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유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나가는 샤를로즈를 보지 않았다.
“지치는군.”
유진 역시 종일 샤를로즈와 있느라 진이 다 빠졌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그는 누구와도 일하는 장소에서 같이 있지 않았다.
샤를로즈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꾸미고 있는 걸까.
유진은 아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검지로 두드렸다.
“제발, 얌전히만 있어 줘. 샤를로즈.”
집무실에서 떠난 샤를로즈를 향한 유진의 작은 외침이었다.
***
샤를로즈는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어쩌지?”
3년 동안 이런 압박을 받고 살다가 티아가 돌아오는 날 죽어야 하나?
‘그때까지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저 망할 놈들에게서?’
절대 못 버텨.
이 게임 속에서 샤를로즈에게 있어 돌파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샤를로즈의 주변에는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투성이었다. 하기야 막말에 폭력까지 행사하는 그녀를 좋아해 주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샤를로즈는 침대에 대자로 누운 다음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앞으로의 일들이 어떤지는 샤를로즈의 시점으로 외전이 나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몰랐다.
게다가 야반도주라도 했다가는 계속 붙잡힐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나?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런데 3년 후가 되서 티아에게 죽으면 현실로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잖아.’
원래의 몸 주인인 진짜 샤를로즈는 자살을 했던 것 같았다. 마지막 기억에서 수면제를 다 털어 넣고 공작 부인에게로 가고 싶어 하는 내면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다음 김단이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샤를로즈는 원작 게임 속에서 악행만 저지르지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남자 주인공들에게 처단당해 죽는 악역이었다.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악역이 아니란 소리다.
잠깐만, 죽음?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해 꿈에서 보았던 샤를로즈가 했던 것처럼 자살 시도를 했더니 현실로 잠깐 돌아갔었지.”
그리고 샤를로즈의 몸을 신관이 성력으로 치유해 다시 게임 속으로 빙의했고.
샤를로즈는 금색 눈을 번뜩 떴다.
‘그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죽어야 해. 죽음도 퇴장의 일부니까.’
혼자 퇴장하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샤를로즈는 만약에 이 게임 속에서 살아가도 저 주인공들 틈에서는 살아가기 싫었다. 평생 핍박받으며 살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녀는 일단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정말 스스로 죽어야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
***
샤를로즈의 몸에 다시 빙의한 지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샤를로즈는 유진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고, 제레미는 그녀를 보며 막말을 퍼부었지만 어째선지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했다.
샤를로즈가 죽으면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거니깐. 제레미는 마음속이 쓰렸다.
자신의 마음은 이러한데 정작 샤를로즈는 뻔뻔하게도 잘 지내고 있었다.
샤를로즈의 주변인들은 그녀가 또 무슨 짓을 할지 걱정보다는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불안해하는 듯했다. 어느새 제레미 역시 유진의 집무실에 눌러앉게 되었다.
(샤를로즈의 자살 기도 사건 때문에 황제가 제레미에게 휴가를 준 덕분에 일하지 않고 있다.)
“우리 다과회를 하는 게 어때요? 티아의 남자들과 함께요.”
“……샤를로즈, 너 지금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건 알고 있지?”
샤를로즈의 옆에 앉아 있던 제레미가 얼굴을 굳혔다.
“왜 정신 나간 소리예요? 저도 티아를 원하는 남자들과 친해지고 싶은데요.”
사실 샤를로즈로 빙의하고 나서 남자 주인공들을 제대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티아가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레베크 공작저의 발걸음을 끊게 되었다.
샤를로즈는 남자 주인공들과 제 오빠들을 전부 모인 상태에서 잔인한 일을 벌인 셈이었다.
한 달 동안 유진에게 끌려다니고 제레미에게 꾸지람을 들으며 갑갑하게 살아왔다.
한 번쯤은 멋대로 굴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니로서 티아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티아에게 적합한지 평가하고 싶어서요.”
“유진 형, 샤를로즈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감히 누가 누구를 평가한다는 건지.”
“좋아.”
“…? 유진 형?”
제레미는 갑작스러운 유진의 허락에 어리둥절했다.
“정말요? 정말 그분들을 다시 볼 수 있어요?”
“대신 그분들의 뺨은 때리지 마.”
“제가 감히 그 고귀하신 분들을 어떻게 때려요. 농담하지 마세요. 유진 오라버니.”
샤를로즈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농담이 지나친다는 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형, 진심으로 다과회를 열거야? 그놈, 아니 그분들을 초대해서?”
“샤를로즈가 원하잖아. 한 번쯤은 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한 달 동안 죽은 듯 살았잖아. 한 번쯤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형, 그분들이 샤를로즈의 다과회에 올 것 같아?”
“오게 만들면 되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분들은 티아가 없으면 우리 공작저에 올 사람들이 아니란 소리야.”
“초대에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 안 그러니, 샤를로즈?”
유진의 심드렁한 어투에 샤를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지 않으신다면 우리끼리 다과회를 열어요.”
샤를로즈의 금안이 햇볕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나는 너희가 너무나도 싫어.’
한 달 동안 샤를로즈로 조용히 살아 봤다.
정말 지독하리만큼 샤를로즈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 싫어.
김단은 샤를로즈에 빙의되고 나서부터 샤를로즈의 성격과 행동이 몸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 달이나 갇혀 살았다.
사람은 변하고 또 변한다.
그 변한 사람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샤를로즈는 유진과의 하루를 끝내고 밤이 되어 제 방에 들어가면 우울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마치 몸이 우울해야 한다고 반응하듯이 말이다.
점점 그녀는 피폐해졌고, 외로움에 사무쳐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럼 초대장은 내가 직접 써 보낼 테니 답변은 기대하지 마. 샤를로즈.”
“고마워요. 유진 오라버니.”
샤를로즈는 인형같이 인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유진과 제레미가 저를 보지 않아 천천히 올린 입가를 내렸다.
***
유진은 샤를로즈에게 말한 대로 티아의 남자들에게 다과회 초대장을 보냈다.
웃기게도 모두 초대에 감사하다는 똑같은 문장이 담긴 초대에 응하는 편지가 레베크 공작저로 쏟아졌다.
다과회는 내일임에도 오겠다는 걸 보니 유진은 이놈들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유진은 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샤를로즈의 방으로 향했다.
자고 있으려나, 아니면 또 미친 짓을 벌이려나.
가끔 샤를로즈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공허한 눈빛에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는 그녀를 보자 마음이 뒤숭숭했다.
어머니가 아끼신 인형.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애가 죽으려고 발악하고 있다.
좋은 가문에 입양되었으면 좋게 살면 될 것을, 왜 죽으려고 하는 걸까.
유진은 샤를로즈의 방 앞에 섰다.
그리고 가볍게 노크했다.
“샤를로즈, 들어간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창가에 서 있는 샤를로즈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붉은빛이 감도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를로즈. 뛰어내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유진은 이제는 샤를로즈의 행동이 지긋지긋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샤를로즈가 아니꼬운 모양이다.
하기야 한 달이 넘도록 티아의 소식은 접하지 못했고, 샤를로즈는 죽으려고 하니. 유진은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아뇨. 오늘은 달빛이 예뻐서 보고 있었어요.”
“거두절미하고 네 다과회에 그분들이 오기로 했어. 그것도 내일 말이지.”
“정말요? 저는 다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샤를로즈는 여전히 유진에게서 등을 돌린 채 이야기했다.
“샤를로즈. 요새 네가 얌전해서 불안해. 예전처럼 날뛰지 않으니-”
“유진 오라버니. 제가 소중해요?”
샤를로즈의 물음에 유진은 열었던 입술을 굳게 닫았다.
샤를로즈가 소중하다? 글쎄…….
어머니가 남겨 둔 유품과도 같으니 소중한 건 맞았다.
그렇지만, 가족으로서 소중함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유진은 낮은 음성이 잇새 사이로 고요히 퍼졌다.
“가족으로서는 소중하지 않지.”
“티아가 돌아오면 저는 죽어요.”
저번에도 같은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유진은 헛소리 좀 그만하라며 샤를로즈를 다그쳤다.
“유진 오라버니. 만약에 티아가 다시 돌아오는 대신 제가 죽으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울어 주실 건가요?”
샤를로즈는 솔직히 이 거지 같은 가족들에게 애정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현실 세계에서 없던 가족이 생긴 탓이라 그런지 기분이 묘했다. 왜 자꾸 저런 질문들을 하는지 그녀는 제 입을 때리고 싶을 심정이었다.
애정 결핍이 심한 샤를로즈에 빙의해서 그런지 더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예민하고 악해졌다. 공작 부인이 죽은 후 누구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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