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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20)

9화

이제는 조금 해탈했다. 막 사랑해 달라고 애절하게 매달리기보다는 샤를로즈가 죽으면 과연 눈물 한 방울 흘려 줄 사람들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순수한 의도의 질문이었다.

“아니. 내가 왜 네가 죽는다고 울지?”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깨지 않았다.

“그나저나 샤를로즈. 얼른 자렴. 내일 다과회를 열려면 일찍 일어나 네 몸단장부터 시작해 바쁠 테니까.”

“유진 오라버니,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유진은 그저 다과회에 모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러 왔을 뿐인데, 샤를로즈가 자꾸 제 아까운 시간을 잡아먹는다.

귀찮지만, 질문 따위야 뭐 대충 대답하면 되니.

“말해.”

“절 놓을 생각은 절대로 없죠?”

“없어.”

“그럼 됐어요. 잘 자요. 유진 오라버니. 내일 다과회가 무척이나 기대되네요.”

유진은 샤를로즈의 밤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의 방에서 나가 버렸다.

남보다 조금 못한 사이가 되었다.

샤를로즈는 닫힌 문을 잠시 응시했다.

보통의 유진이라면 이런 것까지 세세히 알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핍박을 주며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이 한 달간 관계가 아주 조금 완만해진 것 같다. 자신의 질문도 받아 주는 꼴을 보아하니.

“지긋지긋해. 그렇다고 현실 세계에서의 내 생계가 좋은 편도 아니지.”

여기에 있든, 현실로 도망가든.

불행한 건 똑같았다.

샤를로즈는 침대에 누웠다. 반듯하게 누운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내뱉었다. 내일의 다과회에 자신이 미친 짓을 벌이면 남주인공들과 제 오빠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정말로 궁금했다.

샤를로즈는 베개 밑에 숨겨 둔-주방에서 몰래 가져온 프렌치 나이프- 것을 생각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너희는 날 살릴까?’

김단은 샤를로즈의 몸과 동화된 상태였다. 엄청난 우울감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퇴장하고 싶지만, 그녀의 퇴장을 원하지 않은 놈들에게 엿을 먹일 작정이었다.

‘이런 미친 짓까지 벌이면 분명 나를 놔줄 거야. 암, 그렇지.’

샤를로즈는 일단 눈을 붙이기로 했다.

밤은 길고도 기니까.

***

샤를로즈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들이닥친 하녀들의 손에 몸단장과 치장을 시작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새하얀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머리는 반으로 묶어 가벼운 붉은 끈으로 리본을 매었다.

본래 같았으면 더 화려하게 하라고 하녀들에게 소리를 질렀겠지만, 샤를로즈의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은 가짜였다. 진짜가 아니었다.

그리고 샤를로즈를 무서워하던 하녀들도 그녀가 얌전하게 구니 긴장감을 풀며 아름답게 그녀를 치장했다.

“다 되었습니다. 샤를로즈 아가씨.”

샤를로즈는 화장대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흘겨보다가 허공에 턱짓했다.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하녀들은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채고서는 빠르게 샤를로즈의 방을 빠져나갔다.

괜히 꼬투리 잡히면 힘이 드니.

혼자 남겨진 샤를로즈는 드레스를 끌고서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베개 뒤에 손을 넣었다.

날카로운 것이 잡혔다. 샤를로즈는 오른쪽 발을 침대 위에 살짝 올려 치마를 올렸다. 그리고 예전에 구한 가터 홀스터를 오른쪽 허벅지에 매어 그 안에 칼을 넣었다.

똑똑똑.

“샤를로즈, 너 빼고 다 모였어. 얼른 나와.”

제레미는 유진의 명령으로 나오지 않은 샤를로즈를 데리러 왔다. 그녀는 그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얼른 침대에 발을 내리고 옷매무새를 바르게 하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샤를로즈는 죽을 준비를 완료했다.

***

남자들만 있는 다과회라 그런지 어둡고 칙칙했다.

“샤를로즈는 언제 오지?”

해리슨은 제일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꼰 채 미간을 좁혔다. 유진은 제레미가 데리러 갔으니 금방 올 거라고 답했다.

“그나저나 샤를로즈가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불렀는지 모르겠군.”

요한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샤를로즈의 다과회 초대장은 처음이라-사실 신기해서-그 다과회에 응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을 꾸밀지 궁금하기도 했다.

샤를로즈가 자살 기도를 한 뒤 조금 성격이 누그러졌다는 소문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 망할 계집애가 퍽 착해졌을 리가. 요한은 그녀를 속으로 조롱했다.

한편 테이블 중앙 왼편에 앉은 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티아를 위한 남자들.

티아가 구원해 준 남자들.

어디가 나사 하나 빠져 있는 미친놈들.

유진은 그들을 그리 정정했다.

솔직하게 말해 저들과 자신과는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자꾸 티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싫었지만, 내치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사랑스러운 제 막내 여동생이 구원한 놈들은 대륙에서 이름 꽤 알리는 귀하신 분들이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가문을 위해 저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샤를로즈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떨어지고 있지만.

“남자들만 있는 다과회는 처음 아닌가. 징그럽군.”

루야가 눈앞에 달달하기 그지없는 디저트들을 보며 질색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루야.”

해리슨은 샤를로즈 하나 때문에 사이가 서먹한 사람들끼리 뭉친 것이 우스웠다.

‘그 계집애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우리를 초대해?’

해리슨은 한 나라의 군주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바빴지만, 저번에 샤를로즈에게 굴욕을 맛본 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판단해 이 다과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티아를 사랑하는 다른 놈들까지 다 초대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그래서 레베크 공작. 샤를로즈가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다과회를 열고, 우리를 초대한 겁니까?”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주드엔이 유진을 향해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샤를로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유진은 샤를로즈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제 여동생인데 관심이 없나 보군.”

요한이 유진에게 태클을 걸었다. 유진은 그 태클이 익숙하듯 받아쳤다.

“친여동생이 아닌데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있을까요. 대마법사 요한님.”

“너무 우리 샤를로즈에게 무심한 거 아닌가.”

유진의 뻔뻔한 태도에 해리슨이 울상을 지었다.

“우리 샤를로즈라니, 해리슨, 당신도 정신이 나갔군.”

요한은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티아도 없는 다과회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모인 장소에 오래 있어 봤자 싸움뿐일 것이다.

물론 아무도 티아에게 선택받지 못했지만.

그들 사이에 무언가의 신경전이 오갔다.

그 사이, 구두 소리가 들려오며 다과회의 주인공 샤를로즈가 제레미와 함께 걸어왔다.

샤를로즈는 꽃이 화려하게 핀 정원 중앙에 익숙한 남자들이 있는 걸 보고선 차게 웃었다.

‘진짜로 다 왔네.’

한 달 동안 유진 때문에 죽을 시도를 해 보지 못했다. 오늘은 티아의 남자들이 다 같이 찾아온 데다가, 무엇보다 유진과 제레미는 티아를 위한 남자들 때문에 샤를로즈에게 시선을 주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감히 예상했다.

“어머, 오셨군요. 다들. 제 다과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를로즈는 입가를 매끄럽게 올리며 예의를 차렸다.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네가 처음이야. 샤를로즈.”

해리슨은 샤를로즈를 보자 좁혀지는 미간을 검지로 툭툭 건드리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해리슨뿐만 아니라 요한 역시 비뚜름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다.

“뭐, 이런 기다림도 신선하잖아. 다들, 그러지 않아?”

루야가 이 상황이 웃긴지 키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고, 그 옆에 앉아 있던 주드엔은 말을 아꼈다.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아하니 루야의 의견에 암묵적 동의를 한 듯하다.

상쾌한 바람이 샤를로즈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풍성하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허공에 춤추듯 살랑거렸고, 반달이 된 금색 눈동자는 어둠이 자욱하게 껴 있었다.

이런 샤를로즈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사를로즈에게 악감정만 남아 있는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로즈. 중앙에 앉아.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야.”

유진은 샤를로즈를 보며 중앙에 앉으라 명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앙에 앉았다.

제레미는 유진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렇게 섬뜩한 다과회가 시작되었다.

***

다과회는 샤를로즈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아무도 대화를 이어 가려고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은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나마 대화할 만한 상대가 샤를로즈밖에 없었다.

해리슨은 인형같이 무감정한 얼굴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샤를로즈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샤를로즈. 듣자 하니 자살 시도를 했다던데. 왜 죽으려고 한 거지?”

해리슨의 질문에 딴짓을 하고 있던 그들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쏠렸다.

샤를로즈는 이 많은 남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니 떨떠름했다.

“자살 기도가 아니라 불면증이 심해서 자려고 했던 건데요? 폐하. 소문을 착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착각할 일은 없다. 샤를로즈. 티아가 돌아올까 봐 무서워 자살하려고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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