 관계를 좁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다들 저를 보면 티아를 내쫓았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티아를 괴롭히기만 했지, 내쫓지는 않았거든요.”
샤를로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착한 척? 이제야 반성하는 척? 다 필요 없다. 여기서 그녀의 원래 행동이 아닌 다른 행동을 하면 더 오해를 받을라. 그녀는 게임 속 원작 샤를로즈의 역할에 푹 빠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샤를로즈 그 자체가 되어 가는 걸 느꼈다. 그래서 조금 불안했다.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러나 점점 샤를로즈가 되어 가면서 현실 세계에 가야 하는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저 샤를로즈의 몸이 원래 자신의 몸 같았다. 김단이라는 사람은 원래부터 없던 사람처럼.
샤를로즈는 제 말에 태클을 걸지 않는 남주인공들과 여주의 오빠들을 흘겨보며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에 제가 죽는다면 울어 주세요. 제가 죽어 기쁨의 눈물을 흘려 주세요.”
“원래 영애들끼리 하는 다과회에 이런 주제가 옳은 건가?”
루야는 샤를로즈의 이질감에 그녀를 살벌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는 영애들과 한 번도 다과회를 연 적이 없어서요. 아마 도망간 티아가 잘 알지 않을까 싶네요. 티아는 저와 다르게 사교 활동을 열심히 했으니까요.”
해리슨은 제 턱을 매만지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샤를로즈의 첫 다과회의 상대가 우리라는 뜻인가?”
“네. 영광이네요. 당신들과 첫 다과회를 여니.”
샤를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다 적의감이 느껴졌다.
자신을 진정으로 봐 주는 샤를로즈의 편이 없다.
순간, 끔찍한 외로움이 샤를로즈의 어두운 마음을 강타했다.
샤를로즈는 우울증이 심한 악역이었다. 자신은 레베크 전 공작 부인의 인형이라며, 세상 사람들에게 사람 취급받지도 못한, 어느 때 보면 불쌍한 악역이었다.
이런 악역의 끝은 무엇이 있겠는가.
샤를로즈가 정적을 깨고 다시 그들을 향해 말을 꺼냈다.
“샤를로즈가 죽는다면 평화가 찾아올까요? 그대들의 의견이 듣고 싶어요.”
샤를로즈는 어차피 3년 후면 죽는다.
그 전에 죽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차피 샤를로즈는 두 번이나 죽은 몸이었으니.
(진짜 샤를로즈가 자살했고, 두 번째는 김단이 샤를로즈의 몸으로 자살했다.)
전개가 바뀔까?
아니면 지독한 현실 세계로 돌아가 김단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샤를로즈의 질문에 당연한 거 아니냐며, 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샤를로즈는 그럴 줄 알았다며 아름답게도 웃었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어요.”
샤를로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 선물을 보고 웃어 줬으면 좋겠어요.”
다들 대체 무슨 선물이길래 이리 시간을 끄냐는 듯 차갑게 대꾸했고, 샤를로즈는 드레스 자락을 올려 오른쪽 허벅지에 두른 가터 홀스터 안에 있던 칼을 빼내었다.
샤를로즈가 칼을 빼내는 걸 늦게 본 그들은 화들짝 놀랐다.
“다시는 보지 마요. 다시는.”
샤를로즈는 기쁘게 웃으며 따사로운 햇볕 아래 제 심장 부근에 칼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아아, 아름다운 햇살이구나. 눈부셔.
샤를로즈는 주변의 시끄러움이 들려왔지만, 점점 멀어져 갔다.
울컥, 피가 역류해 입으로 토해 냈다.
새하얀 이브닝드레스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샤를로즈의 금색 눈동자가 점점 초점을 잃어 갔다.
그리고 샤를로즈의 죽음을 직접 본 그들은 적잖은 충격에 몸이 살짝 굳어 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가슴에 꽂힌 칼을 빼내 주지 않았다.
그래, 악역의 끝은 죽음뿐이지.
어차피 죽을 인생.
어차피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도 모를 인생.
미리 죽어도 나쁘지 않았다.
화창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달달한 디저트들이 후각을 쑤시던 그날.
샤를로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새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샤를로즈는 저를 싫어하는 놈들을 다 부른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듯 칼은 샤를로즈의 몸 안에 깊게 박혀 있었다.
다과회가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유, 유진 형. 샤, 샤를로즈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건 제레미였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평소 행실과는 다르게 몸도 바들바들 떨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티아를 위한 남자들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지독한 피비린내에 인상을 쓰다가 한 명씩 일어나 샤를로즈가 쓰러진 곳으로 발걸음했다.
그중 해리슨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샤를로즈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쉽게 죽으려고 했어? 샤를로즈?”
해리슨의 말에 동의하듯 그들은 아무 말 없었고, 유진과 제레미는 그저 충격에 휩싸여 이성을 잠시 잃었다.
샤를로즈가 자살 시도를 했다.
이번으로 본 것만 두 번째다.
유진은 샤를로즈의 새하얀 드레스를 물들인 새빨간 핏물을 보자 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꾸 죽으려고 하는 그녀를 계속 막아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지 못했다.
왜 눈치를 못 챘지?
애초에 티아를 사랑하는 남자들을 데리고 다과회를 열자는 샤를로즈의 정신 나간 발상을, 아니 잔꾀를 알지 못했다.
유진은 원인 모를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제레미는 괜히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는 한탄함에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루야에게 애절하게 부탁했다.
“루야 님, 제발 샤를로즈를 살려 주세요.”
샤를로즈를 친가족처럼 여기지 않았던 거 아닌가? 루야의 검은색 눈동자가 제레미에 시선을 두었다.
“어째서지? 제레미 공자는 샤를로즈를 싫어했던 게 아니었나?”
“샤를로즈가 죽으면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부탁합니다. 루야 님.”
“티아를 괴롭혔던 저 계집애를 죽게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루야는 샤를로즈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치유사 루야는 그녀를 무척이나 혐오했다. 증오? 아니 혐오에 가깝지.
가만히 죽은 샤를로즈를 내려다보던 요한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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