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20)

3화

그저 여자 주인공들의 주변인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일밖에 없는 건가?

‘하아. 숨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파티에 참석하기에는 낯짝이 너무 두꺼워.’

제레미를 더 홀려야 했는데, 잠깐 넘어올 것 같았던 그 아슬아슬한 느낌이 아쉬웠다.

기사단장이면 호위를 핑계로 자신을 어디론가 숨게 할 수 있을 텐데.

샤를로즈는 동그란 보름달을 응시하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였다.

‘여자 주인공인 티아가 언제 돌아오더라?’

샤를로즈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죽는 날이 언제인지.

입 안의 연한 살을 잘근잘근 깨물던 행동을 멈추고서는 언제 자신이 죽는지 떠올렸다. 저절로 제 입술이 벌어졌다.

“……앞으로 3년 남았네. 빌어먹을.”

이 게임 속에서는 난데없이 ‘3년 후’라고만 뜨고 악역인 샤를로즈는 여자 주인공에게 바로 제거된다.

그럼 지금 샤를로즈가 해야 할 행동은?

“어떻게든 퇴장을 해야 해. 악역처럼 굴면 안 돼. 그렇다고 이미 여자 주인공에 빠진 남자 주인공들을 어떻게 꼬셔? 덧붙여 가족들도 너무 거지 같은데.”

샤를로즈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이 게임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친구들을 통해 심심풀이로 했던 게임 속에 들어올 줄이야!

샤를로즈는 미간에 손을 얹었다. 툭, 툭 미간 사이를 몇 번 건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죽음이 두려웠다.

여자 주인공이 돌아오기 전에 죽으면, 진짜 죽게 되나? 죽으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려나?

아아, 아무것도 모르겠네.

하물며 여자 주인공의 시점으로는 호감도, 집착도, 감정이 보였는데 악역의 시점으로는 그런 자그만 힌트도 보여 주지 않았다. 시스템 창이 허공에 나타나긴커녕 방 안의 먼지만 보일 뿐이다.

너는 그저 여자 주인공을 위한 진정한 악역이라는 듯.

“하아, 하아.”

숨이 거칠어지며 답답함이 샤를로즈의 몸을 꽉 누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은 어느새 새벽을 밝히고 있었고, 동이 텄다.

***

티아 레베크의 생일 파티에는 여러 고위층 귀족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남자 주인공들- 역시 일찍이 와 그녀를 찾고 있었다.

요한 티타어스.

“티아가 보이지 않는군.”

화려한 금발에 붉은색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요한 티타어스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네놈이 계속 이상한 편지를 보내서 피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안 그러나, 주드엔?”

청색이 옅게 띠는 흑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루야가 제 검은색 눈동자를 주드엔을 향하며 물었다.

“모릅니다.”

주드엔 엘리어트. 차분하게 가라앉은 갈색 머리카락에 얼핏 보면 금색으로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단정해 보이는 그가 제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보며 미묘하게 얼굴을 굳혔다.

‘티아를 위한 남자들.’

주드엔은 한심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우습게도 자신 역시 티아를 찾고 있었다.

이 화려한 연회장 안에서 그 찬란한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에 벽안을 지닌 티아를 찾는 건 쉬울 텐데.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연한 금발의 머리카락과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그녀는 늘 제 시야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티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파티가 있었을 때는 늘 먼저 와 우리를 반겼는데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파티의 주인공인 티아는 당연히 저 높은 위치에 손을 흔들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저 높은 위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티아를 아끼는 그 오라비들도 말이다.

“……음.”

제일 구석에서 와인 잔을 돌리고 있었던, 해리슨 리스 아이바크니는 신분을 속여 아이바크니 제국의 황제가 아닌 평범한 백작으로 파티에 참석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도 그는 단 한 번도 관심이라는 걸 주지 않고 오직 티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인을 홀짝 마시며 파티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저벅, 저벅.

티아의 오라비들이 높은 층에 올라갔다. 유진이 앞에 나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티아가 사라졌습니다.”

유진의 충격적인 말에 여러 곳에서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파티 주인공은 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없는 파티는 처음이겠지요, 저도 처음입니다. 하지만 이미 연 파티를 닫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은 그냥 파티라 생각하시고 즐겨 주시면 좋겠네요.”

유진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솟아 있었다. 티아를 대신해 샤를로즈라도 데려오려고 했더니만, 샤를로즈의 방에는 사람이 아닌 먼지들만이 자신을 반겼다.

‘정말 도망갈 줄이야. 혹시 어디에 숨어 있는 건가?’

유진은 말하면서도 계속 샤를로즈가 거슬렸다. 그녀는 이 저택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 레베크 공작저는 삶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가족이 생기고 인형이 되고 삶이 된 곳이 바로 레베크 공작가였다.

유진의 마음은 여유가 없었지만, 얼굴에 티 하나 내지 않고 마지막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옆에 있던 제레미는 얼굴에서부터 초조함이 보였다.

‘샤를로즈! 정말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줄이야! 티아를 괴롭혔으면 대타라도 되는 게 도리 아닌가!’

제레미의 시린 벽안이 엄청난 분노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티아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은 그녀의 네 명의 남자들은 움직일 수도, 숨을 내쉴 수도 없었다. 그저 유진의 덤덤한 모습에 입술을 달싹였다.

네놈이, 아니지. 그 계집애가 기어코 티아를 내쫓았구나.

다들 같은 생각에 샤를로즈를 향한 화를 어떻게든 삭히고자 했다.

파티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샤를로즈의 대한 원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만 같았다.

한편,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는 샤를로즈는 지금 후원에 있었다.

“……이 후원은 공작 부인이 죽은 뒤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실제로 게임 속에서 티아와 그녀의 오빠들은 죽은 공작 부인이 떠오른다며 후원에 절대 출입을 하지 않았다.

샤를로즈는 주변의 찬 온도에 몸을 으슬으슬 떨어 대며 손바닥을 이용해 양팔을 세게 문질러 열을 내었다.

후, 작게 숨을 내쉬어도 큰 입김이 허공을 날렸다.

‘하필이면 샤를로즈. 하필이면…….’

샤를로즈의 어둠이 자욱하게 낀 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 갔다.

춥고, 배고프고, 지친다.

이게 정녕 꿈이라 말할 수 있을까.

미각도 촉감도 다 생생히 느껴지는 이곳을 꿈이라고 속삭일 수 있을까.

샤를로즈는 어제 자살을 다짐했던 저 자신을 채찍질했다.

‘이건 현실이야.’

다시 봐도 현실이었다.

꿈이라면 제 뺨을 후려친 그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어야지.

샤를로즈의 눈꺼풀이 살짝 내려갔다.

‘피곤해.’

레베크 공작저 제일 구석에 있는, 아무도 오지 않는 후원에 숨어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샤를로즈는 잠에 빠지고 말았다.

***

티아가 사라졌다는 그 한 마디에 엉망이 되었을 파티는 다행히도 화려한 연주로 인해 어색한 흐름이 사라지며 자연스레 생일 파티가 아닌 그냥 평범한 ‘파티’가 되었다.

유진은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하느라 바빴고, 제레미는 갑자기 사라진 샤를로즈를 찾느라 바빴다.

“제레미, 아무렇지 않은 척해.”

유진은 자연스레 제레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샤를로즈가 사라졌어.”

“그 녀석이 사라진 거와 지금 파티는 관련이 없어. 주인 잃은 개새끼처럼 낑낑대지 말고 입 다물고 손님들이나 대접해.”

유진은 레베크 공작으로서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쏟을 성격이었다. 그런데 막내 여동생이 사라졌다. 그것도 자신의 생일 파티 전날에. 그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평범한 ‘파티’가 되어 버린 티아의 생일 파티에 가식적인 미소를 입에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제레미는 어딘가 불안한 눈빛을 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형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럼 나는 저택을 순찰하고 있을게.”

“네가 왜 호위에 나서? 여기는 황궁이 아니야. 네 집이지.”

“그래도!”

“레베크 공작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두 형제가 다정한 얼굴로 험악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어느 영애가 유진을 불렀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다시 화사하게 펴졌다.

“아, 리벨리아 영애군요. 오래간만에 뵙네요.”

유진을 졸졸 쫓아다녔던 여러 영애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기에 그녀의 열렬한 구혼장과 사랑이 담긴 시를 썼던 편지지를 돌려보낸 전적이 있었다.

유진은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일을 꽤 서슴없이 하면서도 이상하게 상대방을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게 그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든 성격이었다. 뒷말이 나오면 안 돼. 그는 죽어 버린 제 어머니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샤를로즈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으면 좋겠구나. 티아도 네 여동생이고, 샤를로즈도 네 여동생이야. 유진, 나는 이상하게도 샤를로즈가 티아보다 더 좋구나. 내 배 속에 있었던 아이보다 왜 남의 아이가 더 보고 싶고 아끼고 싶고 다 해 주고 싶고 대체 왜 그럴까?]

그건 병입니다, 어머니.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2