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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20)

5화

꼴 보기 싫은 적을 만났다는 적의감이 다정함 뒤에 숨어 있었다.

“왜, 말이 없어? 너답지 않게.”

샤를로즈는 멈추었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왜 만나도 샤를로즈와 성격이 비슷한 놈과 만나지?’

샤를로즈의 한쪽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모습에 그는 방긋 웃었다.

“샤를로즈. 이런 거지 같은 파티를 만들어 줘서 참 고마워.”

그는, 아이비크니 제국의 황제이자 신하들 사이에 폭군으로 자리 잡은 군주였다.

그의 이름은 ‘해리슨 리스 아이바크니’.

남자 주인공 중 샤를로즈를 제일 싫어하는 놈이었다.

“폐하.”

샤를로즈는 일단 질러 보자는 식으로 해리슨을 낮게 불렀다.

해리슨은 어서 말해 보라며 두 눈썹을 스윽 올렸다.

“저는 제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내쫓은 적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샤를로즈는 특유의 악랄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그녀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 이 사태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어떻게든 이 장소에서 빠져나가 도망가야 해.’

샤를로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갸우뚱거렸다.

“여전하구나, 너는.”

“저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폐하. 오히려 폐하께서 ‘우리 샤를로즈’라며 다정히 불러 주셨는데…. 혹, 미치신 건 아닌지 걱정되옵니다.”

해리슨은 헛웃음을 내뱉었으며 들이밀었던 제 뺨을 검지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우리 샤를로즈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아파서 말이야. 내 뺨을 때린 건 우리 샤를로즈 뿐이었으니까. 그 충격으로 미쳤을지도 모르겠네.”

꼭 뺨을 때렸던 일에 대해 사과하라는 의미로 들려오네?

샤를로즈는 이에 기가 죽을 리 없었다.

조금 전은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 주인공에 놀라 아무것도 못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목적은 퇴장이다.

이 망할 게임 속에서 퇴장하며 단명할 팔자를 바로 고쳐야 했다. 가늘고 길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미친 전개부터 바꿔야 했다.

아무래도 샤를로즈까지 사라지면 더 난리가 날 것 같으니.

길들이는 건 무리.

그렇다고 사랑을 주는 것도 무리.

하물며 뺨을 또 때리는 건 더욱 무리.

샤를로즈는 뱅글뱅글 돌아가지 않았다. 무조건 직진이었다.

어서 이 게임이 끝나기를.

“폐하, 우리 샤를로즈가 폐하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들어나 볼까?”

“이곳에서 나가려면 어느 쪽이 좋을까요? 북쪽? 남쪽? 서쪽? 동쪽? 아니면 저 높은 하늘?”

“우리 샤를로즈는 가문의 퇴출이 아닌 입장을 해야 하는데 이걸 어쩌지?”

해리슨은 울상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너를 떠나보낼 마음이 없는데?”

이런, 미친.

샤를로즈는 순간적으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그렇지, 저 남자 주인공은 공략하기도 무척 힘든 놈이었지.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직진이 아닌 유턴을 해야 했어.’

샤를로즈 역시 해리슨을 따라 울상을 지었다.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퇴장이라니, 갑자기 내게 관심이라도 받고 싶어졌어? 티아도 내쫓았겠다, 수월하게 내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겠네. 아주 많은 관심을.”

샤를로즈는 저 뒤에 들려오는 ‘아주 많은 관심을.’이 어쩐지 불안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폐하. 제가 없어지면 평화가 찾아올 텐데…. 평화 좋아하시잖아요.”

“나는 말이야. 평화 말고 지옥을 좋아해.”

“지옥은 너무 무섭잖아요.”

“아니, 내 천사가 사라졌는데 지옥이 무서울 리가.”

역시 만만치 않아.

샤를로즈는 한숨은 깊게 내쉬며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티아를 내쫓은 적 없습니다. 개구쟁이 같은 여동생이 갑자기 사춘기가 와 가출한 거지 저는 티아를 쫓아낸 적은 없습니다. 아까 한 말 정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오호라, 가출이라. 흥미롭네. 그럼 개구쟁이 여동생을 찾아오는 건 언니의 몫 아니겠어?”

“오라버니들도 계시는데 굳이 제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티아를 내쫓은 적 없다며. 그럼 찾아와 봐.”

샤를로즈의 만행을 눈앞에 생생하게 봐 왔던 해리슨은 그녀를 도발했다.

‘대화를 끊어야 해. 이러다가 3년이 아니라 1년 안에 죽겠어.’

샤를로즈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다 우연히 제 옆에 있던 꽃을 꺾어 해리슨의 귀 뒤에 꽂아 주었다.

“어머, 우리 폐하 너무 아름다우시다. 꽃도 귀에 꽂았겠다, 이제 화원에 볼일이 끝난 것 같습니다만.”

해리슨은 예상 못 한 공격에 얼굴을 굳혔다.

‘꽃? 귀?’

사르륵.

해리슨은 샤를로즈의 머리카락을 당겼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제 귀를 간지럽히는 꽃에 손을 대었다.

“…….”

“아니면 제가 먼저 사라지도록 하죠.”

얼이 빠져 있는 해리슨의 모습에 샤를로즈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후원의 입구로 향해 걷기 전, 몸을 살짝 비틀어 조용히 그를 향해 속삭였다.

“그 꽃이랑 꽤 잘 어울리십니다. 폐하. 그럼 저는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각, 또각.

어두운 후원 안에 샤를로즈의 구두 소리가 경쾌한 춤을 추듯 빠르게 들려왔다.

혼자 남겨진 해리슨은 제 이마를 덮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떫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샤를로즈가 많이 컸구나.”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

화원에서 나오는 샤를로즈의 얼굴에 초조함이 드러났다. 자신을 제일 싫어하는 저 폭군 남자 주인공의 보복이 두렵기도 했고, 저택으로 돌아가면 두 명의 오빠들이 저를 쪼아 댈 것을 생각하니 두통이 아렸다.

‘침착하게 행동해. 뻔뻔하게.’

원래 샤를로즈 레베크는 낯짝이 두꺼운 악녀였으니까.

움츠러진 어깨가 곧게 펴졌고, 수수한 회색 드레스를 두 손으로 집어 성큼성큼 발레 하듯 걷는 샤를로즈는 어느 때 보면 천사 같았다.

허나, 본질이 악해 사람들의 원망을 받았다.

이제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으로 움직이고 있는 샤를로즈의 발이 족쇄라도 채운 것처럼 무거운 모양이다.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가 안 들리기를 반복하니.

‘분명 샤를로즈 레베크는 주인공들의 애증의 대상이었지. 없애고 싶지만 못 없애는 존재. 그저 여주인공의 감정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일차원적 악역. 그게 바로 샤를로즈였다.’

안타깝게도 샤를로즈에게는 편이 없었다.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딱 한 명을 제외하고 없었다. 바로 죽은 레베크 공작 부인뿐이었다. 공작 부인은 샤를로즈를 친딸처럼 아꼈다. 샤를로즈는 제 편이었던 공작 부인이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황이나 과호흡 증세를 일으켰다.

(샤를로즈가 자주 남자 주인공들 앞에서 쓰러지는 일러스트를 많이 봐 왔다. 그리고 설정집에 샤를로즈는 우울증이 있는 미친 악역이라고 쓰여 있었다.)

공작 부인의 부재에 대한 우울증이 너무나 심해져 몸이 연약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샤를로즈의 밥상은 늘 묽은 죽이었다.

샤를로즈는 제 두 팔을 쓸어내렸다. 딱딱한 뼈들이 만져졌다.

‘이러다가 굶어 죽는 거 아냐?’

일단, 밥 좀 잘 먹어야겠어.

샤를로즈의 몸은 너무나도 깨지기 쉬운 몸이라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천천히 걷던 샤를로즈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누군가가 그녀가 다시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껏 성이 난 모습의 제레미가 팔짱을 낀 채 저택 문 앞에 서 있었다.

“샤를로즈!!”

“……제레미 오라버니?”

제레미는 샤를로즈를 보자마자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어? 입이라도 붙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봐.”

“아플 예정이라고 했잖아요.”

“그런 걸로 변명이 통할 것 같아? 너 때문에 티아의 생일 파티가 완전히 망해 버렸어.”

제레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거만하게 턱을 들어 더 할 말이 있냐며 샤를로즈의 숨통을 막히게 하였다.

“그건 제 생일 파티가 아니잖아요. 티아의 생일 파티지.”

따지고 보면 당사자가 도망을 가 버려 망친 파티였다. 이건 샤를로즈의 탓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을 탓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오라비가 고심했던 생일 파티를 망쳤으니.

“이게, 진짜. 너 같은 게 우리 가문에 들어와서 화목한 적이 없어. 늘 너와 대화하면 유진 형이나 나나 너 때문에 목소리도 높아져. 짜증 나.”

“그러니깐 제가 이 가문에서 나가겠다고요. 제레미 오라버니.”

“아직도 그 헛소리를 하는 거냐. 미쳤어? 너를 조용히 퇴출하게?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넌 여기서 절대 나가지 못해. 알아들었어? 넌 평생 우리 가문에 수치로 썩어야 한다고.”

“어째서요? 제가 있으면 가문의 위세가 떨어지잖아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어. 네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돌이켜 봐. 더 내려갈 곳도 없어.”

제레미는 저 망할 것과 싸워 봤자 이득이 없다고 늘 생각했다. 샤를로즈의 생각이라도 알고 싶어 자주 싸우지만,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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